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연방정부 산하 17개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DNI) 국장에 정보 분야의 경험이 전무한 충성파 인사를 임명했다. 리처드 그리넬 독일 주재 미국 대사다. 미국 주류 언론과 민주당에서는 이번 인사를 두고 다양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오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 게이트, 우크라이나 스캔들 등과 관련한 여러 정보를 통제하기 위한 인사가 아니냐는 의혹이다.
그리넬은 2018년 5월 독일 대사로 부임했다. 그는 공화당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인 2001년부터 7년 동안 유엔대표부 대변인을 지냈다. 대변인을 마친 뒤 2009년 미디어 컨설팅 회사를 설립했다.
독일 대사로 재직하며 그는 경솔한 언행으로 여러 차례 물의를 일으켰다. 대사에 취임하자마자 독일 기업들에 ‘이란과 거래를 중단하라’라고 권고했다. 취임 한 달 뒤에는 미국의 극우 보수 매체 〈브레이트바트 뉴스〉와 인터뷰에서 그는 “유럽 전역에서 보수주의자들의 힘을 키우고 싶다”라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러시아 천연가스관 건설 사업에 참여한 독일 기업에 ‘경제제재를 받을 수 있다’라고 위협해 논란에 휩싸였다. 이런 그를 가리켜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정보 분야의 경험이 전무한 그리넬은 폭스 뉴스와 소셜 미디어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공격적인 치어리더로 활동해온 인물”이라고 신랄히 꼬집었다.
국가정보국 국장직은 2001년 9·11 테러를 겪은 뒤 각 정보기관의 유기적 협력과 조율 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2004년 신설된 직책이다. 워낙 중요한 자리인 만큼 직급이 장관급에 해당한다. 상원의 인준도 받아야 한다. 3성 장군 출신인 제임스 클래퍼, 4성 해군 제독 출신 데니스 블레어, 역시 해군 제독 출신 존 매코널, 국방장관을 지낸 로버트 게이츠 등 정보 분야나 군 관련 경험이 풍부한 인사들이 국장을 지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1월 취임 이후 공화당 원로인 댄 코츠 상원의원을 국가정보국장에 지명한 바 있다. 2016년 대선에 러시아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미국 정보기관들은 한목소리로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을 주장했다. 코츠 국장도 정보기관들을 편들었다. 당연히 트럼프 대통령과 사이가 틀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코츠 국장을 경질하고 그 후임으로 국가반테러센터 국장으로 재직하던 조지프 맥과이어 장군을 국가정보국장 대행으로 지명했다.
하지만 맥과이어 국장 대행 역시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문제에서 트럼프 대통령 쪽에 서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2월 국가정보국 고위 인사가 일부 하원의원들을 대상으로 ‘11월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러시아의 대선 개입 동태’를 브리핑했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전해 들었다. 보도에 따르면 이 고위 인사는 ‘러시아가 2020년 대선에도 트럼프 재선을 위해 관여 중’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트럼프를 선호’ 등을 의원들에게 브리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브리핑 자리에 애덤 시프 민주당 하원 정보위원회 위원장이 참석한 데 대해 노발대발했다는 후문이다. 시프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탄핵 심판을 받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인물이다. 이런 시프 위원장이 참석한 브리핑에 자신이 그토록 꺼려하는 러시아의 대선 개입 문제가 거론됐으니 트럼프 대통령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제대로 된 분석 보고서 못 낼 것”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맥과이어마저 전격 해임했다. 자신의 열혈 충성파인 그리넬을 국가정보국장 대행으로 임명한 것이다. 직함은 ‘대행’이다. 국장으로 공식 지명하려면 상원 인준이 필요하다. 그리넬의 자질을 감안할 때 인준에 난항이 예상되기 때문에 대행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 조너선 스티븐슨 선임연구원은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그리넬은 트럼프 대통령처럼 러시아의 미국 대선 조작 노력을 지속적인 국가안보 우려로 평가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를 국가정보국 책임자로 임명한 것은 올해 대선에 대한 정보기관의 평가와 경고를 우습게 만드는 한편 관련 정보가 의회에 보고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전·현직 정보관리들도, 그리넬이 ‘대행’을 맡는 경우 ‘11월 미국 대선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 동향’에 관한 정보기관들의 의회 보고가 지연될 가능성이 크리라 내다본다. 전직 정보관리 출신인 안드레아 켄들테일러 미국 신안보센터 연구원은 〈뉴욕타임스〉에 “가장 큰 우려는 향후 정보기관이 대선을 앞두고 제대로 된 분석 보고서를 내놓지 못할 가능성이다. 그런 현상이 대선을 앞두고 실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라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기존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설’을 완전히 바꿔 다시 서술하도록 할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면서 그 근거를 ‘그리넬 임명’에서 찾았다.
그리넬 국장 대행은 임명 직후 정보기관에서만 30년을 재직한 앤드루 홀먼 국가정보국 부국장을 경질하고 트럼프 대통령 충성파인 캐시 파텔을 자신의 선임고문으로 임명했다. 한때 국가안보회의(NSC)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파텔은 데빈 누네스 전 공화당 하원 정보위원장의 보좌관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특히 2016년 러시아 게이트와 관련해 연방수사국과 법무부 고위 인사들이 감시 권한을 악용해 트럼프 캠프 인사를 몰래 추적해왔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특히 작가 리 스미스가 쓴 〈대통령에 대한 음모〉에 그는 자주 등장한다. 이 책에서 파텔은 ‘언론인, 외교관, 법무부 인사 정보관리 등이 트럼프 대통령을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리려는 거대한 음모에 개입돼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넬 국장 대행은 홀먼 부국장 경질로 끝나지 않고 다른 고위직까지 손볼 가능성이 크다. CNN은 전직 고위 정보관리의 말을 인용해, 그리넬이 최근 의원들을 상대로 러시아 대선 개입 문제를 브리핑한 셀비 피어슨 선거정보 책임자를 경질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CNN은 그리넬 국장 대행과 일한 경험이 있는 전·현직 동료들의 말을 인용해 “그는 자기와 일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대통령에 대한 충성이 최우선이라는 사실을 주지하도록 한다”라고 전했다. 자신에 대한 충성을 공직 임명의 핵심 기준으로 삼아온 트럼프 대통령이 그리넬을 임명한 진심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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