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코리 로빈은 〈보수주의자들은 왜?〉 (모요사, 2012)의 어느 대목에 이름 난 보수주의자들을 한 테이블에 모았다. “홉스 옆에 하이에크가 있고, 버크 맞은편에 세라 페일린이 있으며, 니체는 아인 랜드와 안토닌 스칼리아 사이에 있고, 애덤스, 캘훈, 오크쇼트, 로널드 레이건, 토크빌, 시어도어 루스벨트, 마거릿 대처, 에른스트 윙거, 칼 슈미트, 윈스턴 처칠, 필리스 슐래플리, 리처드 닉슨, 어빙 크리스톨, 프랜시스 후쿠야마, 그리고 조지 W. 부시는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 잠시만 봐도 이 테이블에 초대된 인사들이 뒤죽박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섞여 있는 데다 조제프 드 메스트르·루트비히 폰 미제스·레오 스트라우스와 같은 거물이 빠졌다. 열거된 인물 가운데는 우리에게 낯선 인사도 꽤 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1895년에 태어난 윙거는 1913년, 인문고등학교 (김나지움) 학생 신분이던 열여덟 살에 프랑스 외인부대에 입대했다가 아버지의 반대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아버지가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미성년자인 아들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걸었다). 이듬해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해 12월 자원입대하여 사병이 된 그는 전쟁터에서 스무 살 생일을 맞았다. 첫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후송된 그에게 아버지는 사관후보생에 지원해보라고 제안했고, 그는 6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소위 계급장을 달게 된다. 전쟁이 끝난 뒤, 윙거는 자신의 참전 경험을 일지(日誌)처럼 기록한 〈강철 폭풍 속에서〉(뿌리와이파리, 2014)를 발표한다. 그가 스물다섯 살 때인 1920년에 출간한 이 소설은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함께 바이마르공화국 시대(1918~1933)의 3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강철 폭풍 속에서〉가 성공한 이유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작가와 같은 경험을 했던 그 또래의 무수한 제대 군인들이 이 소설을 자기 이야기처럼 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사정에는 독자들과 전쟁 경험을 공유하는 것 이상의 시대정신이 작용하고 있다. 그것을 엿보기 위해서는 〈강철 폭풍 속에서〉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한 문단을 숙고해야 한다.

“우리는 대학 강의실과 학교 책상, 공장의 작업대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몇 주간의 짧은 훈련을 거쳐 벅찬 감정을 느끼며 전사의 육체로 개조되었다. 안전한 시대에 태어난 우리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 굉장하고 위험천만한 것을 동경했다. 전쟁은 그런 우리를 사로잡았다. 비처럼 쏟아지는 꽃잎을 맞으며 우리는 장미와 피의 환각에 도취된 채 밖으로 이끌려 나왔다. 전쟁이야말로 뭔가 위대한 것, 강력한 것, 장엄한 것을 가져다줄 것 같았다.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유사 이래 인간이 벌인 허다한 전쟁 가운데 낭만적인 전쟁은 어디에도 없을 테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유사 이래 가장 낭만적이지 못한 전쟁이었다. 이를테면 중세시대의 전쟁은 인간이 하는 것이었다. 칼 한 자루와 근력과 용맹. 이런 조건 속에서 영웅이 태어났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함께 기계·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하면서 새로운 군사 무기가 등장하자, 전쟁의 주역도 바뀌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전쟁을 맞게 되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엄청난 양의 물자가 동원되는 물량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역시 1917년 말경에 가서는 기계전으로 대체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주인공은 비행기·탱크·가스였고, 병사들은 적군의 얼굴도 못 본 채 죽어갔다.

그런데도 윙거와 그 시대의 젊은이들은 전쟁을 “위대하고, 강력하고, 장엄한 것”으로 환호했다. 이런 현상은 근대가 앓는 정신병리학적 기원을 더듬게 만든다. 전통 사회에서는 누구나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고, 그런 한에서는 누구도 왜소하거나 고독하지 않았다. 비록 나는 작지만 기도를 들어줄 신이 있고, 우러를 왕이 있고, 문 밖에는 대지와 자연이 있고, 마을이 있고, 가족이 있었다. 하지만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한마디 말이 함축하고 있듯이, 근대 세계에서는 그 모든 것이 녹아 사라졌다. 근본 없는 개인, 파편화된 개인, 왜소화된 개인, 고독한 개인, 권태로운 개인들만 남아 안전과 안락을 추구하는 근대를 윙거는 “안전한 시대”라고 조롱하고 있다.

베냐민 ‘윙거의 전쟁 신비주의’ 비판

안전한 시대가 피도 눈물도 없는 ‘불안한 시대’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말인(末人)들이 모여 사는 이 시대는 개개인이 전체와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하는 시대일뿐더러, 이 안전한 시대가 파생시킨 그늘은 어느 시대의 그것보다 짙다. 윙거보다 13년 연상인 카프카가 〈강철 폭풍 속에서〉보다 고작 4~5년 앞서 출간한 〈변신〉과 〈심판〉을 보라. 그레고르 잠자와 K는 그야말로 바캉스 철의 개처럼 외롭게 버려지고 복날의 개처럼 무의미하게 죽는다. 반면 전쟁터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죽지 않는다. 전쟁터에는 누구나 영예로운 임무를 맡아 영예롭게 죽고, 전우는 전우를 위해 죽는다. 전쟁터에서 인간은 비로소 근본을 찾게 되고(나는 한국인이야!), 공동체를 이루며(우리는 아군이야!), 혹시 죽더라도 낱개가 아닌 전체(민족의 영령!)가 된다.

윙거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 독일에서 일어난 새로운 보수주의 담론 지형에서 가장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작가이자 극우 논객이었다. 그는 고독에 몸부림치는 낱낱의 개인에게 “너는 홀로 있지 않아, 바로 너를 위대하게 해줄 국가와 민족이 있어!”라는 환상을 제공했고, 히틀러와 나치즘이 그 환상을 전유했다. 사랑이 그렇듯이, 환상은 죽음과 연관될 때 더욱 강력해진다. “다 죽게 될 것이나, 그 가운데 소수는 살아남는다”라고 말하는 종말론과 똑같이 나치즘도 그렇게 말한다. “다 죽게 될 것이나, 게르만 민족은 살아남는다.”

〈노동자·고통에 관하여·독일 파시즘의 이론들〉(글항아리, 2020)은 윙거의 전체주의적 사유를 압축한 두 편의 글과 발터 베냐민의 논평을 함께 묶었다. 윙거의 전체주의(총체성) 이론은 그가 전쟁터에서 체험한 것을 역사철학과 현실 정치에 맞게 번안한 것으로, 홉스 이래로 ‘전쟁 모델’은 거의 모든 우파들이 세계를 분석할 때 원용하는 모델이다. 베냐민이 윙거의 논리를 “전쟁 신비주의” “소년적 열광” “몰락의 숭배”라고 비판한 것은 당연하지만, 어떤 논의에서는 ‘우파 베냐민’으로 보일 만큼 그는 명민하다. 니체에게 강한 영향을 받고 하이데거에게 깊은 영향을 준 윙거의 전모가 궁금하다면, 전진성의 〈보수 혁명-독일 지식인들의 허무주의적 이상〉(책세상, 2001)을 함께 읽어보아야 한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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