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 그림

결국 개학이 연기되었다. 11년 전 악몽이 떠올랐다. 나는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신종플루)를 앓았다. 시작은 교실이었다. 3월 무렵에 시작된 신종플루도 처음에는 특이한 감기쯤으로 여겼다. 그러다 11월에 접어들어 위기경보 수준이 ‘심각’ 단계로 격상되었고 학급에서 기침하던 아이들이 하나둘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양성 판정을 받은 아이도 있었고, 학부모가 예방 차원에서 가정체험학습을 쓰기도 했다.

당시 지침에 따라 나는 매일 아이들 체온을 점검하고, 특이사항을 기록하여 교무실에 알렸다. 확진자의 증상은 독감과 유사했다. 고열에 근육통, 설사, 구토가 동반되었다. 비상시국인지라 사소한 상황도 보건교사와 협의하고, 필요하면 학부모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런데 가정에 따라 반응이 사뭇 달랐다.

반 친구들과 선생님께 폐를 끼칠 수 있으니 아이를 데리러 가겠다는 집이 절반. 나머지는 여러 가지 이유로 아이를 좀 더 데리고 있어달라거나, 견디다가 정 아프면 조퇴를 시켜달라고 했다. 초임 교사였던 나는 부모가 연락을 받고 너무 놀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의외의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문제는 정말로 심각해 보이는 아이가 집에 가지 못할 때였다.

아픈 아이를 교실에 둘 수는 없어서 일단 보건실로 데려갔다. 보건실에서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신종플루가 유행하는 상황에서 의심 환자는 빨리 격리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보호자가 데리러 올 형편이 안 되었다. 애는 곧 픽픽 쓰러지게 생겼는데. 이대로 조퇴를 시켰다가는 하굣길에 무슨 일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결국 담임인 내가 관내출장을 내고 학교 근처 종합병원에 같이 갔다. 부모가 너무 바쁘거나, 부모와 함께 살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그런 연민도 잠시, 엄청난 육체적 고통이 찾아왔다. 감염된 것이다. 신종플루는 제정신으로 체감한 그 어떤 고통보다 막강했다. 이마가 터질 것 같았고,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강릉의 작은 원룸에서 신종플루에 걸린 초임 교사는 끙끙 바닥을 굴렀다. 나는 타이레놀 한 알을 먹고 그 기운으로 택시를 잡아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그 시기 강릉에서 나는 도움받을 곳이 없었다. 부모는 멀리 울산에 있었고, 대학생인 여자친구는 춘천에 있고, 전염병에 걸린 마당에 동료 교사를 부를 용기는 나지 않았다.

20대라 그랬는지 수액과 타미플루의 힘으로 금방 나았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히 몸에 저장한 기억이 있다면 돌봄이 부재한 상황에서 아프면 정말 서럽고, 위험하다는 느낌이다. 나보다 더 어리고, 약하며, 돈도 없는 학생은 조퇴를 거부당했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또 그런 애를 즉각 데려갈 수 없는 부모 마음은 어땠을까.

내가 만일 반지하방에 살고 있는 확진자라면

11년이 흐른 지금 나는 두 딸을 아내와 교대로 돌보고 있다. 2월 초에 마스크를 비롯한 소독 물품을 넉넉하게 구비해두었고 냉장고도 가득 채웠다. 주말에는 핑크퐁 동요를 틀어놓고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며 집에 머문다. 자발적 자가격리라고 하지만 남쪽에서 쏟아지는 햇볕은 따사롭기만 하다. 내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마다 쓸쓸하고 괴로웠던 2009년의 강릉을 생각한다.

글을 쓰는 현재, 아직 아무도 학교에 등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기 삼척에서도 확진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집에 머무르며 외부 행동을 삼갈 확률이 높다. 누군가에겐 휴가에 가까운 외출금지가 열악한 거주환경과 경제 조건에서는 끔찍한 경험이 된다. 병에 걸렸을 때는 두말할 것도 없고. 텅 빈 교실로 출근해 사물함에 아이들 이름표를 단다. 과연 올해는 어떤 친구들과 1년을 보내게 될까. 학부모 대신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가는 일은 몇 번이나 있을까. 신종플루의 결말이 재현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기자명 이준수 (삼척시 정라초등학교 교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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