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

혐오. 표준국어대사전 뜻풀이는 ‘싫어하고 미워함’이다. 한자로는 ‘싫어할 혐(嫌)’에 ‘미워할 오(惡)’를 쓴다. 뜻풀이도 어원도 평범한 이 단어가 21세기의 정치논쟁을 좌우하는 최전선에 섰다.

다른 사람을 혐오하는 건 나쁘다. 그러므로 혐오감을 자극하고 동원하는 정치도 나쁘다. 여기까지는 쉽다. 어려운 건, 무엇이 혐오이고 무엇이 아닌가를 판단하는 일이다. 혐오를 생산하는 사람, 단체, 정치세력들도 자신들의 말은 혐오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라고 주장한다. 혐오가 나쁘다는 합의는, 그 자체로는 빈껍데기다. 혐오란 어떤 감정인가, 혐오 감정이 분출하기 쉬운 조건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이 나쁜 감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가. 이 질문에 답한 후에야 혐오가 나쁘다는 말에도 무게가 실린다.

2020년은 혐오와 연관된 중요한 사건들이 동시에 쏟아지면서 시작됐다. 중국에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가 등장해 세계로 퍼져 나갔다. 숙명여대에서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을 바꾼 트랜스젠더 학생이 대학에 합격했으나 재학생과 신입생들의 반발로 등록을 포기했다. 그리고, 영화 〈기생충〉이 미국에서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다. 각각은 서로 무관한 이야기다. ‘혐오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단서를 풍부하게 담고 있어서, 우리는 이 별개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볼 수 있다.

Scene 1. 기생충

〈기생충〉에서 부유한 박 사장 부부인 동익(이선균)과 연교(조여정)는, 가난한 기택(송강호) 일가족에게 속아 가정교사·운전기사·가정부로 가족 넷을 다 채용한다. 일솜씨는 만족스러웠으나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냄새다. 기택 가족에게는 뭔지 모를 냄새가 났다. 동익은 연교에게 새로 온 운전기사 기택을 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면서 안 넘어. 그런데 냄새가 선을 넘지.” 동익은 쾌활하고 친절해 보이지만 고용된 사람들이 ‘선’을 넘는 건 견디기 어려워한다. 기택은 선을 넘지는 않는다. 그런데 기택의 냄새가 선을 넘어 들어온다.

이것은 우리에게 좋은 출발점이다. 혐오란 일차적으로 역겨운 대상에 대한 거부반응인데, 심리학자들은 감염병을 피하는 전략으로 역겨움 반응이 진화했다고 본다. 역겨움은 오물이나 배설물과 같은 오염원을 피하게 해준다. 의료 시스템도 건강보험도 없던 수렵채집 시대에, 혐오는 일종의 원시 헬스케어 시스템이었다. 질병을 유발하는 오염물은 피해야 한다. 혐오는 그런 반응을 일으켜주는 감정이었다.

심리학자 폴 로진은 혐오 연구의 대가다. 그에 따르면, 혐오는 어떤 대상이 자기 몸 안으로 들어와 자신을 더럽힌다는 느낌과 이어져 있다. 중요한 것은 오염원과 자기 신체의 경계선이 지켜지느냐다. 혐오란 오염원이 신체의 경계선을 넘어 몸 안으로 침투한다고 느낄 때 극대화된다. 그래서 혐오감은 거리가 있는 감각보다 ‘직접 닿는 감각’에 더 민감하다. 촉각, 미각, 그리고 후각이다. 혐오감은 경계선을 넘어오는 오염물에 대한 감각이고, 냄새는 경계선으로 막기가 어렵다. 이쯤 되면 동익의 대사는 혐오에 대한 심리학 논문에서 바로 건져 올린 것처럼 들린다.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면서 안 넘어. 그런데 냄새가 선을 넘지.”

영화 〈기생충〉에서 동익(이선균)은 기택의 냄새를 두고 끊임없이 구별짓기를 시도한다.

Scene 2. 바이러스

코로나19는 발열, 기침, 호흡곤란, 폐렴 등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다. 중국 우한에서 발원해 세계로 퍼져 나갔다. 오염원이 선을 넘어오지 않도록 막는다는 직관은 거의 본능적인 요구다. 혐오 감정이 감염병을 피하는 전략인 이상, 신종 감염병이야말로 혐오를 자극하는 최상의 배양액이다. 코로나19가 우한을 넘어 확산 추세를 보이던 1월23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중국인 입국 금지 요청’이 올라왔다. 2월13일 현재까지 거의 70만명이 청원에 동참해, 청와대가 답변을 내는 기준선 20만명을 훌쩍 넘겼다.

한국 정부는 전세기를 보내 발원지인 우한의 교민들을 국내로 이송했다. 이들을 충남 아산과 충북 진천의 시설에 격리 수용하기로 했는데, 이 소식이 알려지자 현지 주민들이 트랙터를 끌고 나와 길을 막는 소동도 있었다. 감염병(코로나19)의 오염원(우한 교민)으로부터 경계선을 지키겠다는 반응은 우리의 직관에 잘 어울린다.

혐오 스위치가 켜지면 위험의 크기를 합리적으로 평가하는 작업은 매우 어려워진다. 혐오는 ‘경계선을 강화하는 감정’이기 때문에, 문제의 오염원이 경계선을 넘었는지 아닌지만 따지도록 만든다. 코로나19의 전염성이 얼마나 강력한지, 우한 주민이 정말로 심각한 오염원인지, 중국인 전체를 오염원으로 평가하는 게 타당한지, 전면 봉쇄를 택했을 때 우리가 감수해야 할 다른 비용은 무엇인지, 일련의 위험 평가를 구체적으로 따지는 작업은 우리 머리에서 뒷전으로 밀려난다.

ⓒ시사IN 이명익1월30일 우한 교민 이송을 반대하는 아산 시민들이 출입구를 막고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Scene 3.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A씨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을 바꿨다. 그는 숙명여대 법학부에 합격해 3월부터 신입생이 될 예정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숙명여대 재학생과 합격자들, 그리고 여러 여대의 ‘래디컬 페미니즘’ 동아리들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형성되었다. A씨의 입학을 반대하는 성명서도 나왔다. 제목은 ‘여성의 권리를 위협하는 성별 변경에 반대한다’였다. 성명서는 A씨를 ‘자신을 여자라고 주장하는 남자’라고 지칭하면서, 타고난 성 정체성을 바꾸려는 시도 자체를 반대한다. “성별 변경은 (중략) 자신을 여자라고 주장하는 남자는 누구든 여자들의 공간을 침범하고 빼앗아갈 수 있게 한다.” 성명서에는 6개 여대에서 23개 조직이 이름을 올렸다.

‘혐오 감정’과 ‘혐오 표현’은 정의가 다르다. 거칠게 구분하면 혐오 감정은 인지과학자, 심리학자, 철학자들의 관심사다. 혐오 표현은 주로 법학에서 다룬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내놓은 〈혐오 표현 리포트〉를 보면, 혐오 표현이란 ‘특정 속성을 가진 집단’을 향해 ‘부정적 관념과 편견’을 ‘공개적으로 표출’하여 ‘차별을 조장하는 효과’를 내는 표현이다. 성별 변경 반대 성명서는 ‘트랜스젠더 집단’을 향해 ‘성별을 바꾸려는 시도가 잘못이라는 부정적 관념’을 ‘공개적으로 표출’하여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을 조장하는 효과’를 냈다. 혐오 표현의 정의에 부합한다. A씨는 결국 숙명여대 입학을 포기했다.

혐오 표현의 정의에 따라, 말하는 쪽 말고 대상이 된 쪽이 소수자냐 아니냐가 핵심이다. 즉, A씨가 트랜스젠더라는 소수자 집단에 속해서 차별을 조장하는 표현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그 표현을 남성이 했는지 여성이 했는지는 혐오 표현을 판단하는 기준은 아니다.

혐오 표현에는 왜 표현의 자유 원칙이 유보될까? 혐오 표현은 ‘특정 속성 집단’의 ‘차별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소수자 집단의 차별을 조장하는 표현은 단순히 말에서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피해로 이어진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혐오 표현은 유대인을 ‘경계선 밖으로 내몰아야 할 오염원’이라는 인식을 강화했다. 이는 결국 유대인 대학살로 가는 길을 텄다. 역사의 궤적 때문에 독일은 선진국 중에서 혐오 표현 규제가 가장 까다로운 축에 들어간다.

혐오 감정과 혐오 표현을 정의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미묘한 균열이 발생한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 조장’이 성립하는 순간 혐오 표현은 성립한다. 그 표현이, 혐오 감정의 기본 속성인 ‘역겨움’ ‘오염물을 피하려는 반응’ ‘경계선을 지키려는 감각’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개념상 혐오 표현은 혐오 감정 없이도 성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차이가 일반인의 언어 습관과 충돌하면서 균열을 만들어낸다.

래디컬 페미니즘 동아리들이 A씨의 입학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냈다.

트랜스젠더 A씨에 반대하는 성명서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여대는 (중략) 여성 차별과 남성 폭력으로부터 안전함을 느끼는 공간이다.” “여대는 이미 남성들의 침입으로부터 안전을 위협받고 있으며 이는 모든 여자들의 공간이 겪고 있는 문제이다.” 계속 강조되는 감정은 트랜스젠더라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아니다.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안전이라는 기본권에 대한 요구로 이어진다. 트랜스젠더 A씨 논란에서 터져 나온 반대의 목소리는 사실상 이런 주장을 바탕에 깔고 있다. “우리는 혐오가 아니라 두려움을 느낀다. 특정 소수자를 혐오할 권리가 아니라, 안전할 권리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혐오 표현이 아니라 기본권에 대한 요구이며, 따라서 정당하다.” 

이것은 만만치 않은 반론이다. 답을 찾으려면 다시 〈기생충〉으로 돌아가야 한다.

Scene 4. 기생충

냄새는 모두에게 같은 의미가 아니다. 박 사장의 어린 아들 다송이는 기택 일가족의 냄새를 가장 먼저 알아챈다. “둘이(기택과 충숙 부부) 냄새가 똑같애. 제시카 선생님(딸)한테도 비슷한 냄새가 났어.” 하지만 다송이는 그저 같은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알아챌 뿐 그 냄새로 경계선을 강화하지 않는다. 이후로도 제시카 선생님은 다송이 생일 파티의 여주인공으로 불려 나온다.

아빠인 동익은 다르다. 기택의 냄새를 두고 동익은 끊임없이 구별짓기를 시도한다. 기택의 냄새는 “오래된 무말랭이 냄새” “행주 삶을 때 나는 냄새” “지하철 타는 놈들 특유의 냄새”다. 냄새는 자연 현상이지만, 냄새라는 속성이 특정한 집단에 투사되면서부터는 더 이상 자연 현상만은 아니다. 이제 냄새는 특정 집단을 다른 집단과 구별짓는 낙인, ‘지하철 타는 놈들’의 낙인이 된다.  

마사 누스바움은 세계적인 석학으로 손꼽히는 미국의 법철학자다. 누스바움은 ‘원초적 혐오’와 ‘투사적 혐오’를 구분한다. 배설물, 혈액, 생리혈, 정액, 콧물, 시체, 진액, 썩은 고기, 구더기, 바퀴벌레 등을 보거나 만질 때, 실제 감염 위험이 있을 때 나오는 직관적 반응이 원초적 혐오다. 우리는 이 문장에서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거나 몇 단어를 건너뛴다. 이런 직관적 반응을 특정 집단에 투사한다고 생각해보자. 동성애자, 흑인, 여성, 유대인 등 특정 집단이 이런 오염원의 속성을 갖고 있다고 덮어씌우는 것이다. 19세기 유럽인들은, 유대인이 독특하고 불쾌한 냄새를 뿜어내고, 그것이 생리 중인 여성의 냄새와 유사하다고 널리 믿었다. “지하철 타는 놈들 특유의 냄새”의 19세기 유럽 버전이다. 이게 투사적 혐오다.

집 옆에 새로 생긴 소 도축장이 지독한 악취를 내고 개울을 오염시킨다면, 그 피해는 보상받을 수 있다. 하지만 도축업자를 백정이라며 차별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누스바움은 원초적 혐오는 어느 정도 법이 보호해주어야 할 감정이지만, 투사적 혐오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누군가가 동성애자를 보면 구토감이 일 정도로 혐오 감정이 치솟는다고 해서, 그가 ‘동성애자를 보지 않을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혐오 감정은 왜 이리도 쉽게 본래 기능을 넘어 투사되는가? 혐오는 왜 명백한 오염물(원초적 혐오)에 머물지 않고 차별의 엔진으로 확장(투사적 혐오)되나? 이를 이해하려면 인간의 인지 과정을 알아야 할 것 같다. 뇌과학자인 정재승 교수(카이스트)를 만났다. 그는 뇌과학 분야에서 진전되고 있는 흥미로운 연구를 들려줬다.

“전 남친 같은 미워하는 사람의 사진을 보여주면 시상하부가 활성화됩니다. 시상하부는 수렵채집 시대 때부터 우리 편 남의 편 구별짓기를 하던 뇌 영역입니다. 자원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나 불안을 표상하고 공격성을 만들어내지요. 시상하부의 활성화는 뇌섬과 조가비핵도 활발하게 만듭니다. 역겨움과 고통, 그리고 쾌락을 관장하는 뇌 영역이지요. 아울러 편도체도 활성화되는데, 여기서는 주로 공포를 관장합니다. 이 회로가 켜지면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는데, 무엇보다 전두엽의 활성화 정도가 낮아집니다. 그러니까 판단과 이성체계를 관장하는 부위가 일을 덜 하게 됩니다.”

2008년에 영국에서 수행된 이 연구에서, 연구팀은 우리 뇌에서 미움을 관장하는 일련의 경로를 ‘미움 회로’라고 이름 붙였다. 미운 대상을 보면, 우리 뇌의 무리짓기와 구별짓기와 공격성 본능이 자극받는다. 뇌섬·조가비핵·편도체가 따라서 반응하는데, 이 부위는 모두 변연계에 있다. 변연계는 진화적으로 좀 더 오래된 감정을 관장하는 곳으로, 한때 ‘파충류의 뇌’라고 불리기도 했다. 여기서 역겨움과 분노와 공포가 자극받는다. 반대로 이성을 관장하는 전두엽은 활동성이 떨어진다. 이 회로는 원래 배설물과 같은 오염물을 보았을 때 활성화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싫어하는 사람의 사진과 같은, 오염물이 아닌 대상을 볼 때에도 우리 뇌는 비슷한 방식으로 반응했다. 우리 뇌가 원초적 혐오와 투사적 혐오를 처리하는 회로가 겹친다는 의미다.

“정말 흥미로운 건 그다음입니다.” 정재승 교수가 말을 이었다. “이 회로는 ‘사랑 회로’라고 불리는 곳과도 상당히 겹쳐요. 그러니까 우리 뇌는 두려움이나 불안을 느꼈을 때 무리짓기와 구별짓기로 대응합니다(시상하부). 이렇게 내집단과 외집단을 나누고 나면, 내집단을 향해서는 사랑과 결속과 대규모 협력을 만들어내고(‘사랑 회로’), 외집단을 향해서는 분노와 공포와 역겨움을 느끼게 되죠(‘미움 회로’). 내집단에 대한 사랑과 애착, 외집단에 대한 혐오와 배척, 이 둘은 정반대로 보이지만 사실은 한 회로에서 처리되는, 붙어 있는 감정이라는 겁니다.” 우리 종에게 매우 중요한 협력과 결속의 기능이 작동하는 바로 거기에, 혐오의 스위치가 함께 내장되어 있다. 혐오 감정을 다루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가 짐작이 간다.

Scene 5. 바이러스

코로나19는 유럽에서 동아시아인 혐오의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독일의 주간지 〈슈피겔〉은 코로나19를 다룬 표지에 ‘Made in China(중국산)’라는 표제를 달아 논란에 휩싸였다. 누스바움의 구분법을 사용하면, 감염병에 대한 공포는 원초적 반응이지만, 특정 집단 전체가 그 속성을 가졌다고 낙인찍는 것은 투사적 혐오다. 〈슈피겔〉 표지는 감염병과 중국을 부주의하게 연결하는 투사적 혐오의 전형적 사례를 보여준다. 독일에서 중국인 여성이 대낮에 길에서 머리채를 잡히며 발길질을 당하는 등, 서구에서는 동아시아인을 상대로 크고 작은 혐오 범죄와 혐오 표현이 발생하고 있다.

스위스에 사는 교민 김진경씨는 요즘 기차를 타기도 망설여진다. 대중교통과 공공장소에서 동아시아인들이 수모를 당했다는 얘기를 들으며 공포가 점점 커지는 와중에, 독일어를 가르쳐주는 스위스인 교사가 신문 기사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한국에서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인종 혐오 바이러스’라는 제목이었다. 김씨는 “스위스에서 기차 타길 망설이는 한국인인 나는, 서울 홍대앞에서 모욕을 당했다는 중국인에 감정이입이 됐다”라고 말한다(20~22쪽 기사 참조). 이 말이 평균적인 한국 여론에 호소력이 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한국 내부의 시선으로 보면, 유럽에서 우리 교민들이 당하는 차별은 자명하게 인종혐오로 보인다. 유럽의 교민은 바이러스 발원지로부터 한참 떨어져 있고, 그들이 동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오염원의 속성을 갖는다고 취급되는 건 불합리하다. 반면 한국인이 중국인을 오염원으로 보는 것은 임박한 감염의 위협에 대한 자구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둘은 원초적 혐오를 특정 속성 집단에 투사하여 확장하는 것이어서 구조가 같다.

누스바움이 말하는 ‘투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거의 알아채기도 어렵다. 차이를 보자. 2월4일부터 정부는 “지난 14일간 후베이성에 체류한 바 있는 모든 외국인에 대해 입국 금지”를 시행했다. 후베이성은 감염병의 진원지이므로 위험도가 더 높다. ‘중국인’이라는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진원지를 거쳐 간 모든 사람(내국인 제외)을 대상으로 했다. 영구적으로 남는 낙인이 아니라, ‘14일간’이라는 기간 제한을 두었다. 오염원을 특정 집단의 속성으로 확장하는 ‘투사’가 상당히 억제되어 있다. 동의 서명 70만명을 향해 가는 국민청원에는 이런 억제가 없다. 청원은 간명하게 ‘중국인 입국 금지’를 요구한다. 자유한국당도 연일 중국인 전면 입국 금지를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중국인이라는 특정 집단의 속성은 감염병의 위험과 대응하지 않지만, 원초적 혐오 반응은 집단 전체에 확장되어 투사된 혐오가 된다.

감염에 대한 두려움은 위험의 크기와 정도를 적절하게 평가하고 대비하도록 자극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뇌의 전두엽은 오히려 활동이 억제된다. 감염에 대한 두려움은 위험의 원천과 나 사이를 원천봉쇄하도록, 나의 무리와 저들의 무리를 완전히 갈라치도록 자극한다. 따져보면 그게 더 많은 비용과 손실을 초래할 선택일 경우가 많지만 개의치 않는다. 2월10일 대한예방의학회와 한국역학회는 공동 성명서를 낸다. 예방의학과 역학은 감염병 관리에 전문성이 있는 학문 분야다. 성명서는 “외국인 입국 제한은 국가 간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라고 썼다. 사실상 중국인 입국 금지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두려움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으나, 분별없는(전두엽이 억눌린) 두려움은 경계선을 확인하려는 혐오 감정과 연결되어 더 많은 손실을 초래한다. “감염병 방역의 성패는 배제와 차별이 아니라 포용과 인권보호에 달려 있다.” 왜? 배제와 차별은 접촉자 등 당사자들이 방역 당국을 피해 숨어 다니도록 만들지만, 포용과 인권보호는 방역 정책에 협조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혐오의 흥미로운 속성이 확인된다. 혐오는 두려움과 다른 감정이다. 하지만 혐오 감정은 거의 대부분 두려움을 동반한다. 우리가 혐오하는 대상은 우리를 오염시킬까 봐 두려워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남자들의 게이 혐오는 동성에게 강간을 당하는 공포와 뗄 수 없다. 유대인 혐오는 유대인이 질병을 옮기는 인종이라는 두려움을 늘 동반했다. 흑인 혐오는 흑인 노예가 백인 농장주의 부인과 딸을 강간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한 쌍이다. 여성 혐오는 여성이 남성을 타락시킬 것이라는 두려움과 한 쌍이다. 오늘날 난민 혐오는 무슬림 남성들이 본국 여성을 강간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한 쌍이다.

ⓒ김흥구숙명여대 게시판.

Scene 6. 숙명여대

숙명여대에서 A씨의 입학을 반대하는 핵심 논거는 “혐오가 아니라 두려움이다”로 압축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안전에 대한 요구였다. 남성이었던 A씨와 강의실과 화장실 등 생활공간을 공유하는 데 대한 두려움을 토로했다. 혐오 감정은 보통 역겨움 반응을 동반하지만, A씨 입학 반대 주장에는 그녀의 정체성을 역겨워하는 뉘앙스가 없다(역겨움은 보통의 남성 문화에서 게이와 트랜스젠더에게 흔히 드러내는 반응이다). 역겨움이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공격적 반응이라면, 두려움은 좀 더 방어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혐오가 아니라 두려움이다”라는 이분법이 직관적으로 설득력 있어 보이는 이유는, 이것이 역겨움과 두려움의 대조, 공세와 수세의 대조, 남성 문화의 트랜스젠더 혐오와 여성 문화의 두려움이라는 대조를 깔고 있어서다. 이 이분법 구도에서는, 트랜스젠더 A씨가 (다른 대학도 많은데) 굳이 여대를 다닐 권리와 숙명여대 재학생들이 안전할 권리가 충돌한다. 명백히 안전할 권리가 우선으로 보인다.

그러나 혐오에 대한 역사적, 인지과학적, 법철학적 연구 결과는 ‘혐오 대 두려움’이라는 이분법을 지지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혐오는 거의 언제나 두려움을 동반했다. 인지과학적으로 보면, ‘미움 회로’는 두려움 반응을 관장하는 편도체를 함께 활성화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역겨움이 아니라 두려움을 느낀다고 해서, 그게 혐오가 아니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

법철학적으로도 이 이분법은 지지받지 않는다. 누스바움은 감정과 느낌은 다르다고 설명한다. 느낌은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통증이나 간지러움 같은 것이다. 반면 감정은 특정한 대상이 존재하고, 그 대상에 대한 평가와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남편을 두려워하는 아내는, 남편이라는 대상이 자신을 때릴 것이라는 평가와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감정도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 감정을 불러일으킨 평가와 믿음이 사실인지, 또 타당한지 판단할 수 있다. 함께 살던 뱀이 죽어서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슬픔이라는 감정은 주관적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평가가 가능하다. 사실인가? 뱀이 죽지 않았는데 착각했거나 누군가에게 속은 것은 아닌가? 또, 타당한가? 뱀의 죽음은 슬퍼할 가치가 있는가? 뱀이 죽어서 슬픈 나머지 일상으로 복귀하지 못하는 사람을 회사는 며칠이나 용인 가능한가? 여기서 뱀을 개나 고양이로 바꾸면 어떤가? 감정이 평가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주제가 된다. 누스바움은 이렇게 ‘이성과 감정’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을 뛰어넘는다.

이제 “혐오가 아니라 두려움이다”라는 문장을 검증할 도구를 얻었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킨 평가와 믿음이 사실인지, 또 타당한지를 따질 수 있다. 여성으로 태어난 여성과 트랜스젠더 여성이 화장실을 함께 쓰면 실제로 위험한지, 위험을 막으려면 어느 정도 비용이 드는지, 그런 두려움 때문에 트랜스젠더 여성의 진학을 반대하는 일이 타당한지 등을 평가할 수 있다. 누스바움의 도구를 사용하면, 두려움 그 자체를 주장하는 것으로는 정당성이 생기지 않는다. 두려움이 사실에 근거한 동시에 타당한 것이어야 한다. 이 테스트를 통과한다면 두려움은 이것이 혐오가 아니라는 증거로 쓸 수 있다. 하지만 통과하지 못한다면, 두려움은 오히려 이것이 혐오라는 증거가 된다.

Scene 7. A씨

혐오는 강력하고 뿌리 뽑기 어려운 감정이다. 우리 뇌는 내집단과 외집단을 나누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뇌의 기능 대부분은 수렵채집민의 환경에 맞춰 진화했다. 외집단 사람들을 미워하고 배척하며, 내집단 사람들과 연대하고 결속하는 능력은 수렵채집민에게 유용했다. 배척과 결속의 두 기능을 우리 뇌가 비슷한 회로로 처리한다는 연구는 의미심장하다. 혐오는 혐오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결속감과 소속감을 만들어낸다.

혐오가 그토록 뿌리 깊은 본능적 감정이라면, 그걸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는 선택지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20세기 영국의 존경받는 판사였던 패트릭 데블린은 “모든 사회는 자신을 보존할 권리를 지니며, 공동체 구성원의 혐오에 맞춰 법을 제정하지 않으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이 말은 혐오의 본원적 기능인 ‘오염에 대한 공포’를 정확히 포착한다. 그 공포를 인정해야만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 ‘자신을 보존할 권리’라는 개념은 A씨의 입학을 반대하는 성명서의 논리와 닮았다.

누스바움은 반대편에 서 있다. 자유주의 사회란 ‘평등한 정치적·시민적 자유’를 기본 원리로 채택한 사회다. 자유의 조건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혐오는 특정 집단을 체계적으로 배제하고 낙인찍는 감정, 사실상 그 목적으로 설계된 감정이다. 그렇기에 모든 사회는 혐오라는 감정을 관리하고 연구할 의무를 갖게 된다. 그래야만 ‘보편의 원’을 더 크게 그려나가서, 그 원 안에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포함되도록 계속해서 넓힐 수 있다. 누스바움은 내집단과 외집단을 나누는 인간 본성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 경계를 끝까지 밀어붙여서 인류 전체를 ‘내집단’으로 포괄하는 세상을 꿈꾼다. 흑인 민권 운동의 전설적인 지도자 마틴 루서 킹은 흑인의 특별한 정체성을 강조하는 길로 가지 않았다. 그는 보편적 인권의 원을 확장하여 모든 인간이 그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외쳤다. “세상에는 굳이 따질 필요조차 없는 진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습니다.” 혐오의 진정한 해악은 우리를 보편에서 벗어나 파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숙명여대 등록을 포기한 A씨는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 ‘숙대 등록 포기에 부쳐’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이 글은 길게 인용할 가치가 있다. “나는 서점 나들이를 정말 좋아한다. 그 다양한 의견의 각축장을 통하여, 보다 나은 의견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나와 다른 사람의 의견은 어떠한 근거를 갖는지 찾아보는 행위가 재미있다. 그러나 이러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과 상대방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는 더 알아가고자 하는 호기심이 되어야지, 무자비한 혐오여서는 안 된다. 혐오는 진정한 문제를 가리고, 다층적인 해석을 일차원적인 논의로 한정시킨다. 이러한 무지를 멈추었을 때만, 사회의 다양한 가치들을 이해하고, 보다 건설적인 방향으로 공동체를 발전시킬 수 있다.”

‘평등한 정치적·시민적 자유’라는 대전제 위에서 다양성과 차이를 다뤄나가고, 그럼으로써 공동체를 더 보편에 가까운 것으로 발전시켜나간다. 그러려면 우리는 혐오라는 감정을 치열하고 현명하게 다루어야 한다. 인권의 확장에 헌신했던 위대한 운동가와 지성인들이 흔들림 없이 공유했던 원칙이, 이 젊은 여성의 짧은 글에 녹아 있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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