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A전통의상을 입은 네덜란드 소년이 생청어를 먹고 있다.

‘기니의 영주, 정복왕, 항해왕, 에티오피아·아라비아·페르시아·인도의 무역왕.’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가 1499년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항로 개척 직후 유럽의 왕들에게 보낸 서한에 표기한 공식 칭호다. 포르투갈이 이슬람 상인들을 건너뛰고 인도에서 향신료를 직수입(이라 쓰고 수탈이라 읽는다)하는 데 성공한 것은 유럽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포르투갈이 아득히 먼 인도의 식민지를 완벽히 통제하는 데는 그다지 철저하지도, 강력하지도 못했다는 것을 누구나 알게 되었다. 감시망을 피해 새어나오는 향신료 물량이 정식 루트를 통한 것보다 더 많았다. 설상가상 포르투갈은 왕가의 직계 혈통이 끊어지며 사실상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인도와 그 주변 해역에 대한 지배력은 더욱 약화된다.

200년 넘게 유럽 서민의 식탁 책임진 ‘염장 청어’

이 틈을 타서 향신료 무역에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게 네덜란드다. 이 지역은 원래 하나의 국가라기보다 신성로마제국 치하의 여러 제후국과 주교령들의 모임에 가까웠다. 15세기 들어 지금의 네덜란드 영토에 해당하는 저지대(주변 지역보다 고도가 낮아 이렇게 불렸다) 17개 지역의 작위가 하나로 합쳐지며 영토 개념이 생겨났다. 이렇게 탄생한 저지대 영토의 지배권을 차지한 것은 스페인 왕실이었다. 16세기 중반, 펠리페 2세가 즉위하며 세금을 가혹하게 매기고 민중을 수탈할 뿐만 아니라 가톨릭을 강요하자 북부의 7개 주는 오라녜 공 빌럼 1세를 중심으로 뭉쳐 독립을 선언한다. 원래부터 상업이 발달해 도시별로 주민자치에 익숙했고, 칼뱅파 개신교를 믿는 인구가 다수였기에 펠리페 2세의 막무가내식 철권통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스페인은 새롭게 탄생한 네덜란드와의 모든 무역을 금지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자신감이 있었다. 유럽에 유통되는 청어 무역의 대부분을 담당하며 축적한 자본과 조선술, 그리고 그를 기반으로 탄생시킨, 최신 선박으로 구성된 함대가 있었다. 북해를 끼고 있는 나라들 사이에서 네덜란드산 염장 청어는 생필품이나 마찬가지였다. 14세기에 네덜란드 남부 지방에 살던 한 어부가 청어의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에 절이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렇게 처리된 청어는 1년간 보관이 가능했다. 당시 유럽의 서민들에게 염장 청어는 ‘바다의 밀’이라 불릴 정도로 저렴하면서도 영양이 풍부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200년 넘게 유럽 서민들의 식탁을 책임졌으니, 그에 따른 자본의 축적 역시 엄청난 규모였다. 또한 어업과 발을 맞춰 조선술도 발달해 당시 유럽에서는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선박 생산공정을 표준화해 생산비를 대폭 절감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과 비교해 한 척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니, 지금으로 치면 엄청난 기술혁신이다. 이렇게 만들어낸 함대로, 네덜란드는 유럽 해운업의 강자로 떠오를 수 있었다. 당시 유럽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던 스페인 왕실을 상대로 독립 전쟁이라는 모험을 시도할 때에는, 그만한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 왕실의 네덜란드에 대한 무역금지령에 맞서, 이들은 북해에서 스페인 해군을 상대로 전쟁에 돌입했고, 당시까지만 해도 포르투갈 소유로 되어 있던 인도에 함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유럽인 최초로 향신료의 원산지를 차지한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이베리아의 가톨릭교도들이, 냉철하고 합리적인 신교도들의 최신식 무기 앞에 내던져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시작은, 돈에 눈이 멀어 극비 정보를 팔아넘긴 타락한 귀족의 배신행위였다.

기자명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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