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박한희 변호사는 공익인권변호사 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에서 일한다.

1월29일 오후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에 ‘박한희’라는 이름이 떴다. 그의 이름을 소환한 건 숙명여대에 합격한 A씨였다. A씨는 박한희 변호사를 보며 법대 진학을 꿈꿨다고 밝혔다. 그는 MTF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한 변호사다. 국내에선 처음이었다. “A씨가 한 발 내딛는 데 제가 용기를 줬다는 게 오히려 저에게 위안이 되었어요. 성소수자로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새삼 느꼈던 것 같아요.” 그는 현재 공익인권변호사 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에서 일한다. 성소수자 인권 및 집회의 자유와 관련된 사건을 주로 맡고 있다.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성소수자는 학교, 취업, 회사 등 삶의 전반에서 ‘거부’당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A씨가 결국 입학을 포기했다.

당사자에 대해 말하는 게 조금 조심스럽다. 패배했다는 결론을 남기고 싶지는 않다. 당사자가 목소리를 냈을 때 동문부터 여러 인권단체의 연대 서명이 있었다.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에게도 강한 자극의 계기가 됐을 것이다. 특히 A씨가 커뮤니티에 올린 글을 보며 혐오에 가장 품위 있는 방식으로 맞선다고 생각했다. 온 세상이 나를 적대할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 굉장히 용기 있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나라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은 물러나더라도 언젠가 훌륭한 법률가가 될 것 같다.

커밍아웃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2014년에 서른 살이 되었다. 앞자리가 3으로 바뀌니 ‘더 이상 이렇게 숨기고는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항공대를 졸업한 후에 2년간 다니던 건설회사를 그만두고 로스쿨에 진학한 상태였다. 혹시라도 반발이 거셀 경우 로스쿨을 자퇴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갈 생각까지 했다. 새 학기 개강총회 날 “트랜지션하고 여성으로 살고 싶으니까 그렇게 대해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여러 문장을 준비해갔지만 앞에 서니 머리가 새하얘지더라.

반응은 어땠나?

다행히 반발은 없었다. 동기들도 내가 1학년 때부터 힘들어하던 걸 봐왔으니까. 실존 인물을 직접 보면 사람들도 다르게 인식한다. 소수자는 한 명의 이미지로 쉽게 일반화돼버리기 쉽다. 성소수자의 다양한 모습이 더 가시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어떤 논의를 해야할까?

공론장에서 논의를 하더라도 기본 원칙이 있어야 한다. 모든 걸 찬반 토론할 수는 없다. 존재에 대해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논의 대상이 되면 안 된다. 혐오 표현에 대해서는 문제 제기가 있어야 한다. 이번 사건에서도 안전에 대한 불안이 누군가를 배제하는 이유가 되어선 안 된다는 점을 짚어줬어야 한다. 물론 그러한 우려가 근거 없는 불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증오범죄, 불법촬영, 페미사이드까지 실체적인 공포가 있으니까. 공간 분리는 가장 쉬운 방식이지만, 의심되는 사람들을 계속 배제해가는 방식은 지속 불가능하다.

변희수 하사부터 A씨까지 목소리를 내는 당사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변 하사나 A씨 모두 나이가 비슷하다. 2000년대 전후로 태어났다. 내 경우 트랜스젠더라는 개념을 처음 접한 게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많은 이들이 하리수씨가 나오기 전까지 트랜스젠더라는 개념을 몰랐다. 어디서도 나 같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으니 설명할 언어가 부족했던 거다. 지금은 이른 나이에 정체화하기도 하고 인권의식, 권리의식도 높다. 해외 사례도 접하면서 더 이상 감추지 않는다. 두 사람이 드러난 게 용기 있는 부분도 있지만 특이한 사람이라서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제든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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