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1973년 3월8일 박정희 대통령이 이효상씨(왼쪽)에게 공화당 의장서리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아픈 고리는 있지만 그 고리는 사람마다 다르다.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이슈에서도 그렇다. 이를테면 아빠는 그리 신앙이 투철하지 않은 개신교인이지만 본연의 자세에서 어긋나는 망발에 대해서는 극히 민감하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주문이라든가 ‘교회 일은 목사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같은 말이 나오면 아빠는 상당히 평정을 잃는다. 그 자체로 부당하지만 아빠의 개인적 트라우마와 연결되는 발언이기 때문이야.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아빠를 격동시키는 게 있다면 그건 지역감정 선동이야. 이건 대한민국의 사회적 트라우마와 관련된 것이지.

지역감정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된 말일 수도 있겠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말을 들어보자. “지역감정이라는 것은 양쪽이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에게 나쁜 감정을 갖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흑백차별이라고 하고, 과거 일제가 한 것도 민족차별이라고 하지 민족감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역감정이라는 말은 지역차별주의를 호도하기 위한 마술적 언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현재 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호남에 대한 지역차별입니다.”

다른 것이라고는 말씨와 행정구역밖에 없는 특정 지역에 대한 차별과 배제는 우리 현대사의 추악한 부끄러움으로 남을 게 분명하다. 현대사를 넘어설지도 모르겠다.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의 말을 들으면 이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종특’인가 싶을 정도지. “온 나라의 백성들을 인재로 길러도 인재가 자라지 못할까 근심인데 하물며 그중 8, 9할을 버리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 평안도 사람과 함경도 사람들이 버림받은 사람들이고, 황해도와 개성, 강화도 사람들이 또 버림받은 사람들입니다. 관동 지방과 호남 지방 사람들 중 절반이 버림받은 사람들입니다(정약용, 〈통색의(通塞議)〉).” 서북 차별은 수백 년간 극심했지만 분단 이후 평안도가 사라지면서 또 다른 지역이 저주받아 마땅한 차별놀음의 ‘술래’가 되었어. 그게 호남이지.

호남 혐오가 언제, 어떻게 시작됐는가를 정확하게 짚는 사람은 없어. 일제 수탈과 조선 지주들로부터 혹독하게 털렸던 수많은 호남 사람들이 타향살이로 일종의 ‘이방인’이 되면서 그릇된 편견이 자라났다는 설을 지지하는데, 그조차 명확한 건 아니야. 분명한 건 호남 혐오를 본질로 하는 지역차별이란 이유도 없고 근거도 미약한, 벌거숭이 ‘야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지. 이 야만적 부류 가운데에는 ‘민의의 전당’의 대표들도 어김없이 끼어 있었단다.

호남 차별과 배제가 극심해진 건 박정희 정권 때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아. 특히 이른바 ‘3선 개헌’ 후 치러진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박정희 대통령의 유력한 라이벌로 호남 출신의 김대중 후보가 약진하게 돼. 이를 기화로 호남 혐오를 악용한 지역차별이 대놓고 행해지는데, 놀랍게도 그 선봉에는 무려 7년6개월간 역대 최장수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 의원이 있었어. 3선 개헌 날치기 통과 당시 의사봉 대신 주전자 뚜껑으로 깡깡깡 책상을 두들기며 개헌안 통과를 외쳤던 바로 그 사람이야.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조차 선망의 눈길로 우러러보았던 동경제국대학 출신이니 머리는 기차게 좋은 것 같다. 독문과 출신으로서 독일 시인들의 시를 유려한 우리말로 번역하여 존경과 찬사를 받던 사람이었으나 그가 지역차별을 실어 내뱉은 말을 들으면 과연 감수성 넘치는 문학도에 더하여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는 것이 과연 사실일까 회의에 빠지게 돼.

“전라도 사람은 쌀의 뉘”(〈동아일보〉 1971년 5월21일)라는 발언부터 그의 상식을 의심케 하거니와 “영도자란 모름지기 군부 지지를 받아야 한다”라거나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라고 뇌까리는 모습은 그의 ‘인성(人性)’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요하게 만든다. 어떻게 국회의장이 이런 말을 하고 다녔을까 혀를 차게 되지만 문제는 이런 지역차별 조장 발언이 처음도 아니었고,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장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는 점이야.

“천년 만의 임금님을 모시자”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장군은 2년간 군정(軍政) 후 민정(民政)으로 돌아가면서 군복을 벗고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한다. 상대는 전 대통령 윤보선이었고 선거전은 치열하게 전개됐지.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긴 했으나 표 차이는 겨우 15만 표. 그야말로 머리카락 하나의 차이였지. 그 치열한 선거전에서 민주공화당 경북지부장 출신의 이효상은 대구 유세에서 다음과 같은 허무맹랑한 열변을 토한 바 있었어.

“박정희 후보는 신라 임금님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며 이제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으로 천년 만의 임금님을 모시자.” 과연 신라 왕 운운의 발언자가 이른바 엘리트로 평생을 살았고,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 할 유럽의 언어를 공부하고 번역했던 사람과 동일인이라는 상상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충성을 다해서인지 1963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의 낙점으로 국회의장 자리에 오른다. 이런 ‘성은’이 망극해서 그랬을까. 그는 국회의장으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실수를 저지르게 돼.

국회에서 최고의 자리는 국회의장석이야. 우리나라의 대통령이든 국무총리든, 또 미국이든 러시아든 최강대국의 국가원수든 그들이 국회를 방문해서 연설할 때는 국회의장석 아래 연단에 서는 게 당연한 일이야. ‘신라 왕의 후예’가 국회를 방문하자 이 국회의장은 덥석 대통령을 자기 자리로 데려갔던 것이지. 그 자리를 권한다고 태연히 거기에 서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장 위신 따위는 신라 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덮어버렸던 국회의장이나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싶구나. 야당 의원들은 당연히 펄펄 뛰며 반발했고 국회는 한동안 시끄러웠다. 한때의 문학도이며 “7~8권의 시집을 낸 일도 있고 번역과 철학계통 서적 30여 권을 낸” 인텔리 국회의장은 이때 이런 변명을 남겼다. “내가 압도적인 다수표로 당선되는 바람에 얼떨떨해서 아마 정신을 잃었던 모양으로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으니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동아일보〉 1963년 12월18일).” ‘나 같은 놈을 압도적으로 국회의장으로 뽑은 너희들이나 반성해라’ 하는 소리로 들리기도 하고, ‘나 너무 좋아서 그랬으니 미안해’라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사과. 역사 속에서 허다한 사과와 반성을 봤지만 이렇게 기분 나쁜 사과도 찾아보기 힘들 것 같구나. 역시 시인이자 철학자는 어디가 달라도 달랐던 것일까.

공자는 정치를 두고 이렇게 갈파했다. “정치란 바로잡는다는 것이다(政者正也).” 정치는 사람들 사이의 뒤틀린 부분을 바로잡고 부족한 자리를 채워주고, 지나친 대목을 깎는 일일 거야. 하지만 아주 저열한 정치인은 사람들 사이를 갈라치고,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을 적으로 몰아세우거나 몹쓸 사람들로 깔아뭉개면서 생겨나는 이익을 구했다. 그들에게 정치란 ‘政者征也’, 즉 정치란 누군가를 정복하고 내 것으로 취하는 일이었겠지. 이에 더하여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구나. ‘政者酊也.’ 정치란 사람들을 취하게 하는 일이다. 술이든 분노에든 혐오에든 취하게 만드는 거라고 말이야.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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