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대남(對南) 정책 관련 직책을 맡아온 리선권 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이 북한 외무상에 임명되었다. 북한 당국이 1월 셋째 주에 평양 주재 외국 대사관들에 임명 사실을 통보했다. 북측은 1월23일 그를 외무상에 임명한 사실을 확인했다. 지난해 연말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 이후 당시 리용호 외무상과 리수용 당 중앙위 국제담당 부위원장의 경질 가능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급기야 리용호 전 외무상의 후임으로 리선권 전 조평통 위원장이 임명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북한의 외교 라인 교체가 확인된 것이다. 그 배경을 둘러싸고 추측이 무성하다.
리선권 외무상 인사가 의외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있다. 리 외무상은 군 출신으로 그동안 주로 대남 정책 부문에서 활동해왔다. 외교를 맡을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2006년 남북 군사실무회담 북측 대표, 2014년 국방위원회 정책국장, 2016년 조평통 위원장 등을 지냈다. 2018년에는 다섯 차례에 걸친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북측 대표 등을 맡았는데, ‘강성’이란 평가를 받았다. 한국 측 관료나 기업인, 기자 등에게 거칠고 투박한 매너와 말솜씨로 여러 차례 눈살을 찌푸리게 한 전력이 있다. 약속시간에 2~3분 늦은 조명균 당시 통일부 장관이 ‘제 시계가 잘못됐다’고 하자, “자동차가 자기 운전수 닮는 것처럼 시계도 관념이 없으면 주인 닮아서 저렇게…”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리선권이기에 리용호 전 외무상을 대체할 인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리용호 전 외무상은 정통파 외교관 출신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통이다. 리선권이 갑자기 외무상 자리에 오른 배경을 둘러싸고 설왕설래가 이뤄진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북한 수뇌부의 인사 관행에 정통한 고위급 탈북자들이 보기에는 리선권 외무상 임명이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인사’라고 한다. 이미 예고돼왔고 예측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즉, 리용호 전 외무상이 예상치 못한 변고나 인사에 의해 궐석될 경우, 그다음 차례는 너무나 당연히 리선권이었다고 한다. 북한 외교관 출신의 한 탈북자는 그렇게 보는 이유로 최고인민회의 산하 외교위원회의 존재를 들었다. 외교위원회는 1998년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신설되면서 없어졌다가 2017년 4월11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13기 제5차 회의를 계기로 19년 만에 부활했다.
당시 위원장은 리수용 당 중앙위 국제담당 부위원장이었다. 리선권 당시 조평통 위원장 역시 위원에 포함됐다. 그 밖에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과 리룡남 내각부총리 등이 멤버였다. 중요한 것은 지난해 4월11일의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 회의 직후 발표된 외교위원회 명단이다. 리수용 당 중앙위 국제담당 부위원장이 외교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다음 위원 명단에서 첫 번째로 호선된 사람이 바로 리선권이었다.
북한 외교관 출신 탈북자에 따르면 북한의 당이나 내각의 각 기관에는 위원회라는 조직이 있다. 각 위원회는 평상시에 일상적 조직관리 등에 조언하는 일을 맡는다. 유사시 조직의 장이 궐석하는 경우, 집단지도체제를 꾸려 조직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또한 기관의 장에 대한 인사 조치가 발생하면, 해당 위원회의 ‘제1 서열자’가 대체로 그 자리를 잇게 된다는 것이다. 지난해 4월11일 최고인민회의 회의 결과 리선권이 외교위원회 위원 중 첫 번째로 호선되는 것을 보면서 그가 리용호 외무상을 이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고 이 탈북자는 말했다.
북한에서는 그동안 외무상을 하다가 대남 관계로 옮기거나 혹은 대남 정책 담당자가 외무상으로 임명된 사례가 여럿 있다. 한국전쟁 직후 군사정전위원회 북측 대표를 맡았던 남일은 이후 외무상으로 임명된다. 1970년대에 외무상이었던 허담은 조평통 위원장과 대남비서(대남 정책을 총괄하는 자리)를 맡게 된다. 대남 관계 역시 외교의 일환으로 보는 북측 특유의 관점 때문에 서로의 영역을 넘나드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번 인사에서 주목할 점은 리선권 외무상의 등장이 아니라 리수용과 리용호의 갑작스러운 퇴진 배경이다. 하필이면 지난해 연말 노동당 전원회의 과정을 거치며 두 사람이 물러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두 사람의 퇴진 사유로 통상적인 ‘신변 관련 사항’이 거론된다. 두 사람 모두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북한이 맞닥뜨린 예기치 않은 변수
일부에서는 북한 내 소식통을 인용해 ‘해외의 북한 외교관들이 서방 정보기관으로부터 금품을 받아왔다’는 사실이 노동당 전원회의에 보고되는 바람에 리수용과 리용호가 갑자기 물러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 정도의 사건이라면, 숙청 등 강도 높은 징계 소식이 따라 나와야 하는데 그런 조짐은 관찰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신변에 큰 이상 없이 뒤로 한 발짝씩 물러나 있다는 얘기만 들린다.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퇴진 배경은 지난 1월1일 발표된 당 전원회의 결정서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 대신 당 전원회의 결정서가 발표되었다. 결정서의 내용은 북·미 비핵화 협상이 아니라 사실상의 핵보유 선언으로 일관되었다. 두 사람이 퇴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신년사가 전원회의 결정서로 대체된 것은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한 북한 외무성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지난해 연말의 3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지 못한 탓이다. 즉 북한 외교의 수장으로 ‘사업성과’를 내는 데 실패한 것이다. 더욱이 노동당 내에서는 이른바 주체파들이 입지를 강화하게 되었다(〈시사IN〉 제643호 ‘주체파, 선봉에 서서 핵보유 기정사실화’ 기사 참조). 주체파는 ‘미국이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핵무기를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세력이다. 주체파들의 이런 완강한 목소리에 비핵화를 전제로 한 리수용-리용호 외무성의 대화 노선이 설 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리선권으로 바뀐 북한 외무성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1월1일 당 전원회의 결정서는 ‘새로운 전략무기’의 결의를 다지고 ‘충격적인 실제 행동’을 예고하는 등 호전적인 표현도 담고 있었다. 1월11일 타이완 선거와 2~3월의 한·미 연합 군사훈련, 그리고 올여름 도쿄 올림픽,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라는 민감한 시기를 맞아 북측은 긴장 고조를 통해 몸값을 올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예기치 않은 변수가 발생했다. 미국이 지난 1월3일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을 드론으로 공격·살해함으로써 북한의 도발 의지에 쐐기를 박았다. 또한 유사시 북한의 교란 행위는 중국이 물주이자 뒷배로서 역할을 해줘야 가능하다. 그 중국 또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이라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처해 북한을 지원할 여력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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