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에서 이란 국경도시 미르자베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커다란 승합차엔 운전사 빼고 9명이 끼어 탔다. 나와 동행을 제외한 승객은 모두 아프가니스탄 사람이라고 했다. 그때 20대 후반의 나는 탈레반이 뭔지, 이 사람들이 왜 이란으로 가야만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의 시아파 무슬림이었고, 수니파인 탈레반의 박해를 피해 파키스탄을 거쳐 이란으로 가는 난민들. 탈레반 혁명의 피해자들이었다.
‘호메이니 굿?’ ‘하메네이 굿?’ ‘하타미 굿?’ ‘이란 굿?’
1999년 5월은 파키스탄 사람들도 몇 년 만의 무더위라며 손사래를 치던 때였다. 메마른 땅. 열기는 거침없이 창 안으로 들어왔다. 창문까지 닫으면 차 안은 질식할 것처럼 뜨거웠다.
왜 그런 객기를 부렸는지 모르겠지만, 난 당시 ‘반미 투어’ 중이었다. 이왕 세계를 떠돌 거면 테마는 있어야겠다 싶어서 미국과 싸우던 나라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일단 베트남으로 가서 무작정 서쪽으로 오다 보니 파키스탄-이란 국경까지 와버렸다.
드디어 미국과 맞짱을 뜨는 나라 이란에 도착했다는 벅참을 느낄 새도 없이 국경에서부터 승강이가 벌어졌다. 입국 심사관은 내 배낭을 모두 열어 속옷까지 검사하더니 몇 가지 물품을 반입 금지했다. 확인해보니 인도에서 사온 영화 OST 테이프 3개랑 영화잡지 두 권이었다.
가져갈 방법이 없겠느냐고 묻자 이걸 모두 밀봉할 테니 이란에서는 개봉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러곤 그 물건들을 검은색 비닐로 싸고 철사로 둘둘 감아 입구를 납땜해버렸다. 이어서 여권에 뭔가 적어주었다. 나중에 숙소 주인에게 물어보니 도색잡지 두 권과 건전하지 않은 노래 테이프 3개가 있으니 출국 시 확인하라고 적혀 있었단다.
이란 여행은 여러 면에서 놀라웠다. 학창 시절 사모해마지 않던 ‘반미’를 기치로 세운 이란은 경찰국가였다. 도시의 로터리에 착검을 한 무장경찰이나,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동행한 여성이 쓴 히잡이 벗겨지면 차를 세우고 다가와 다시 쓰라고 요구하는 운전기사. 밤만 되면 국기를 흔드는 10대들이 가득 탄 트럭이 도시를 질주했다. 이란 사람들은 나에게 ‘호메이니 굿?’ ‘하메네이 굿?’ ‘하타미 굿?’ ‘이란 굿?’ 이 네 마디만 물어봤다. 그들이 아는 영어는 딱 이 네 마디였다.
답답하고 완고한 이 나라에도 은밀한 욕망이 넘쳐난다는 건 우연히 알게 됐다. 항상 히잡이 흘러내려 애를 먹던 동행 여성이 한 공중화장실에서 이란의 진실을 봤다며 흥분했다. 무더운 5월 차도르를 두른 여성들이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겹겹이 껴입은 옷을 풀어헤쳤는데, 그들의 속옷이 화려하기 그지없더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이란 여성들이 얼마나 야한 속옷을 입고 있는지 열변을 토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란 여성의 마스카라가 유독 진했다는 게 생각났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치장이 공식적으로는 눈 화장뿐인 나라였다.
나중에 영어가 유창한 숙소 주인에게 그 상황을 이야기하며 정말로 하메네이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봤다. 주인장은 ‘쉿’ 하는 몸짓을 하더니 “혁명이란 게 원래 그런 거지”라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는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세상의 모든 건 새 나가기 마련이야’라고 말하곤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내 반미 여행은 시리아를 거쳐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멈췄다. 나는 혁명의 현장을 본 적은 없다. 혁명이 성공하고 한참 뒤에야 그곳에 가봤다. 혁명이란 대체 무엇일까. 요즘 이란 뉴스를 볼 때마다 젊은 날 치기 어렸던 반미 여행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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