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일 그림

사람들이 ‘앞으로 뭘 중점적으로 공부하는 게 좋으냐’고 물으면 ‘장애학’을 공부하라고 추천한다. 심지어, ‘앞으로는 장애학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답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점점 더 장애‘학’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먼저 ‘장애’학이 아니라 장애‘학’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장애’학이라고 하면 ‘장애에 대한 학문’이란 의미다. 장애의 역사와 현실, 장애인을 위한 사회정책 등을 아우르는, 학문의 한 분야다. 이에 비해 장애‘학’은 ‘학문 일반의 성격’을 바꿀 수 있는 학문이다. 지금까지 학문이 주로 비장애인 중심으로 이뤄져왔다는 것을 직시하며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장애를 연구하며 ‘장애 해방’을 실천해온 김도현의 〈장애학의 도전〉은, 한국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게 ‘장애 연구’를 ‘장애학’으로 전환하려는 값진 시도다. 외국 이론을 그대로 수입하거나 장애의 현실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은, 장애가 장애인은 물론 비장애인까지 아우르는 인간 일반의 인식과 존재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제목부터 장애학의 ‘도전’이다.

학문은 보편성을 지향한다. 장애 연구가 장애‘학’으로 불리려면, 장애인이라는 특정 인구집단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 장애‘학’은 장애인의 어떤 신체적 손상보다 사람을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나누고 경계 짓는 그 ‘무엇’에 초점을 맞춘다. 결국 장애는 장애를 가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들을 두 종류(장애인과 비장애인)로 나누고 다른 삶을 살아가게 하는 사회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비판해나가다 보면, 현재 ‘보편’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가치들이 사실은 ‘비장애인 중심’에 불과하다는 점이 드러나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장애학은 지금의 보편에 도전한다.

정치 참여 문제부터 살펴보자. 시민이란 정치적으로 의사소통 능력과 행위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이로써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이 같은 시민의 자격은, 말하고 행위하는 능력을 전제한다. 특히 말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사람은 말을 통해 자신을 세상에 ‘계시’한다고 주장한다. 행위 역시 말을 통해 의미를 갖는다. 자신의 행위를 말로 계시할 때 사람은 비로소 인격적 존재로 세계에 존재하게 된다는 의미다.

근대사회에서 사람의 관계는 계약을 통해 형성된다. 계약은 말하는 역량에 기초하여 이뤄진다. 갑을관계라는 위계적 차별조차 행위능력과 의사소통 능력을 전제한 존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발달장애인이나 치매 노인 등은 갑을관계에서조차 배제된 존재들이다. 도덕적·정치적·법률적으로 인격성을 부정당한 존재다. 그들은 ‘갑’이라는 ‘과잉 인간’은 물론 ‘을’이라는 ‘과소 인간’조차 될 수 없다. 이성적 사고능력을 지닌 자율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면, 정치적으로 스스로를 대표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장애인들의 의사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리된다.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누군가에 의해 대리되기만 하는 이들은 결코 ‘정의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장애학은 이런 ‘정상성’에 도전한다. 저자는 “민주주의 자체에 대하여, 민주주의의 주체에 대하여, 정치공동체에 대하여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을 통해 우리는 지금 ‘정치’의 본질에 다가선다. 정치가 ‘장애를 어떤 것이라고 규정하고 배제하는’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작동해왔다는 사실이다. 조금만 따져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정치는 결국 어디까지가 ‘정상적’인 행위능력이고 의사소통 능력인지를 두고 펼쳐진다. ‘비정상적인 것(=장애)’으로 간주되면 정치에서 배제한다. 이런 측면에서 장애는 정치의 변두리가 아니라 핵심에 있는 의제였던 것이다.

개인에게 내면화된 우생학적 욕망

대표 사례가 바로 선거권이다. 보수주의자들은, 흔히 ‘아이’들은 정치적 판단능력이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투표권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진보주의자들은 ‘정상’적인 사고능력과 행위능력이 없는 고령자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장애의 문제가 장애인을 넘어 선거권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에서 사람을 분할하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누구를 장애인의 범주에 넣을지를 두고 진보와 보수가 갈린 셈이다.

장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양측 주장은 완전히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기준(정상성) 위에 서 있다. 사실상의 우생학이다. 우생학에 따르면, 사회는 능력 있는 자들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 능력 없는 자들이 참여하는 정치는 왜곡되고 오염된다. 물론 양측은 ‘최소한’의 의사소통 및 행위능력을 전제했을 뿐이라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그 ‘최소한’이라는 기준은 어느 정도 수준을 의미하며 누가 설정하는가? 이것 자체가 바로 정치의 핵심이다.

장애가 정치의 중심이라는 것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인 혐오 발언에서도 잘 나타난다. 혐오 발언 대부분은 장애의 비유를 사용한다. 자신과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발달장애’ ‘치매’ 따위 용어로 조롱한다. 조롱의 대상을 겨냥해서 ‘의사소통 능력이 없기 때문에 정치적 장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치 부문에서 나타난 우생학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생학 자체가 과거와 달라진 측면이 있다. 당초 우생학은 노골적으로 장애인을 소멸시키려 했다. 나치 독일뿐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그러했다. 미국에는 장애인들에게 강제적으로 단종수술을 시키는 단종법이 있었다. “저능아는 3대로 족하다”는 것이었다. 관련 판결문을 쓴 사람은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위대한 반대자’로 불리며 자유와 인권의 수호자로 칭송받던 대법관이었다. 복지국가인 북유럽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여하지도 못하면서 누리는 자들의 수를 줄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부적합하고 무력한 이들을 국가가 그냥 버리는 것은 냉담한 태도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재생산되도록 놔두는 것도 어리석인 일”이라고 말한 사람은 덴마크 복지제도의 설계자였다.

20세기 초중반의 우생학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경우는 이제 거의 없다. 장애에 대해서도 ‘정치적 장에서 배제하자’고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돌봄과 시혜의 대상으로 인정해준다. 그렇다고 우생학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장애학의 도전〉은 이 문제를 ‘신자유주의적 주체’와 연결하여 흥미롭게 설명한다.

신자유주의는 자기 계발에 몰두하며 모든 것을 개인적 선택의 문제로 간주하는 주체를 만들었다. 선택이 가능한 상황을 만들어주고, ‘그렇게 선택한 것은 당신 자신이므로 그 결과에 대해서도 사회를 탓하지 말고 스스로 책임지라’고 말하는 것이 신자유주의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가 수긍하는 규범이다.

우생학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진다. 신자유주의에서 우생학적 욕망은 국가 정책이나 사회 압력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화된 욕망이다. 개개인의 자율적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유전학적 서비스’는 정당화된다. 이를 ‘개별적 우생학’ ‘자발적 우생학’ 혹은 ‘소비자 우생학’으로 부른다고 저자는 소개한다. 장애학은 이런 우생학적 욕망을 내면화하는 것에 저항하여 ‘무조건적인 삶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학문이 된다. 삶은 누구에게나 절대적이고 공평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존엄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장애학의 도전이다.

이런 무조건적인 삶의 권리를 주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에게 주어진, 아니 책의 표현을 그대로 옮긴다면 ‘인민’에게 주어진 최종심급으로서 권리인 저항권이 활성화될 때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기서 이 책은 한 질문으로 집중된다. 장애인은 인민인가? 장애인은 그저 사람이 아니라 인민으로 여겨지는가? 이 질문의 핵심은 장애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민에게 있다. 누가 인민이며 인민은 누구냐 하는 것이다. 인민에 대한 정의에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의미에서 이 책은 장애‘학’의 정치적 저항이다.

※ 이번 호로 ‘엄기호의 문서 탐독’ 연재를 마칩니다. 수고하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기자명 엄기호 (문화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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