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일하는 사람입니다.” 면접 담당자가 여러 번 말했다.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조직도 없고, 눈치 주는 상사도 없는 직장. ‘노동자’가 아니라 ‘파트너’가 된다니 괜히 으쓱한 기분도 들었다. 없는 살림에 새 트럭을 구입하고 리키(크리스 히친)는 택배 기사가 되었다. 밤낮으로 일하는 게 고되기도 했지만, 그렇게 마련한 내 집에서 훗날 가족과 함께 보낼 날들을 생각하면 고된 줄도 몰랐다.

희망을 먼저 배송받은 리키에게 머지않아 절망이 청구되었다. ‘파트너’라서 택배 기사가 져야 할 책임은 산더미지만 ‘노동자’가 아니라서 회사가 나누어 지는 책임이 없다. 권리는 반송한 채 의무만 잔뜩 싣고 달린다. 돈 모이는 속도는 늘 지연배송인데 돈 나가는 속도는 꼭 로켓배송이다. 망가진 몸과 곤두선 신경이 어느새 새벽배송처럼 매일 아침 리키를 기다린다.

쉼 없이 일하지 않으면 일 없이 쉬게 된다. 그래서 정말 쉴 틈 없이 일할수록 가족 사이엔 자꾸 틈이 생긴다. 이러다간 내 집 마련을 해도 그 집에 함께 살 가족이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은 어느 날, 역시 종일 일만 하다 돌아온 아내와 언쟁을 벌이던 리키가 말한다.
“사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 그 한마디가 이렇게 오래 내 마음을 흔들 줄 그땐 미처 몰랐다.

“시간이 없어, 여보.” “아빠가 이럴 시간이 없다.” “진짜 시간이 없다니까!” 리키의 가족이 이런 대화를 주고받을 때마다 나는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이 대사를 떠올렸다. “가끔은 살려고 노력하느라, 진짜로 살아볼 시간이 없는 것 같아.”

〈나, 다니엘 블레이크〉도 꼭 보시라

평생 단결과 투쟁의 힘에 기대를 걸었던 켄 로치 감독이 여든을 넘긴 뒤 영화 두 편을 잇달아 내놓았다. 단결할 동료가 없는 나이 든 실직자 이야기 〈나, 다니엘 블레이크〉, 투쟁할 상대를 모르고 투쟁할 시간도 없는 특수고용직 노동자 이야기 〈미안해요 리키〉. ‘진짜로 살아볼 시간’을 빼앗는 사회를 차갑게 비판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느라’ 바둥거리는 이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두 편.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주인공이지만 내가 모를 리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세상에 ‘꼭 보아야 할 영화’ 같은 건 없다고, 그냥 각자 보고 싶은 영화를 보면 된다고 줄곧 주장해왔지만, 켄 로치 감독 영화 앞에서는 그깟 주장 따위 당장 접어 바닥에 깔고 공손하게 무릎을 꿇게 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본 관객이라면 이 영화도 꼭 보아야 한다. 두 편 다 보지 못한 관객은 두 편 다 꼭 보아야 한다. 당신의 새해 첫 영화가 꼭 〈미안해요 리키〉면 좋겠다. 세상이 깜박해버린 존재를 우리마저 깜박하지 않기 위해서. 시간이 없는 리키에게 우리의 시간을 선물하기 위해서. 서천석 선생 말처럼 “위로는, 상대에게 내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니까.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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