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곳이 북한산 근처라 자주 그곳을 오른다. 북한산은 큰 산이어서 많은 봉우리가 있고 여러 해를 다녔어도 가보지 못한 길이 많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서울 근처에 이런 산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어느 봉우리에나 올라 전경을 보고 있으면 미세먼지에 휩싸인 서울이 부풀어 오른 거대한 공갈빵 같기도 하다.
북한산에는 가볼 만한 장소가 많다. 숙종 때 완성되었다는 북한산성의 성문과 암문이 일단 둘러볼 만하다. 한 번도 써먹지 못한 그 성곽과 건물을 쌓고 짓기 위해 백성들은 피, 땀, 눈물을 흘리며 무거운 돌을 다듬고 날랐을 것이다. 위정자들의 잘못된 판단과 정책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폐허가 된 행궁과 무너진 성곽이 그 증거이다.
인간이 북한산에 남긴 여러 흔적 중 가장 기이한 것은 비봉 옆 사모바위 아래에 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 등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할 때 은신처에 만들어진 무장공비 조각품 3개이다. 2010년 은평경찰서가 안보 체험장을 만들자고 국립공원관리공단에 건의해 2011년 사모바위 암굴에 무장공비를 형상화한 조각품이 설치되었다. 2011년 7월, 42년 만에 김신조 루트가 일반에 공개되었다. 그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홍영표 민주당 의원은 “지금이 무슨 반공 시대냐, 무장공비 밀랍인형을 국립공원에 설치한 국립공원은 도대체 제정신이냐”라고 지적했다. 그 조형물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채 지금도 있다.
조각품 해설에는 밀랍인형이라고 되어 있지만 아무리 보아도 밀랍이 아니라 합성수지로 만들어 채색을 한 듯하다. 무엇으로 만들었든 무장공비가 총을 겨누고 밖을 노려보는 조각은 다소 섬뜩하다. 국립공원이라는 설치 장소도 의외인데 작품까지 조악하다.
무장공비 조각품도 미술작품?
요즘에는 처음 가보았을 때와는 달리 시간의 흔적이 배어 일종의 아우라가 생겼다. 전국 초등학교에 무수히 설치되었던 ‘반공 소년’ 이승복 동상이나 독서하는 소녀상이 폐교한 학교에 반쯤 부서진 채 남아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과 비슷하다. 여러 미술가들이 이승복 동상 등을 촬영해 작품에 이용하기도 했다.
논란과 설치 목적 등을 배제하고 무장공비 조각품도 미술작품으로 접근하면 흔히 말하는 장소 특정적 미술품(Site-specific Art)이라 볼 수도 있다. 장소 특정적 미술품이란 공간과 빛, 온도, 관람자의 경험까지 포괄할 수 있는 특수한 곳에 설치하기 위해 제작된 작품을 말한다. 물론 이 조각품들이 우수한 작품이라는 뜻은 전혀 아니다.
사모바위 아래 암굴에 설치된 조각을 보고 나와 서울을 내려다보면 풍경이 약간 달라 보이기도 한다. 평온해 보이지만 서울 곳곳에 전쟁의 기억과 공포가 사라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사모바위 아래 암굴의 조각품도 그러한 악몽 중 하나다. 새해에는 이 모든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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