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은 2009년부터 연말 부록으로 ‘행복한 책꽂이’를 펴내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독서 리더들의 면면은 바뀌었지만, 이들이 추천한 올해의 책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미디어에서, SNS에서 요란스럽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동굴 속 보석처럼 조용히 반짝이던 책들이 세상에 나온 기분이다.
 

조용히 나 자신과 마주 앉을 시간을 만들어주는 한 권의 시집도 있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기록도 있다. 물론 묵직한 인문학 서적도, 당장 펼쳐보고 싶은 역사 에세이도 있다. 올겨울, 이 반짝이는 것들을 품고 따뜻한 연말연시를 보내시기 바란다. 

 

독서 리더가 꼽은 올해의 책

독서 리더 33인(가나다순):권경원 권용선 김겨울 김다은 김민섭 김민식 김세정 김소영 김용언 김주원 김현 류영재 박원순 박해성 서정화 양승훈 오지혜 유종선 유진목 유희경 이강환 이기용 이슬아 이승문 이승한 정용실 정은영 정재웅 정홍수 조형근 천호선 최현숙 하명희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국 사회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는 결혼을 가부장제를 존속하게 하는 구시대적 폐습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렇다면 이미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들어간 이들이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을 통한 안정을 욕망하는 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기혼’ 상태이면서도 ‘페미니스트’일 수는 없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2015년 DC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를 기점으로 본격 논의가 시작된 페미니즘 리부트와, 비슷한 시기 터진 몇 건의 데이트 폭력 폭로를 계기로 페미니즘에 눈을 떴노라 고백한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의 저자 정지민은, 하필이면 그 무렵 결혼을 하게 된 탓에 ‘페미니스트’와 ‘기혼 여성’이라는 상반된 정체성 앞에서 혼란을 겪는다. 분열적인 상황에 처한 저자는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에 대한 답을 강구한다.

저자는 결혼 생활을 위기로 몰아넣는 것이 남녀의 생물학적·진화심리학적 차이나 권태의 문제가 아니라 남녀 간 권력 불평등

문제라는 것을 통찰해낸다. 남편이 집에서 저술 활동을 하며 가사를 챙기는 동안 자신은 ‘바깥양반’이 되어 직장 생활을 하는 쪽을 택한 그는 어느 순간 남편에게 “뭐야, 집이 왜 이렇게 지저분해” 같은 질문을 던지는 자신에게서 ‘한남성’을 발견한다. 여성이 가사 일에 더 소질이 있다거나, 남성은 소소한 일들에 무심한 경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사 일에 신경을 덜 써도 되고 자신의 사회적인 커리어가 끊길 걱정을 덜 해도 되는 권력을 점유한 쪽일수록 ‘한남’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가정과 사회에서 그 권력을 쥔 것은 남성이다. 남성과 여성 간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의 차이를 생물학이나 진화심리학에서 찾으며 권력의 비대칭 상태를 옹호하는 기존의 담론을 향해, 저자는 “성차, 본능, 자연 같은 단어를 들먹이는 이들은 언제나 권력을 가진 이들이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는 결혼에 대해 뚜렷한 답을 주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낡은 전통인 결혼제도를 헝클어 대등한 권력을 지닌 개인 간의 연대로 다시 써내려가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고뇌의 흔적을 성실하게 기록한 책에 가깝다. 그리고 그렇게 처음부터 다시 써내려가 보겠다는 생각을 했기에, 저자는 결혼을 ‘이성애 정상가정’ 모델 안에서만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 부부나 폴리아모리, 생활동반자 등 앞으로 확장될 더 다양한 가족 형태 안에서 사유하고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비혼 인구들과 이미 결혼제도 안에 들어선 이들에게, 이 책은 함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좋은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기자명 이승한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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