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이탄희 변호사는 절반 이하의 판사가 참여하는 사법행정위원회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탄희. 1978년생. 판사였고, 지금은 변호사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소속이다. 공감은 소수자와 약자들의 공익소송을 하는 비영리재단이다. 돈 안 생기는 일만 찾아 한다는 뜻이다. 수임료를 받지 않고 후원으로만 운영한다. 12월6일 〈시사IN〉이 찾아간 공감 사무실에는 변호사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일하고 있었다. 로펌에는 보통 변호사들마다 자기 방이 따로 있다. 공감에는 방은커녕 책상 하나 놓을 자리도 빠듯하다. 이탄희는 올해 5월에 합류해 가뜩이나 좁은 사무실의 인구밀도를 올렸다. 사진 찍을 때 공감 로고가 나오는지 신경을 쓴다. “요즘 제가 외부 활동이 많아서요, 이렇게라도 조직에 도움이 되어야 해요(웃음).”

그는 지난 2월 법원에 사표를 냈다. 2008년부터 판사로 일했으니, 11년 만이다. 두 번째 사표다. 첫 사표가 훨씬 유명하다. 2017년 2월에 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이다. 그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기조실) 기획2심의관으로 발령이 난 후 ‘판사 뒷조사 파일’이 있다는 사실을 듣는다. 판사들의 연구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뒷조사’의 주요 대상이었는데, 그도 거기 소속이었다.

충격을 받은 이탄희 판사는 사표를 던지고, 법원행정처는 비상이 걸린다. 법원행정처와 이탄희는 몇 차례 설전 끝에 인사발령을 취소하고 그를 원래 근무지인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으로 돌려보내기로 한다. 이 이상한 인사는 〈경향신문〉 보도로 알려졌고, 법원에는 ‘판사 뒷조사 파일’ 소문이 쫙 퍼진다. 이게 결국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을 세상에 알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연합뉴스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월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리는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기획2심의관이란 어떤 자리인가요? 이 자리를 던졌다는 의미는?

첫 사표를 쓴 다음에야 제대로 알게 됐는데요, 어느 선배 법관이 저한테 그래요. “이 판사, 지금 무슨 자리를 걷어찬 건지 알고 있습니까?” 과장 좀 보태서 ‘너 지금 대법관을 걷어찬 거다’ 이 뜻이더라고요. 기획1심의관이 법원행정처의 나머지 모든 심의관을 통할합니다. 그리고 기획2심의관은 1년 뒤에 기획1심의관으로 가는 자리죠.

기획1심의관은 왜 그렇게 특별 대접인가요?

다른 심의관들이 기조실을 크렘린(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성채. 소련 시절 공산당을 비유할 때 주로 쓰는 말)이라고 불러요. 대법원장에게서 일이 내려올 때도 기획1심의관 거치고 올라갈 때도 기획1심의관이 취합합니다. 20명쯤 되는 평심의관 중에 대법원장을 단연 자주 만나요. 대법원장 외부 일정도 기획1심의관이 챙기고 수행도 합니다. 대법원장의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가게 되죠. 이런 과정을 거치면 고등법원 부장판사-법원장-대법관으로 쭉쭉 가는 걸 당연하게 여겨요. 심장부에 들어왔다고 느끼죠. 그런데 나는 그런 걸 잘 몰랐으니까(웃음).

법원행정처의 황태자인 기획2심의관이 발령 나자마자 법원행정처를 들이받는 사표.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그날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은 이 판사를 주저앉히려 했다. 대화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저를 데려올 때부터 연구회 관련 부수적인 목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일석이조?” “그래! 일석이조. 내가 그냥 깨끗하게 인정할게.” 판사 이탄희가 마음이 무너져 내린 순간이다. 그도 자신이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공작의 적임자여서 불려왔을 거라는 의심은 있었다. 그런데도 이 순간은 아팠다.

왜 그 순간이 특별했나요?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도 컸으니까, 판사라는 업에 자긍심이 컸으니까 그랬겠죠? 판사를 그렇게 장기판 말을 두듯이 도구로 쓰는 걸 당하면서 상처를 크게 받았지요. 내가 그렇게 아끼고 자긍심을 갖는 일을 가볍게 여긴다는 모멸감. 나는 명예를 지키고 싶었어요.

자긍심, 명예, 그리고 모멸감. 이탄희는 판사 일에 자긍심이 컸고, 그 일을 도구 취급하는 상황에 모멸감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대법관으로 가는 길’을 올라타자마자 뛰어내렸다. 명예를 지키는 선택이었다. 동의하지 않는 판사도 있었다. 법관 최고의 명예는 대법관이 되는 것인데, 명예가 중요하다면서 ‘대법관으로 가는 길’에서 뛰어내린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명예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했다. 판사라는 직의 본질에서 오는 명예가 중요하다면, 법원행정처는 거래할 수 없는 본질을 베팅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어떤 자리를 차지해서 오는 명예가 중요하다면, 법원행정처는 명예로 가는 특급 티켓을 끊어준 것이다. 명예의 기준이 자기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에 따라 선택은 극적으로 갈린다. 자긍심이 내적인 명예라고 하면, 높은 자리나 사회적 명성은 외적인 명예다. 그 둘이 불일치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거나, 아예 문제조차 못 느끼고 살아온 이들이 법원에 많다는 걸 알았다.

 

ⓒ연합뉴스대법관들이 11월21일 대법원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에 자리하고 있다.

대단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다. 법원행정처 컴퓨터에 그런 어마어마한 문건들이 있을 거라고는 그도 생각하지 않았고, 이 사표로 실체가 낱낱이 드러날 거라는 기대도 없었다. 뒷일을 예측하거나 계획했다면 오히려 못했을 것 같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법원행정처 일을 하면서 판사라는 자긍심을 지킬 방법이 안 보였으니, 그다음 일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출셋길에서 뛰어내린 이유치고는 싱겁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바위를 깬다는 계획을 세운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여러 수를 복잡하게 읽는 타입이 아니라고 했다. 눈앞의 문제에 집중하고, 너무 먼 미래를 생각하지는 않으려 한다. 그런 그에게 한 선배 판사는 “싸울 줄 모른다”라고 훈수했다. 다음 수, 이를테면 정권교체 같은 변수를 보지 않고 눈앞만 본다는 뜻이었던 것 같다. 이번엔 법원행정처와 원만하게 덮고 다음 기회를 보라는 의미였다. 그는 존경하고 따르던 선배 판사의 메신저와 전화를 차단했다. 그가 ‘싸울 줄 모르는’ 사람이었던 덕분에 우리는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일상 화법에서 원칙과 현실은 반대말에 가깝다. 원칙을 말하면 현실을 모른다는 타박을 받곤 한다. 원칙이 계란이고 현실이 바위다. 가끔은 이런 장면도 생긴다. 원칙에 터 잡지 않은 현실은 카드로 지은 집과 같다. 한 명만이라도 원칙을 지키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 드물지만 있다. 양승태 대법원과 판사 이탄희의 관계가 그랬다. 가끔 원칙은 현실을 바꿔낸다.

이제 질문이 바뀐다. 판사 이탄희는 왜 출셋길에서 뛰어내렸나가 아니라, 그 전에 법원행정처로 온 판사들은 왜 아무도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나를 묻게 된다. 외적인 명예가 먼저인 판사의 행동은 오히려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모두가 그랬을 리는 없다.

임효량. 이탄희 판사가 법원행정처에 들어갈 때 기획1심의관으로 승진한 판사다. 그는 임종헌 차장이 너무 심한 일을 시키면 최대한 안 하고 미루고, 그러다 무능하다고 찍혀서 구박받는 식으로 ‘저항’했다. 판사 뒷조사 파일을 알게 된 이탄희에게, 임효량은 법원행정처의 민낯을 자세히 설명해줬다. 그의 선임인 김민수 판사가 그에게 해준 적 없던 행동이다. 판사 임효량은 양승태 대법원의 소극적 협조자였고 결코 결정적 균열을 내지는 않았으되, 자신의 고뇌를 후임자와 공유함으로써 결정적 균열이 나도록 도왔다. 이탄희는 그 사표가 온전히 자신의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양승태 대법원에 대한 이런 소극적 저항이 가늘게나마 쌓여왔고, 그는 적절한 때 적절한 자리에서 그걸 물려받았다.

첫 사표가 나비효과를 내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검찰 기소가 임박한 2019년 1월, 판사 이탄희는 두 번째 사표를 내고 변호사가 된다. 서글펐지만, 홀가분하기도 했다. 법원 내외의 숱한 방해를 뚫고 진상이 얼추 드러났으며 개혁 방향도 큰 틀에서 제시됐다. 첫 사표로부터 길고 힘든 2년을 잘 헤쳐 나왔다고, 스스로 수고했다고 말하고 법복을 벗었다. 사법개혁은 궤도에 올랐으니 자신은 내려놓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언제 깨졌나요, 그 생각?

검찰이 대법원에 비위 통보한 판사가 66명입니다. 그날을 잊을 수가 없는데, 올해 5월9일에 김명수 대법원장이 이 중 10명만 법관징계위원회에 징계를 청구해요. 그걸로 끝이라고. 그걸 듣고 한동안 아무 생각이 안 나고 멍했죠. 이건 뭐지? 대법원장이 법원개혁을 포기했나? 그러고는 곧 너무너무 화가 치솟는데, 이 문제가 매우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연합뉴스김명수 대법원장이 2017년 11월1일 국회에서 대법원장 취임 인사말을 하고 있다.

뭐가 제일 급할까요?

두 갭니다. 첫째, 국회가 사법농단에 연루된 판사를 탄핵해야 합니다. 단 한 명이라도 해야 해요.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헌법재판소가 판사 탄핵에 대해 판단을 하고 결정문을 써요. 법관은 어떤 것을 해도 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밝힌 문서죠. 전국의 법률가와 학생들이 그걸로 공부를 할 겁니다. 이게 엄청나게 강력한 기준으로 작동할 거예요. 훗날 법원에 제2의 양승태가 등장해도 한번 잡힌 기준을 다시 후퇴시키는 건 매우 어렵습니다.

두 번째는?

사법농단 사태의 본질은 ‘사법행정이 재판독립을 침해한 사건’이죠. 재판독립 원칙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 사법행정을 바꿔야 합니다. 누군가는 사법행정을 하기는 해야 하잖아요? 판사 인사도 내고 예산도 배정하고. 자, 법원행정처 방식으로는 안 된다, 그러면 사법행정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해야 잘할 것인가, 이게 핵심입니다.

사법행정을 잘하는 게 뭔가요?

사법행정은 먼저 재판독립을 보장해야 합니다. 동시에, 행정의 일반적인 목표인 투명성, 신뢰, 국민 편익 증진 등을 만족시켜야겠지요. 일단 판사들은 둘 다 못해요. 판사가 행정을 하면 재판에 개입하는 건 쉬워지는 반면, 투명성이나 대국민 서비스는 최대한 낮추려 듭니다.

판사가 아니면 누가 어떻게 하죠?

사법 선진국들은 거의 대부분 사법행정위원회 모델입니다. 다양한 영역의 대표자들이 사법행정위원회에 들어와서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도록 하죠. 사법행정위원회를 만들 때 중요한 게, 판사가 절반보다 적어야 합니다. 그리고 국회 추천 몫이 들어와야 해요. 국회는 경쟁하는 정치세력들의 총합이에요. ‘국회의 이해관계’라는 식으로 한 덩어리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판사들이 이걸 자꾸 오해하고 국회를 한 덩어리로 생각해요.

ⓒ연합뉴스윤석열 신임 검찰총장이 7월25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 도착해 건물로 들어서고 있다.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라고 헌법이 정하는데, 사법행정위원회에는 법관 아닌 사람이 들어오니 위헌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사법행정은 행정이에요. 사법권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 논리면 사법입법도 사법권에 속해서 법원조직법을 사법부가 만들어야 할 텐데, 국회가 만들잖아요. 당연하죠, 사법입법은 입법이니까.

이 결정적 대목에서, 이탄희는 ‘이단’이 된다. 사법행정을 대법원장 일인 지배체제에서 위원회 체제로 바꾸자는 아이디어는 법원에서도 제법 폭넓게 지지받는다. 이것은 대법원장에서 법관위원회로의 권한 이양이다. 하지만 사법행정위원회의 판사를 절반 이하로 낮추고 국회 추천 위원을 다수 집어넣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다. 이것은 법원 내부에서 외부로의 권한 이양이다. 많은 판사들은 사법행정에 국회가 개입하면 법원이 정치판이 될 것이라고 걱정한다.

이것은 사법행정위원회에 누가 얼마나 들어갈지를 조율하는 기술적인 문제를 넘어선다. 여기서 드러나는 차이는 대체 재판독립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 질문에 맞닿아 있다. 사법행정위원회에 선출 권력이 들어가면 재판독립은 침해되는가, 그 반대인가? 헌법은 법관과 재판의 독립을 명시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법관과 재판의 독립인가? 지난해 2월, 서울고등법원 정형식 부장판사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집행유예로 풀어줬다. 이 판결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이때 법관의 독립은 침해되었는가? 이단 이탄희의 논리를 좀 더 따라가 보면 힌트가 있다.

사법행정은 판사 승진도 결정하고 근무지도 정합니다. 그런 권한을 정치권에 주면 인사권으로 재판독립을 흔들수 있지 않을까요?

자, 여기 재판이 있고, 사법행정이 있고, 선출 권력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사법행정과 선출 권력 사이에 방어막을 치겠다는 거였지요(〈그림 1〉). 우리가 다 봤잖아요, 이거 안 되잖아요. 사법행정과 선출 권력은 서로 아쉬운 게 있으니까 거래를 트죠. 그러면 재판까지 쭉 뚫려요. 그게 사법농단 사태입니다. 이걸 바꿔야 합니다. 방어막을 재판과 사법행정 사이로 옮겨서 쳐야 합니다(〈그림 2〉). 선출 권력이 사법행정까지는 들어오고 재판까지는 못 오게 하자는 겁니다. 왜냐하면, 재판독립이란 사법행정으로부터의 독립도 포함하거든요. 이렇게 생각하면 사법행정위원회에 판사가 많으면 안 되는 이유가 분명합니다. 판사가 많으면 재판과 사법행정의 방어막이 다시 뚫려요. 국회 추천이 들어와야 하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사법부는 예산이든 법안이든 선출 권력의 민주적 정당성에 기대야만 돌아가거든요. 선출 권력과 관계가 필수라면 사법행정까지만 들어오게 하자는 겁니다. 목표는 재판독립이지, 사법행정 독립이 아니니까요.

재판과 사법행정 사이 방어막은 제대로 작동할까요?

법원행정처 모델보다 사법행정위원회 모델에서 재판과 사법행정의 분리가 더 수월합니다. 판사들이 자기 재판으로 거래를 한다고 쳐요. 법원행정처에서는 누구와 거래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보입니다. 사법행정위원회는 그게 어려워요. 동료 판사? 여당 추천? 야당 추천? 행정부 추천? 누구랑 말을 맞춰도 그게 사법행정위원회에서 통과된다는 보장이 없어요. 거꾸로 사법행정위원회 위원도 다른 위원 눈이 무서워서 판사에게 접근하기가 어렵죠. 법원행정처에서 재판에 개입할 때는 그런 위험을 생각하지 않았잖아요. 법원행정처는 한 몸이니까.

이제 법률가 이탄희가 이 주제에서 이단인 이유가 명확해졌다. 그는 사법권이 권력이라는 걸 명확히 인식하는 법률가다. 모든 권력은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구속받아야 하므로 사법권도 마찬가지라는 전제를 기본으로 깔고 문제를 다룬다. 드문 예외다.

특히 엘리트 판사들에게, 사법권이란 ‘법리’에서 연역되는 그 무엇이다. 이건 합리적 이치를 따르는 것이므로 권력작용일 수 없다. 그래서 판사는 권력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다. 판사에게 필요한 역량은 합리적 이치를 찾아내는 능력이다. ‘현자’다. 판사가 현자라는 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는 좋은 대학을 나왔고, 어려운 시험을 통과했으며, 사법연수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으니 법리를 다룰 자격을 입증했다. 이 현자의 법리에 따른 판단을 범인들로부터 보호하는 장치가 사법권 독립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집행유예 판결이 논란이 되자 정형식 판사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법리는 양보할 수 없는 명확한 영역이었고 고민할 사안이 아니었다”라고 말했다(이 판결은 올해 8월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된다). 이 ‘현자 판사 모델’은 엘리트 판사들을 넘어 일반 여론에서도 만만찮은 지지를 받는다.

이탄희는 11년 동안 엘리트 판사였다. 그의 세계에는 ‘현자 판사 모델’이 신기할 정도로 없다.

사법권 독립은 왜 중요합니까?

판사가 훌륭해서가 아니에요. 몽테스키외는 ‘왕의 표정을 살피는 판사’와 ‘군중의 함성에 귀 기울이는 판사’ 둘 다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왕의 심기에 따라, 군중의 분노에 따라 판결이 나면 그게 얼마나 가혹하고 들쭉날쭉하겠어요? 몽테스키외의 아이디어는, 사법권이 행정권에 종속되거나 대중의 열정에 종속되면 폐해가 굉장히 크니까, 양쪽에서 기능적으로 독립시켜서 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거죠. 상대적으로 덜 위험하다는 뜻이지 그게 완벽한 해법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권력은 위험한 물건이니까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는 원칙을 이탄희는 정확히 포착한다. ‘현자 판사 모델’에서 사법권은 현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의무이자 보상이다. 사법농단이란 어쩌다 적절하지 못한 판사가 그 자리에 가는 바람에 일어난 사고다. 거기에 제대로 된 현자를 앉히면 문제는 해결된다. 이탄희의 세계로 오면, 사법권은 권력이다. 판사가 현자인가가 아니라(“판사가 훌륭해서가 아니에요”) 권력을 다루는 규칙이 제대로 작동하는지가 중요하다. 여기서 사법농단이란 권력을 다루는 규칙이 고장 난, 시스템 설계 실패다. 이 차이가 그를 이단으로 만든다.

이 논리를 밀어붙이면 피할 수 없는 딜레마가 떠오른다. 사법권을 권력으로 인식한 이상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중요해진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는 재판독립의 원리와 정면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충돌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의 카를로 과르니에리 교수는 이 주제를 다룬 논문 ‘수평적 책임성의 도구로서 법원’을 썼다. 정치학자 과르니에리는 법률가 이탄희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사법부 독립이 사법부를 정치체제로부터 절연시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정치 집단들은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사법부에 압력을 넣을 유인이 있다. 정치를 없앨 수는 없으므로, 제도를 통해 정치적 압력을 흡수하는 것이 더 현명한 길이다. 이러면 정치적 영향력이 행사되는 통로가 더 잘 드러날 수 있고 따라서 더 잘 통제될 수 있으며, 결국 사법부의 권력도 견제할 수 있다. 남용을 막으려면 모든 권력은 견제되어야 한다. 사법부도 예외가 아니다.”

과르니에리는 중요한 힌트를 준다. 독립을 ‘간섭받지 않는 상태’로 정의하여서는 안 된다. “정치를 없앨 수는 없으므로” 그런 상태는 현실에서 달성할 수 없다. 오히려 사법부 독립이란 여러 영향력들이 공개되어 행사되고 서로 엇갈려, 특정한 하나의 영향력이 사법부를 틀어쥘 수 없는 상태다. 그러니까 독립이란 ‘지배받지 않는 상태’다. 견제와 균형이 더 촘촘하게 작동할수록, 사법부는 더 많은 간섭을 받는다. 그러나 특정한 하나의 영향력이 사법부를 지배할 위험은 크게 준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는 ‘간섭받지 않는 상태’와는 충돌한다. 하지만 ‘지배받지 않는 상태’와는 함께 갈 수 있다.

사법농단 사태 중에서도 최악의 사례로 꼽히는 강제징용 재판 과정에서 양승태 대법원장은 사실상 단 하나의 영향력,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되물리고 싶어 하는 박근혜 정부의 영향력에만 간섭받았다. 2015년 5월, 양승태 대법원장은 강제징용 소송에서 일본 기업을 대리한 김앤장의 한상호 변호사를 집무실에서 따로 만났다. 이 자리에서 양 대법원장은 “강제징용 사건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을 뒤집는 판결이다. 한·일 관계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재판을 맡게 될지 모를 법관이 재판의 한쪽 당사자에게만 내심을 내비쳤다. ‘최대한 간섭이 적은 상태’는 때로 ‘최대한 지배받는 상태’로 미끄러진다.

이제 ‘독립’의 의미가 뒤집힌다. 간섭을 없앨 수 없으므로, 간섭의 숫자를 늘리고 제도화하며 눈에 보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사법부가 ‘간섭받지만 지배받지 않는 상태’로 갈 때, 재판에 영향력을 끼치려는 시도는 서로 간섭하고 중화해서 상쇄된다. 그럴수록 사법부는 역설적으로 ‘독립’에 가까워진다. 그를 통해 가장 근본 가치인 재판독립을 보호한다. 이렇게 해서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재판독립의 원리와 함께 갈 가능성이 열린다. 물론 매우 좁고 위태롭고 미끄러지기 쉬운 길이다. 사법부를 정상화하는 것은, 이 좁고 위태롭고 미끄러운 길을 끊임없이 감당하는 시민과 법관을 가진다는 뜻이다. 이탄희는 우리가 이 길을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시사IN 이명익

재판독립과 견제와 균형이 같이 갈 수 있나요?

재판독립을 객관적인 잣대로 재는 게 중요하겠죠. 주관적으로 판사인 내가 독립적이라고 느끼는 수준을 기준으로 잡으면 안 돼요. 판사들은 특히 인정 욕구, 상승 욕구가 엄청나요. 예를 들어 그 욕구를 마음껏 추구해야 하는데 견제와 균형 장치가 그걸 막는다 쳐봐요. 판사는 그 장애만으로도 불안정해지거든요. 그 불안정 상태가 재판독립 침해예요? 그런 욕구까지 우리가 용납할 수는 없잖아요. 기준을 판사의 주관적 심리를 중심으로, 판사가 아무 불편을 안 느끼는 상태를 요구하는 게 재판독립은 아니에요. 누구도 나를 비평할 수 없는 상태를 요구하면 안 된다는 거죠. 그러면 견제와 균형이 있을 수 없죠.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재판독립 원리를 뒷받침하는 역설은 법원을 넘어서서 작동한다. 이탄희 변호사는 요즘 법무부 법무검찰개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다. 법원개혁에 돌파구가 안 보여서 검찰개혁으로 ‘우회’한 건 아니다. 그는 두 개혁이 한 덩어리라고 생각한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법원과 검찰 사이에서도 제대로 작동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게 엉뚱하게 꼬여 있다. 그걸 복원해야 재판독립을 보호할 수 있다.

법원개혁과 검찰개혁은 왜 함께 가야 합니까?

양쪽의 개혁 저항세력이 적대적 공생관계가 될 수 있어요. 군사독재 시절 남북한 정권은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면서 독재체제를 정당화했잖아요. 마찬가지예요. 검찰이 군대처럼 단일조직으로 작동하면 법원에서도 그걸 핑계로 힘을 모아 단일조직으로 방어해야 한다는 논리가 올라오거든요. 형사소송법을 법무부가 검찰이 수사하기 편한 방향으로 개정하려 한다, 그러니까 법원이 국회를 설득해서 그걸 막아야 인권을 지킬 수 있다, 그러려면 국회의원한테 잘 보여야 한다, 국회의원 선거법 사건도 알아봐줘야 한다, 법원행정처 같은 단일조직이 필요하다…. 이렇게 제자리로 돌아오죠. 재판독립은 또 무너집니다. 양쪽을 동시에 개혁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개혁 과제가 너무 복잡해지면 실패하기 쉬울 텐데요.

결국 제일 중요한 열쇠는 국회가 갖고 있어요. 판사 탄핵은 국회 권한입니다. 사법행정위원회도 법원조직법을 바꾸는 문제라 국회 몫이죠. 사법개혁 문제가 국회의원들한테 인기가 없어요. 당장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으니까 정치적 자원을 쓰려 하지 않아요. 검찰개혁하고 또 다르죠. 주권자들이 국회를 압박해줘야 합니다. 사법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은 많이 알려졌으니까, 열쇠를 국회가 쥐고 있고, 국회가 움직여야 사법개혁이 굴러간다는 인식이 더 퍼져야 합니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는 사람과 제도의 결합으로 작동한다. 판사 이탄희는 제도가 미비한 상태에서도 사람 한 명이 어떻게 견제자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이제 변호사 이탄희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제도화하는 것으로 일이 완성되는걸 보고 싶다.

지치지는 않습니까?

제가 사실 아직도 엘리트 문화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해요. 나는 내 자긍심만으로, 내가 좋은 판사면 됐다고 만족하고 살지는 못하는 사람이었던 거죠. 나의 내적인 명예가 외부적으로, 사회적으로도 정당하고 올바르다고 평가받고픈 욕심이 있었어요. 그러려면 진상규명이 확실히 되어야 하고, 잘못을 한 판사가 처벌받는 걸 보아야 하고, 사법농단이 재발되지 않도록 제도가 바뀌는 걸 보아야 한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그게 제 내적 명예와 외적 인정욕이 만나는 지점이었죠. 판사는 인정욕이 엄청나다니까(웃음). 아내한테 가끔 하는 얘긴데, 사람도 휴대폰 배터리 같아요. 충전율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웃음). 제 활동 영역이 넓어질수록 답답한 게 더 많아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좋은 동료들을 만나면 또 힘이 나고. 그래도 세상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기자명 천관율·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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