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멘트 범벅 된 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른 아침 갈아입을 작업복과 안전화가 담긴 큰 가방을 둘러메고 나갔던 아버지가 병원 응급실로 퇴근했다. 갓 스무 살을 넘긴 유일한 보호자에게 병원은 중환자실 입원비를 감당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연대보증인을 세우라고 했다. 담당자는 쉽게 ‘친척’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있으나 쓸모없는 관계였다. 이름과 전화번호를 빌려준 이는 아버지의 동료인 일용직 노동자였다. 만에 하나 병원비를 못 갚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던 그는 자신의 질문이 못마땅한 듯 대답을 듣지 않고 빠르게 원무과로 앞질러 갔다.
아버지는 병실에 누워 있는 환자들 중 가장 까맸다. 간병인은 아버지의 이름표를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나이가 잘못 써 있다고 확신했다. 아버지의 이름 옆에는 ‘49세’라고 적혀 있었다. 고칠 필요 없는 아버지의 나이였다. 가난은 언제나 시간을 초과했다. 조로한 겉모습은 서류에 쓸 수도 없었다. 아버지의 ‘젊은’ 나이는 각종 지원제도를 비껴갔다. 긴급복지 지원도 기초생활 수급자 신청도 알아봤지만 증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가난이었다.
그렇게 살아 돌아온 아버지는 오래 일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당신 인생에서 처음으로 넘치는 시간을 갑자기 갖게 됐지만 그 시간을 다룰 줄 몰랐다. 다 마신 막걸리 병을 찌그러뜨리는 일로 일상을 보냈다. 코는 벌겋고 눈빛은 바랬다. 일을 할 수 없게 된 아버지의 몸은 전쟁터로 변했다. 폭탄 터지듯 몸과 정신 이곳저곳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급성 심근경색과 환각과 당뇨와 원인 불명의 치매가 연이어 찾아왔다. 모두 서류상 유일한 가족인 아들 조기현씨(28)가 감당해야 할 일이 됐다. 1961년생 아버지를 부양하게 된 1992년생 조씨의 20대는 ‘돌봄’이라는 두 글자에 붙들렸다. 돌봄과 위기는 동의어였다.
돈과 일과 질병과 돌봄이 압도하는 날이면 토하는 심정으로 일기를 썼다. ‘청년’은 조씨를 설명하는 단어라기보다는 하나의 과제였다. 세상이 말하는 청년 ‘되기’가 어려웠다. 가난과 간병이 좁혀놓은 삶을 넓히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때마다 일찍 병들어버린 아버지가 짐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를 돌보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는 없을까. 홀로 겪어내고 있는 일을 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가늠해보고 싶었다. 일기는 어느 순간 돌봄에 대한 르포르타주가 됐다. ‘가난의 경로를 탐색하는 청년 보호자 9년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아빠의 아빠가 됐다〉는 그 결과물이다.
한 달이면 완성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책은 꼬박 11개월이 걸려서 책 꼴을 갖추었다. 청년수당을 받는 기간에 완성하고 싶었는데 진도가 더뎠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조심스러웠다. ‘불행 배틀’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긍긍했다. 돌봄 노동을 하는 사람은 여성이 대부분인데 ‘남성’인 자신이 역시 남성인 ‘아빠’를 돌본다는 것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빼앗는 건 아닐까 고민했다.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썼다.
부모는 조씨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이혼했다. 나눠줄 것 없는 가난한 부모는 자식에게 좀체 개입하는 법이 없었다. 대신 밤새 게임을 해도 끝나지 않는 싸움을 반복했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제 손으로 돈을 벌었다.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저 혼자만 챙기면 되는 ‘1인분의 삶’은 자유롭고 가뿐했다.
사람들은 가난이 뭔지 모른다
러시안룰렛이나 다름없는 삶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제법 운이 좋았다. 술과 담배를 밥 먹듯 달고 사는 아버지였지만 폭력을 쓰거나 도박을 즐기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한들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부모도 가난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받아들이고 말 것도 없었다. 중졸의 장정일(소설가)과 고졸의 류승완(영화감독)을 롤모델 삼아 쓰고 찍는 미래를 꿈꿨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영화 아카이빙 사이트를 살폈다. 세상은 그를 쉽게 ‘고졸 흙수저’로 요약했지만, 조씨는 그 호명을 언젠가는 배반하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늘 아래서도 열등감 대신 자긍심을 발견하려고 애썼다.
“사람들은 가난이 뭔지 몰라요. 안 보이고 안 들리니까요.” 공장에 다니면서 고만고만한 사정의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그게 무엇이든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계급의 울타리를 넘으려고 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자신의 고민과 주변의 문제를 해결해보기 위해 시민단체 활동가로 일하는 동안, 작은 월급을 쪼개고 또 쪼개 영화 공부를 하러 다니는 동안 조씨는 번번이 ‘무지의 벽’을 만나야 했다. 자유·권리·정치·사회·복지 같은 좋은 단어가 얼마나 쉽게 쓰이고 버려지는지를 경험했다.
서류로 증명하기 어려운 고통과 가난은 사연으로 대상화됐다. 존엄은 자주 시험받았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집안도 어려운 주제에 ‘얼어 죽을 예술한다’고 손가락질하지는 않을까 싶어 쪼그라들었다. 2016년 어렵게 기초생활 수급자가 됐다. “안 된다”라는 말만 반복하던 복지 담당 공무원에게 말을 칼처럼 휘두르고서야 가능했다. 통장에 찍힌 약 90만원이 너무 큰돈이라 믿기지 않아 보고 또 봤다.
“제 상황을 주변에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할 때 막막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미워질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어쩌면 사람들이 가난과 돌봄의 ‘정체’를 알 기회가 없어서 몰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워한 게 미안했어요. 미안해서 더 열심히 썼어요.” 개인적인 경험을 세상에 꺼내놓는 일은 낯선 타인에게 ‘곁’을 내어주는 일과 맞닿아 있었다. 나의 이야기가 당신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디딤돌이 되기를 바랐다. 가난과 돌봄이라는 보편적 문제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해결하면 좋을지 함께 상상해보자고 손 내미는 마음으로 썼다.
아버지에게는 아직 책을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 “아빠 욕 잔뜩 썼다”라고만 말했다. 주기야 하겠지만 아마 읽지는 않을 것 같다. 이제는 떨어져 산 기간이 더 긴 어머니는 여기저기 아들의 책을 다룬 기사가 나오자 불안을 감추지 않았다. ‘나서지 말라’는 말은 어머니가 평생을 익힌 삶의 지혜였다. “엄마가 가난해서 경험한 억울한 일들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썼다”라고 다독였다.
사람들은 어떻게 젊은이가 10년 가까이 아버지를 돌볼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지만 조씨는 피할 수 있었으면 피했을 거라고 고백한다. 늘어나는 병원비 앞에서 장례 절차를 검색하며 장례비를 걱정했다. 차라리 아버지가 죽어버렸으면 했다가, 어느 날은 죽이고도 싶었다가, 결국은 살리고 싶어서 발을 굴렀다. 그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조씨는 아버지가 아직 아버지가 아니었던 시절을 자주 상상했다. 그러자 죽었다면 증오로 끝났을 관계가 새롭게 시작됐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사람, 그래서 조금만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면 기가 죽는 사람, 하지만 용감해서 형제 중 가장 먼저 서울에 올라와 형제들이 정착할 돈과 기술 배울 돈을 마련해줬던 사람, 미장 기술을 익혀 노동 현장에서만은 손이 빨라 인정받았던 사람…. “지금 상황이 정말 아빠만의 책임일까 하는 질문이 제 마음에 계속 고여 있었어요. 아버지가 죽지 않아서 제가 성숙해질 수 있었죠.”
“나는 효자가 아니라 시민이다”
아버지에게 병원 밖을 나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아버지의 답은 별것 없었다. “움직이고, 사람들 만나고, 혈액순환 잘되게 술도 한잔하고, 배부르게 고기 먹고, 일하면서 살고 싶지.” 돌봄이 개별화된 한국 사회에서 치매 아버지는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조씨에게 무능한 부모를 원망하고 세상을 향한 증오로 가득한 불행한 젊은이의 모습을 보려 했다. 누군가는 조씨를 효자라고 추켜세웠다.
하지만 그중 어느 곳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다. 조씨는 왜 아버지를 돌보는가 라는 질문을 끌어안고 오랜 시간 고민했다. 자신이 ‘시민’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돌봄이 단순히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약자를 어떻게 돌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라고 봤어요. 아버지가 사회적이고 신체적 약자이기 때문에 돌본다고 생각해야 이 시간이 무의미하지 않겠더라고요. ‘나는 효자가 아니라 시민이다’라는 말은 일종의 선언인데, 제가 정말 그렇게 느꼈다기보다는 제 정체성을 그렇게 정립한 거예요.”
지난해 겨울, 조씨는 자신의 ‘밥’이 되었던 아버지의 미장 기술을 영상으로 남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버지가 조만간 한평생 지녀온 기술을 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했다. 병문안 간 김에 “나랑 일 하나 하자”라고 기획안을 건넸다. 시멘트 1포, 모래 10㎏으로 벽돌 100개를 쌓는 ‘퍼포먼스’를 하루 꼬박 찍는 동안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즐거워했다. 아직 편집 중인 단편 다큐멘터리 제목은 〈1포, 10㎏, 100개의 생애〉로 지었다. 어디서든 상영 기회가 있기를 기대한다. 한국 사회를 지탱해온 ‘시멘트 경제’의 뒷면이야말로 바로 아버지의 삶이었다.
한 해 한 해 덮쳐오는 불안은 모르쇠로 버틴다. 마침 하반기에는 서울문화재단에서 월 70만원을 받고 영상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끝나는 대로 남대문에 가서 겨울 작업복을 살 계획이다. 하고 싶은 작업을 계속하려면 일용직 노동만 한 게 없었다. 그러던 차에 책이 세상에 나왔다. 조씨는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책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팔려서 수급자 탈락하면 좋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긴 하는데, 아무래도 그건 어렵겠죠?(웃음)” 제일 강연해보고 싶은 장소는 공공도서관이다. 돌봄을 이야기하기 가장 좋은 장소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자신에게도 항상 문을 열어준 ‘문턱 없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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