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일요일마다 글방을 연다. 글방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사람이 아니라 글을 평가하는 것이다. 글쓴이에 대해 함부로 추측하거나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글쓴이와 글 자체가 늘 뚜렷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듣는 사람 처지에서 더욱 그렇다. 좋은 반응이든 나쁜 반응이든 사람들은 자신과 관련한 평가에 예민하기 마련이다. 자기 차례가 되면 누구든 얼굴 근육이 조금씩 부자연스러워진다.

좋은 글이 나오면 쉽다. 마음껏 칭찬할 수 있으니까. 이때는 어떻게 하면 정확하게 알아줄지 궁리하며 말을 고른다. 때로는 별로인 글도 나온다. 정적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 생각한다. ‘어디까지 말해도 될까?’ ‘얼마만큼 솔직해도 될까?’ 각자 글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게 다르므로 어떤 말이 상대에게 가장 도움이 될지 곰곰이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게 눈치를 보다가 누군가 한 명이 입을 열면 시작된다.

합평회는 이러한 눈치 보기를 훈련하고 또 비판의 맷집을 기르는 시간이다. 나는 글방지기로서 글방을 운영할 뿐 내 글을 가져오지 않기에 비교적 안전한 위치에 있고 그 점이 민망하다. 그래도 나 역시 합평 시간 내내 긴장해 있는데, 발언 수위를 조절하면서도 정직한 피드백이 오가도록 대화의 장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글방이 끝나면 진이 빠진다. 어느 날은 침대에 나가떨어져 있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 이 정도는 피곤해야지. 다른 사람이 만든 무엇에 말을 얹으려면.’

아슬아슬한 눈치 보기가 없는 지적은 자칫 폭력적인 놀이가 되기 쉽다. 그걸 가장 많이 목격하는 곳이 바로 온라인 댓글난이다. 그곳의 말에는 눈치 보기와 상대에 대한 생각이 제거되어 있다. 상대의 생각이나 행동보다도 상대의 외모나 인간성 자체를 겨냥한다. 페미니스트 활동가로 지내면서 다양한 악성 댓글을 접했다. 이제는 대충 유형을 정리할 수도 있다.

‘유형 1’은 외모 품평이다. 여성을 향한 악성 댓글에 대다수를 차지하는 유형으로, 게시글 내용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외모만을 언급하며 기상천외한 비난의 말을 쏟아낸다. 이들은 그 여성이 무슨 일을 하고 어떤 말을 했는가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성적 대상으로 설정하고 그 값어치를 품평한다.

‘유형 2’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라’ 유다. 이들은 페미니스트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하면 ‘위안부 문제는요? 군 문제는요? 미혼모 문제는요?’ 하고 되묻는다. 이 밖에도 ‘페미니즘을 조종하는 배후 세력이 있다’거나, ‘내가 너보다 세상을 더 잘 안다’거나, ‘도대체 글을 읽었는지 모르겠네’라는 등의 유형이 있다.

악성 댓글의 표적이 되면 생기는 일

분한 것은 이렇게 남을 헐뜯으려고 작정한 말의 성공률이 꽤 높다는 점이다. 나 역시 악성 댓글의 표적이 되었을 때 모든 댓글을 읽었다. 내 이야기다 보니 새로고침을 누르며 계속 보게 되었다. 괜찮다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아니었다. 읽다 보니 내 마음속 어딘가가 조금씩 망가지는 기분이었다. 이들은 증오의 말을 퍼부으면서도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며 자신이 증오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 잔인한 놀이를 이제는 방관하지 말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고소하라’는 말을 손쉽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댓글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경찰에 신고하는 과정은 일상을 무너뜨리기 딱 좋으니까. 소신 있게 행동하니 멋지고 용감하다는 말도 쉽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운동’을 외주 주는 것이니까. 용기를 내는 것은 두렵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함께 싸울 방법을 모색하면 좋겠다. 신고하고, 비판하고, 삭제 요청을 하고 법적 대응을 돕자. 잘 보이는 곳에 응원의 말을 남기고 소리쳐 지지하자. 악은 선보다 늘 강하니까, 그 정도는 해야 간신히 닿을 수 있을지 모른다.

기자명 하미나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