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시사IN 윤무영, 사진 합성:시사IN 이정현

2년간 하루 24시간 육아를 하며 아이가 잘 때 글을 썼다. 그 시간에 잠을 자야지, 제정신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조남주 작가는 오히려 글을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방송작가 일을 하다가 의성어·의태어만 반복하는 생활을 하니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출산하고 다시 일을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시 출퇴근이 아니라 대안을 찾기 어려웠다. 경력단절 여성 취업센터에서 일을 찾아보기도 했다.

두 돌이 지난 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소설을 써서 공모전에 냈다. ‘워킹맘’의 고충은 미디어에서 종종 볼 수 있지만 일을 포기하고 ‘닫힌 문 앞에 서 있는’ 전업주부의 고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아 낙태가 가장 심했던 1980년대생 주인공을 떠올렸다. 여성 삶에 관한 통계를 찾았다. 평균적인 결혼과 출산 시기, 출산과 육아에 따른 경력단절 실태 등 지표를 통해 모습을 구체화했다. 보편적인 고민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보고서 형식의 소설에 담았다. 〈82년생 김지영〉 100만 부 기념 특별판에서 조 작가가 밝힌 소설의 탄생 과정이다.

조남주 작가는 2015년 12월 민음사에 소설을 투고했다. 등단한 뒤였고 이미 책을 출간한 상태였다. 한국문학을 담당하는 문학2팀의 서효인 편집자가 독자투고 메일함을 열었다. 파일명은 ‘820401김지영’. 아이가 둘인 서 편집자도 평소 명절증후군을 겪는다. 주인공 김지영이 추석 당일 자신의 어머니로 빙의해 시어머니에게 “아이고 사부인, 사실 우리 지영이 명절마다 몸살이에요” 하는 대목을 읽다가 ‘꽂혔다’.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들에게 말했다. “여기 기가 막힌 게 하나 있어.” 팀원 모두 읽고 작가를 만나 출간을 확정했다. 박혜진 책임편집자가 작가와 긴밀히 소통하며 마지막 부분을 보완했다.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10월에는 문단 내 성폭력을 고발하는 해시태그가 이어졌다. SNS를 중심으로 여성들이 각자의 ‘훼손당한 기억’을 쏟아냈다. 그런 가운데 10월14일 〈82년생 김지영〉이 출간됐다. ‘한 평범한 여자가 살면서 겪는 먼지 같은 차별의 실상을 샅샅이 그러모은 이 책은 젠더라는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그 면면을 차분하고 친절하게 보여주었다(은유 작가).’ ‘흔한 대졸자 경단녀의 전형을 묘사한 훌륭한 사회학적 보고서(장정일 작가)’이기도 했다.

2017년 여성의 날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책을 300권 구입해 주변에 전했고, 5월에는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문재인 대통령 부부에게 책을 선물했다. 서지현 검사가 성추행 피해 사실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이 작품을 언급했다.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영화가 개봉한 지난 10월 책은 다시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 지난 3년 김지영 열풍은 김지영 현상으로, 김지영 신드롬으로 바뀌었다. 일명 ‘82년생 김지영 법안’이 발의됐고 공공정책 홍보 포스터에도 ‘○○년생 누구를 위한 정책’ 같은 문구가 실렸다. 해외 독자들의 공감은 뜻밖이었다. 17개 국가와 출간 계약을 했고 한 군데는 계약을 앞두고 있다. 11월 현재 한국 130만 부, 일본 14만5000부, 중국 18만 부가 팔렸다.

 

ⓒ롯데 엔터테인먼트〈82년생 김지영〉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하자, 소설은 다시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 소설과 영화의 상호작용이 좋았다는 평을 받았다. 위는 영화의 한 장면.

조남주 작가는 중쇄 때 2쇄가 처음이라며 편집자들한테 떡을 돌렸다. 작품은 작가와 편집자의 품을 떠나 무럭무럭 자랐다. 어디에서 맞고 오기도 했다. 편집자들은 이제 책이 몇 쇄인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김지영의 편집자’로 소환된다. 최근에도 국내의 외국인 대학생들에게 책에 대한 소감을 묻고 그걸 영상으로 제작 중이다. 맥락이 사라지고 선정적인 부분만 캡처‘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깊다. 3년간 작품의 성장과, 그에 비례한 논란을 근거리에서 지켜본 박혜진·서효인 편집자를 만났다. 각각 문학평론가와 시인이기도 하다.

여전히 ‘김지영의 편집자’로 불린다. 지난 3년의 소회는?

서효인:이 책이 스스로 혹은 독자들에 의해서 여기까지 온 게 신기하고 기쁘고 무섭기도 하다. 이례적인 판매고를 올린 다음이라 어떤 스텝을 밟아야 하나 조심스럽기도 하다. 우리가 내는 책의 일관성에 대해 생각한다.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윤리적 척도를 마련하되, 문학의 자율성을 해치지 않는 방식이어야 할 것 같다.

박혜진:뭔가에 이끌린 것처럼, 내고 싶었고 사회에 필요한 책이라고 여겼다. 지난 3년은 이 작품의 문학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문학성과 사회현상이 별개의 지점에서 얘기됐는데 그 두 가지가 다르지 않다는 걸 이야기해온 과정이었다. 책을 내고 편집자로서 많은 걸 경험했고 자신감도 생겼다. 문학 책을 낸다는 것이 쓸모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굉장히 많은 변화가 잠재된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다.

듣고 보니 출간 초기, 문학적이지 않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박혜진:지금도 (문학이 아니라) 피해의 나열이라거나, 그런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팩폭(팩트 폭행)’이라는 평가가 있다. 팩트를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평가받을 수 있다. 보고서 형식을 취했는데 그 안에서 팩트가 사용됐기 때문에 문학적이지 않다고 봐야 하는가? 더 섬세하게 질문해야 한다. 작가가 2010년대 여성의 삶을 왜곡되지 않은 방식으로 전달하겠다는 주제의식 아래 그에 맞는 형식을 선택했다. 독자들의 반응도 형식의 가치를 이야기할 때 중요할 것 같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존중한다.

다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계기가 된 영화는 어떻게 봤나?

서효인:김지영이 세탁하고 설거지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고 책이 있던 자리가 육아용품으로 바뀌는 걸 보니 화면의 효과를 무시할 수 없더라. 보통은 영화의 상상력이 책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한 번쯤 극사실주의적 화면에 담길 필요가 있었고 그걸 영화적으로 잘 해내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남편 대현에 집중해서 봤다. 책에서는 없는 인물에 가까운데 영화에서는 비중이 높다. 남성도 볼 수 있게 하는 ‘순한 맛’의 측면도 있었던 것 같다. 역설적으로 남자들이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며 이상했던 부분이 있다. 대현이 “너 가끔 다른 사람이 돼”라고 얘기했을 때, 지영은 충격을 받지만 바로 “나 그럼 무얼 해야 돼?”라고 물으며 구체적인 삶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대현은 울면서 “나와 결혼해서 그런 줄 알고 힘들었다”라고 말하며 여전히 자의식 안에 있더라. 숨겨진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계속 자신을 현실 안에 넣어야 하는 여성과 자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 남성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 장면이었다.

박혜진:작가와 독자 반응을 영화 안에 접목시켜서 만든 것 같다. 영화에서 김지영이 작가가 된 것도 넓게 보면 조 작가의 이야기다. 너무 해피엔딩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런 세상을 보여주고 상상하는 게 중요하다. 책이 할 수 없는 지점을 영화는 상상했다. 그런 결말을 쓴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작가는 현실에서 이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멈췄지만, 책을 읽은 독자들이 보여준 반응이나 지난 3년간의 변화가 영화에서 보여준 결말의 원동력이 된 것 같다. 소설과 영화의 상호작용이 좋았다.

서효인:장모님이 딸 둘에 막내인 아들 하나를 뒀는데 영화를 보며 ‘나는 아들만 편애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아내의 증언은 다르다. 내 어머니는 아내에게 ‘아직도 저런 시어머니가 있느냐’고 하더라.

박혜진:아무리 영화적 각색이 잘됐다고 해도 모두가 공감할 만한 얘기가 아닐 수 있다. 〈82년생 김지영〉은 정말 1980년대생 여성, 많은 걸 꿈꾸고 높이 올라갈 수 있을 거 같았던 여성이 출산과 육아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만나면서 더 이상 허들을 넘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느끼는 절망과 한계의 경험을 서술한 책이다.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은 다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처음 소설과 만난 순간에 대해 듣고 싶다.

서효인:2015년이었다. 추석을 보낸 뒤 명절이 없었으면 싶었다.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처럼 3대가 다 멀쩡하고 화목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집도 가면을 쓰고 모이긴 하는데 미칠 것 같다(웃음). 문학잡지 〈릿터〉 창간과 겹친 시기였고 추석 때문에 일을 못한다고 망발을 하던 시기를 지나고 있었는데 원고를 읽고 너무 꽂혔다. 파일을 모니터로 보고 있던 내 모습이 가끔 기억난다. 김지영이 친정 어머니로 빙의하는 장면은 처음으로 반한 부분이다. 현실의 삶에서도 명절 당일 오전 10시 이전에 처가로 출발하는 데 지대한 공을 미친 대목이다.

박혜진:투고했다는 건 요청받지 않은 글을 썼다는 의미다. 작가가 경력단절을 경험하고 소설가로 데뷔한 뒤 2015년부터 페미니즘 관련 자료를 축적하면서 기록했다. 계약된 건 아니지만 쓰고 싶다는 욕망으로 썼다. 그 무렵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가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에서 나왔는데 분량과 경향이 닿아 있어 가장 먼저 투고했다고 들었다.

출간을 결심한 계기는? 당시 판매 목표가 8000부라고 들었다.

박혜진:여성 차별을 이야기하는 작품은 많지만 경력단절 여성 이야기는 새로웠다. 그걸 전달하는 방식도 구체적이었다. 사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게 쌓였을 때 공적인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걸 소설이 보여주었다. 에피소드가 정교했다. 몰카, 출산의 위험 등 문제의식은 갖고 있지만 잘 발화되지 않던 소재다. 읽고 나면 그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책이다. 내 삶의 이력을 이전과 다르게 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형식이 새롭거나 작품을 읽은 사람들이 삶에서 위로받고 성찰할 수 있다면 책을 낸다. 8000부는 상징적인 숫자다.

박 편집자가 제목을 제안했다던데?

박혜진:호기심이 들 만한 제목을 구상했는데 당시엔 무반응이었다. 동료들도 표지에 앉히니까 ‘생각보다 괜찮네’ 정도의 반응이었다. 1980년대 여성들만이 느끼는 좌절감을 제목에 담았다. 나아진 환경을 경험했다고 하지만 그래서 더 깊은 절망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 〈82년생 김지영〉이라고 하면 성별, 세대가 드러나고 이들의 경험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사회적 의제가 표출될 것 같았다. 이 책이 많이 읽히면서 김지영이라는 이름이 의도치 않게 조롱의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언론에서 ‘김지영 세대’라는 말을 쓰는데, 김지영 안에 피해자이거나 한계에 봉착해 좌절한 인물만이 아니라 변화를 만들어낸 주체의 의미까지 포함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서효인 편집자에 따르면 남성들의 반응은 책이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기 전과 후로 나뉜다.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은 있었지만 초창기 남성 독자의 반응은 대체로 좋은 편이었다. 여성의 보편적인 삶을 구현한 이 책이 어느 순간부터 ‘페미니즘 감별’의 도구가 되었다. 가는 자리마다 논란이 따라붙었다. 2018년 3월 아이돌 그룹 레드벨벳의 아이린이 요즘 읽고 있는 책으로 〈82년생 김지영〉을 언급했을 때가 분기점이었다. 일부 남성 팬들이 인터넷 게시판에 아이린의 사진을 불태우는 ‘인증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반발하듯 판매는 더욱 늘었다. 수영, 서지혜 등이 독서 인증을 할 때도 비난이 따라붙었다. 방탄소년단 멤버 RM 등 남성 아이돌이 언급했을 때와는 달랐다. 영화에서 김지영 역을 맡은 정유미 배우의 인스타그램에도 악성 댓글이 달렸고 영화는 개봉 전부터 평점 테러를 당했다. 개봉 이후 영화를 계기로 연인과 이별했다는 후기가 심심찮게 올라오기도 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아이린이 〈82년생 김지영〉을 언급하자 일부 남성 팬이 아이린의 사진을 불태우며 이를 ‘인증’했다.

논란을 지켜보며 마음이 복잡했을 것 같다.

박혜진:정말 많은 이슈가 있었고 다 예상하지 못했다. 서지현 검사가 자신의 경험을 폭로할 때 이 책을 이야기할 거라고도, 한 당의 원내대표(노회찬)가 대통령 부부에게 책을 선물하거나 국회의원이 300권을 사는 것 모두 예상치 못했다. 여러 반응마다 일희일비하지 않았던 건 작품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책을 읽어보면 갈등이나 논란의 지점을 강하게 갖고 있는 작품은 아니다. 작가의 의도가 독자에게 잘 전달되는 작품이고 문제의식에 대한 공감이 검증되기도 했다. 여성 문제에 많은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언제든 건드리면 터질 수 있을 만큼 많은 갈등이 잠복해 있구나 하는 걸 느꼈다.

ⓒ노회찬의 ‘공감로그’2017년 8월, 〈82년생 김지영〉 저자인 조남주 작가와 노회찬 의원( 오른쪽)이 강의를 하는 모습.

서효인:댓글이나 SNS의 글을 보며 환멸을 느낄 때가 많았다. 특히 ‘82㎏ 김지영’ 같은 말은 혐오가 담긴 표현인데 포털사이트 팝업 광고 창에 ‘82㎏ OOO, 어떻게 30킬로그램 감량?’ 같은 문구가 쓰인다. 조롱하는 게 보인다. 책을 읽었다면 나올 수 없는 반응도 있고 그중 일부는 너무 수준이 낮다. 포털사이트는 자기가 만들어놓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없고 책임의식이 전혀 없더라. 그런 부분까지 포함해 좀 폭넓게 화가 났다.

박혜진:소설 초반, 초등학교 장면이 나오는데 자신을 괴롭히는 남자애를 두고 선생님이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깜짝 놀랐다. 경험하거나 인식하지 못했던 종류의 에피소드가 많았다. 나는 여중, 여고, 여대를 나오고 여성이 많은 출판사에서 일했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고, 아주 모르지는 않는다고 여겼는데 몰랐던 거다. 어디서부터가 차별인지 아닌지 본인도 알기가 힘들다. 이 작품은 에피소드를 통해 그게 왜 차별인지 메커니즘을 잘 전달한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읽어보라고 할 수 있는 게 가장 큰 미덕이다. 100만 부가 팔리고 외국 독자들이 책을 읽는 건 차별에 관해 선명하게 논증했기 때문이다.

김지영이 겪은 일이 특수한 일의 연속이라는 반응이 있다.

서효인:잘 모르는 것은 침묵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오늘 아침에 한 경험도 누군가에게는 평생 안 한 경험일 수 있다. 그런 공격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개연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얘기할 수는 있지만 너무 특수한 일의 연속이라는 말은 납득하기 어렵다. 개연성 없는 소설을 100만명이나 참고 읽어주지는 않는다.

박혜진:작품을 읽지 않아서일 수 있고 문학을 향유하는 방식이 익숙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삶을 고통만으로 구현하겠다는 게 아니다. 누군가 아프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했을 때 다른 이유를 배제하고 여성의 삶만 채택하고 편집해 보여주는 구성을 한 거다. 그 구성이 비현실적이라는 건 소설의 구조 자체를 외면한 비판이다.

작가가 ‘김지영을 방 안에 두고 온 기분’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결말 부분이 바뀌었다고 들었는데?

박혜진:화자인 의사 가족 에피소드가 추가됐다. 아내도 전문직 여성인데 아이가 아파서 일을 멈춘 상황이다. 사회적 지위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걸 드러내는 장면이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인식의 한계가 나타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안했다. 방 안에 두고 나온 것 같다는 건 경력단절 자체가 일·가정 모두 양립하지 못한 여성들의 이야기라서다. 그동안 둘 다 잘하는 여성들을 주로 조명했다. 슈퍼우먼 서사다. 김지영은 다 잘할 수 없거니와 다 잘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 안에서 고통받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다. 쉽사리 극복해버리면 현실에서 또 좌절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끝까지 자기 목소리로 얘기하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맘충’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목소리를 내고 글을 쓴다. 중요한 포인트다.

책이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박혜진:작품 안에서의 정치적 올바름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 이런 질문을 근 3년간 많이 던진 작품이다. 최근 문학상 수상작을 보면 대부분 여성 작가가 썼다. 우연인가, 경향인가 곰곰이 생각했다. 경향 같다. 무슨 경향이냐면 젠더 감수성을 포함한 윤리의식 자체가 첨단의 미학 중 하나가 된 것 같다. 많은 경우 여성 작가들이 그걸 더 갖고 있기 때문에 선정되는 거다. 윤리와 미학 논쟁의 진일보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고 사회적으로는 젠더 감수성을 변화시켰다. 불과 몇 년 전 작품만 보더라도 지금 기준으로는 용인되기 어려운 장면이 많다. ‘김지영’은 많은 사람들이 읽은 텍스트이기 때문에 거기에 분명 중요한 역할을 한 게 아닌가 싶다. 많이 판매된 만큼 비난도 많이 받고 그러면서 사회적인 기여도 한 것 같다.

서효인:이 책 이전에는 우리 사회가 경제적 측면에서 경력단절 여성을 주로 말한 것 같다. 여성이 일하면 경제가 이만큼 더 성장할 수 있는데 인력이 낭비되고 있다는 식이었다. 전업주부의 삶 자체가 어렵고 힘든 건 얘기되지 않았다. 워킹맘 이야기는 나와도 경력단절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일그러진 형태로(혐오가 담긴) 나왔다. 김지영은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아픔을 공론화했다.

박혜진:많은 여성들이 평소엔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하고 주저했던 일을 자기 검열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이 된 것 같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바로 그 형식 때문에 가능해진 변화다. 은유 작가가 말한 것처럼 ‘나만 유별난 것은 아니라는 집단적 안정감’을 마련했다.

해외 독자들도 〈82년생 김지영〉에 공감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중국, 타이 등 17개국의 수출이 확정됐고 이 중 8개 나라에서 출간됐다. 지난해 5월 타이완에서 출간될 당시 전자책 사이트 ‘리드무(Readmoo)’에서 1위에 올랐다. 2018년 12월, 일본어판이 현지에서 출간된 지 이틀 만에 매진됐다. 중국에서는 지난 9월 출간됐고 온라인 서점 ‘당당’의 신간 소설 분야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내년 출간을 앞두고 있다. 영국판 〈82년생 김지영〉은 대형 출판사 ‘사이먼 앤드 슈스터’에서 출간된다. 지난 6월 방한한 프랑스 닐 출판사의 클레르 도 세호 편집장은 “〈82년 김지영〉의 문제의식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닌 세계 보편적인 문제”라고 밝히기도 했다. 각국 번역자들은 ‘맘충’을 어떻게 자국의 언어로 표현할지 궁리했다.

올해 초 조남주 작가의 방일 현장은 어땠나?

박혜진:가기 전에는 반신반의했다. 문학 수출 면에서 한국어는 핸디캡일 수밖에 없는데 여성은 또 하나의 언어였다. 독자들이 작가의 말에 엄청나게 귀를 기울였다. 일본도 미투운동이나 여성차별이 보도되지 않은 건 아닌데 점화가 되지 않았다. 도쿄대학 의대 입시 차별 사건(2018년  도쿄대학 의대 등 10개 대학이 여성 수험생 점수를 일괄적으로 감점한 사실이 드러났다)이 사회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꺼지는 분위기였다. 한국에서는 큰 불길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중요한 모델이 된 것 같다. 한국 여성들에 대한 평가가 많았다. 이 소설이 100만 부까지 판매될 수 있도록 계속 읽고 이야기한 것 자체가 영감을 준 것 같다.

ⓒ민음사 제공조남주 작가가 11월16일 베이징 한국문화원에서 중국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중국은 비교적 여권이 신장된 사회라고 들었는데?

박혜진:상황이 나을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 중국에서도 차량 호출 서비스 디디를 이용한 여성 승객이 기사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그 뒤부터 저녁 8시 이후 여성의 합승 서비스를 금지했다. 우리도 여성에게 짧은 옷을 입지 말라고 하는데, 사고가 났을 때 피해자가 조심해야 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과연 옳은지를 두고 비슷한 논의가 나오는 것 같다.

서효인:일본뿐만 아니라 여권이 신장된 서구권과도 수출 계약을 맺은 게 큰 의미를 지닌다. 소설 속 에피소드가 특수한 상황의 나열이 아니라는 거다. 전 세계 문학 독자들이 공감하는 토대는 비슷한 것 같다. 그 나라의 여성 인권 수준이 어떻든 간에 가부장제의 내밀한 비밀을 폭로하는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해외 출판사로부터 정성스러운 편지를 받기도 했다고?

박혜진:작가가 해외 출판사를 결정한다. 판권 경쟁이 붙은 나라도 있었다. 우리는 해외 담당 편집자가 과거에 어떤 책을 출간했는지, 목소리를 잃어가는 여성의 이야기를 잘 편집해줄 만한 환경을 지닌 출판사인지 정보를 작가에게 제공한다. 닐 출판사(프랑스)는 1년에 열 권 정도 책을 내는데 주로 여성에 관한 책이다. 프랑스 대표 출판사 ‘로베르 라퐁’의 임프린트로 크진 않지만 정교하게 작품의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 곳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움베르토 에코와 파울루 코엘류의 전속 편집자가 세운 출판사와도 계약했다고 들었다.

박혜진:이탈리아판이 기대된다. 국가마다 표지나 띠지, 책 뒷면의 문구 등이 다 다르다. 일본어판이 표지를 잘 만들었다. 섬세하고 예술적이다. 여성의 황폐한 얼굴과 나무가 작품의 현재와 미래를 잘 구현했다. 같은 영어권이지만 미국은 일본어판 표지를 그대로 썼고, 영국판은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해석해 표지를 만들었다. 이런 차이가 재미있다.

미국에서도 미투운동이 있었다.

박혜진:올해 초 〈뉴욕 리뷰 오브 북스(The New York Review of Books)〉에서 ‘코리아 투(#Korea Too)’를 다뤘다. 조남주 작가의 인터뷰가 포함된 분석기사가 실렸다. 밀레니얼 세대의 여성은 자신들이 경험한 차별을 참지 않는 세대이고 그들이 일으킨 현상으로 한국 사례를 분석했다. 우리가 이 책을 낸 배경 중 하나가 미국 중심의 서구권에서 들어온 새로운 페미니즘이다. 한국에서도 중요한 이슈가 될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이 책이 미투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미국에 소개됐다. 김지영이 영미권에서 통하느냐는 물음이 무의미해졌다.

편집자 인생에서 이 책의 의미는? 가장 짜릿한 순간은 언제였나?

서효인:인센티브가 통장에 찍힐 때(웃음). 여성 작가가 쓰고 여성 편집자가 만들었고 여성 독자들의 운동으로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근거리에 있었지만 남성인 나로서는 그걸 바라보는 입장이 모호하고 미안한 부분도 있다. 혜진씨가 만들어서 잘되었고 천만다행이다. 옆에서 잘 관찰하고 생각했던 과정이 살아가며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박혜진:문학 편집자로서 작품을 판단할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되나 고민이 많았는데 이 책을 내고 반성을 많이 했다. 편집자는 답을 내는 게 아니라 질문을 발견해 세상에 내놓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답은 독자들이 한다. 외면받기도 하고 호응을 얻기도 한다. 계속해서 경계나 틀을 무너뜨리는 선택을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문학성은 내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경험이나 과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서 형성되기에 열린 태도를 갖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작가는 이 소설 이전과 이후, 어떻게 변화했나?

박혜진:장편이든 단편이든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건강한 길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사회적 책무를 강하게 느끼는 것도 예술가로서 좋은 건 아니다. 메시지를 던지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작품만 쓸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지식인인 동시에 재밌는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로서 균형감이 느껴진다. 우리 사회에 이런 작가가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다. 외국에 나가면 독자들이 작가의 사인을 받고 운다. 자신의 경험을 토로했을 때 연대하라고 이야기해주는 지식인이 있다는 건 큰 힘이다. 사람의 상처를 위무해주는 존재인 거다.

서효인:단단한 사람 같다.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으면 사람이 변하기 마련인데 그대로다. 그래서 계속 작품 활동이 가능한 것 같다. 내년에 소설집이 나온다. 한국문학에도 미친 영향이 많다. 패배주의, 회의주의가 팽배했는데 무명작가의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이만큼 사회적 영향력을 가졌다는 건 희망적이다. 한국 소설 전체에 대한 해외 출판사의 관심도 올라갔다. 문학성이 무엇이냐에 대한 본질적인 논쟁을 촉발시킨 것도 의미가 있다. 오랫동안 고정돼 있던 논의를 유연하게 했다.

박혜진:소설이 번역되고 국경을 넘어가면서 점점 확신하게 되는데 김지영은 새로운 형식의 참여소설 같다. 현실을 핍진하게 재현하고 묘사하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최대공약수, 공통의 경험을 추려서 스스로 현실의 경험을 얘기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현실을 변화시키는 작품이다.

서효인:광장 민주주의 시대의 리얼리즘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제2의 조남주 작가를 기다리나?

박혜진:제2의 작가는 없다. 작가는 다 유일한 세계다. 많이 팔리는 책을 기대하기보다 외연이 확장되는 책을 만들고 싶다. 비슷하지 않은 책을 선택하는 게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문학 출판의 의미도 거기에 있다. 새로움을 알아보지 못한 채 이건 소설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기성세대가 되지 않기 위해 두려움에 떨며 노력할 뿐이다. 꿈을 크게 꾸게 된 건 있다. 〈릿터〉도 해외에 판권이 팔리길 바란다.

서효인:열심히 하다 보면 우연처럼 필연이 온다. 출판의 신이 우리에게 손 내밀기를 기다릴 뿐이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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