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지 그림

얼마 전 직장 선배를 만났다. 11년 만이었다. 내가 로스쿨에 다니던 시절 그의 급작스러운 퇴사 소식을 듣고 놀랐다. 그는 나와 달리 대기업 회사 생활에 최적화한 인간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선배가 적어도 상무 승진 정도는 할 줄 알았다. 명문 사립대 ROTC 장교 출신인 선배는 상사들을 성실하게 따르며 후배들을 부드럽게 ‘갈굴’ 줄 아는 유능한 사원이었다. 말하자면, 성골 출신의 견실한 대기업 사원의 표본이었다고나 할까.

그런 그가 중도 퇴사와 동시에 머나먼 외국으로 이민까지 결심했다니 놀랄밖에. 우리가 차례로 그만두었던 그 회사는 높은 연봉과 고용 안정성 때문에 사원들의 중간 퇴사율이 극히 낮은 곳이어서, 그의 결심에는 더 큰 심리적 비용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근무했던 팀원들과 함께하는 저녁 모임에 나간 건, 그에게 꼭 해야 할 질문 때문이기도 했다. 술이 몇 잔 돌기도 전에 나는 섣불리 선배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변호사 자격증을 따겠다는 세속적이고 너무 빤한 나의 퇴사 이유와 달리, 그는 왜 ‘그 좋은’ 회사를 그만두었는지, 과연 한국에서는 찾지 못한 행복을 발견했는지.

선배가 건네준 명함에 그려진 그림

사례가 몇 안 되므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경험상 대기업 중간 퇴사자의 경우 최소한 경제적 면에서는 악화되는 사례가 더 많다. 자영업의 길을 걷게 된 이들은 회사에서 배운 특화된 지식과 기술로 성공하기보다, 다른 자영업자들과 비슷한 확률로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퇴사 후 자영업 창업, 폐업 후 재입사’의 무한 지옥에 빠지지 않으려면, 치사해도 사표를 가슴에만 품고 아침엔 출근하고 월말엔 임금을 받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좋은’ 대기업을 그만둔 자들은 대부분 실패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가? 여기서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나 역시 조금 안락한 자영업자의 위치에 서보니, 너무 어려운 자영업자의 진짜 현실을 자주 접한다(민사소송의 상당수는 돈 문제로 얽힌 많은 자영업자들이 시작한다). 대기업이 주는 소득과 복지를 박차고 나와, 사막 같은 자영업·프리랜서의 세계에서 꿈을 찾는다는 블로그 글들은 위험한 조언을 넘어 현실을 호도하는 것처럼 들린다.

퇴사 후 그 선배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지금 그는 서울에서 8000㎞ 떨어진 작은 도시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사장님으로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질문에 명확한 답변을 듣지 못한 채 술자리가 파하고, 나는 선배가 건네준 명함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 명함은 정말 한국에서 보기 힘든 예술적인 명함이었는데, 앞면엔 사장 이름 대신 멋진 가게 상호와 주소가 적혀 있을 뿐이고, 바탕엔 코스모스 수채화가 그려져 있었다. 명함 뒷면을 보곤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 선배가 직접 그린 레스토랑 벽화가 컬러사진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천사의 날개를 형상화한 벽화는 그리 특별할 게 없었지만, 이 벽화를 그리던 과정을 술자리에서 들었던 터라 그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느꼈을 어떤 안간힘이 보이는 듯했다.

선배는 결국 대기업의 좁은 사무실에서 훨훨 날아가 마음대로 벽화를 그리는 자유나마 얻었던 것 같다. 자기가 정한 규칙대로 일주일 중 반은 점심 장사만 하고 들판에 나가 산책을 하며, 일찍 귀가해서 아이들과 함께 오랫동안 숲을 바라본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으니 거래처 사장들과 싸우며 한평생을 보내라고 하는 건, 인생을 사무실에서 낭비하라는 말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성급했던 내 질문은 애초에 이렇게 바뀌어야 했다. 선배가 그곳에서 누리는 자유를 우리가 조금이라도 느껴보려면, 지금 여기에선 어떻게 살아야 할까?

기자명 양지훈 (변호사·〈회사 그만두는 법〉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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