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사카시 이쿠노구 쓰루하시 역에 내리면 미로 같은 코리아타운이 보인다. 그 한쪽에 국적을 불문하고 고령자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NPO 법인 ‘바다’가 있다. 바다의 전신은 옛 식민지 조선 출신 고령자들의 생활 지원을 목적으로 1997년에 만들어진 시민단체 ‘재일 코리안 고령자 복지를 추진하는 모임·오사카’다. 바다의 대표 송정지씨가 고령자 복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재일 조선인 상이군인 정상근씨와의 만남이었다.

제주도에서 태어난 정상근은 1942년 ‘천황의 적자’라는 미명 아래 일본 해군의 군속으로 마셜군도에 끌려가 비행장 건설 작업에 동원되었다. 이듬해 미군의 폭격으로 오른팔을 잃고 양쪽 고막을 다쳐 평생을 난청에 시달렸다. 일본 해군병원에서 고향 제주도로 돌아간 그를 이웃들은 친일파라고 손가락질해댔다. 일본 패전 후 그는 살 길을 찾아 오사카로 건너갔다. 같은 상이군인이라도 일본인은 1952년 제정된 ‘전상병자 전몰자 유족 원호법’에 따라 정부로부터 수백만 엔의 보상을 받았으나, 일본 국적을 상실한 조선인 군속은 배제되었다.

정상근은 보상도 받지 못했고 폐품 수집, 귀화 서류 대서(代書), 헌책방 일로 생계를 꾸리면서 국적 조항의 불합리성을 끈질기게 호소했다. 1991년 1월31일에는 오사카 지방법원에 원호법 장애연금 청구기각 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소식을 들은 재일 조선인 청년들이 ‘정상근씨의 전후보상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을 만들었고 이때 송정지가 사무국장을 맡았다.

오사카 지법에서 패소한 정상근은 말년에 온갖 병에 시달렸지만 복지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송정지는 차가운 헌책방에서 홀로 투병하는 정상근이 이용할 만한 복지제도가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일본의 여러 제도 가운데 복지 관련 제도에는 국적 조항이 없었다. 비과세 세대인 정상근도 의료·요양 지원 대상자였다. 하지만 1996년 2월 정상근은 오사카 고법의 첫 공판을 앞두고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NPO 법인 바다 송정지 제공‘바다’의 한 벽에는 시설 이용자들이 글을 배우면서 쓴 한글, 한자, 일어가 붙어 있다.

지원모임 회원들과 함께 정상근의 장례를 마친 송정지는 국적 조항이 없는데도 재일 조선인들이 이용하지 못하는 고령자 복지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시민단체를 만들었다. 앞서 언급한 ‘재일 코리안 고령자 복지를 추진하는 모임·오사카’다. 1982년 제정된 ‘노인보건법’의 개정으로 기초생활보호 대상자나 비과세 세대 고령자는 거주 지역에서 간병이나 데이케어(주간보호)를 비롯한 각종 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정작 가난한 외국인 고령자, 그중에서도 재일 조선인들은 언어의 벽, 차별의 벽 때문에 접근이 힘든 상황이었다.

재일 1세 대부분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까닭에 글을 배우지 못했다. 지자체나 정부에서 배포하는 간행물을 통해 관련 정보를 입수하는 것이 쉽지 않다. 행여 알게 되더라도 직접 담당 창구에 가서 일어로 써야 하는 신청 서류 작성이 힘들다. 데이케어 서비스를 하는 센터에 가도 먼저 이용 신청 서류를 작성해야 하고, 어렵사리 이용 신청을 하더라도 센터의 프로그램은 전부 ‘일본인’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고 제공되는 음식도 전부 일본식이라서 불편하다. 또한 비슷한 연령대의 일본인 이용자들은 옛 일본제국 시절부터 갖고 있던 조선인에 대한 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방문 돌봄 서비스도 마찬가지였다. 냉장고 안의 초고추장을 보고 끈적끈적한 것이 있다면서 혐오감을 드러내고 방문을 거부하는 일본인 도우미들이 있었다.

2000년부터 ‘복지 사업’에 본격 뛰어들어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송정지와 동료들은 재일 조선인 고령자를 위한 맞춤 서비스를 시작했다. 지금은 이런 외국인 고령자의 현실을 반영한 맞춤형 서비스를 하는 곳이 전국 각지에 생겨났다. 외국인 3만6000명이 거주하는 가와구치시의 한 NPO가 세운 외국인 고령자를 위한 요양시설에는 일본어를 잊어버리고 모어로만 대화가 가능한 고령자를 위해 한국어·중국어가 가능한 상주 스태프와 필리핀 출신을 위한 타갈로그어가 가능한 도우미까지 있다(〈마이니치 신문〉 2019년 3월2일).

2000년 4월부터 일본 정부는 65세 이상 고령자 요양 서비스를 전담하는 ‘개호보험’ 제도를 시행했다(1997년 법 제정). 일반 기업이나 시민단체들도 고령자 요양 서비스 제공의 주체로 참여하게 된 제도다. 송정지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복지 사업에 뛰어들었다. 현재 바다는 단기 보호와 방문요양 서비스 시설인 ‘여러 가지’, 데이케어 서비스를 하는 ‘우리집’, 노인성 질환 등으로 심신에 상당한 장애가 발생하여 도움이 필요한 이용자가 입소해 지내는 시설 ‘부모’와 ‘장수’를 운영하고 있다. 시설명은 전부 한글 발음의 히라가나 표기다. 총 98명 이용자 중에는 일본인도 있다. 고령자에게 주거시설을 임대하여 주거의 편의·생활지도·상담 및 안전관리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편의를 제공하는 ‘고향’도 운영한다.

ⓒNPO 법인 바다 송정지 제공‘바다’에서는 해마다 이용자들과 운영자들이 함께 김장을 한다.

2010년부터는 오사카시의 위탁을 받아 건강·의료·인권 등 여러 방면에서 고령자와 가족을 지원하는 ‘쓰루하시 지역포괄 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때부터 드러나지 않던 ‘재일 조선인 고령자’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인지증(認知症:2004년부터 일본 정부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치매’를 대신해 도입한 용어)’에 걸린 재일 조선인 고령자가 체류 기간에 갱신을 못해서 불법체류자가 되는 경우다. 센터에서는 자기 이름도 기억을 못하는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출입국관리국, 한국 영사관, 구청 등을 뛰어다녀야 한다. 이런 경우는 변호사의 도움을 빌리지 않아도 ‘그’의 생활 흔적을 추적해 체류 자격을 회복할 수 있다. 문제는 공식 기록이나 통계에 잡히지 않아 개별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경우이다.

송정지는 바다에서 운영하는 ‘고향’에 사는 P 씨를 위해 매년 출입국관리국에 가서 체류 자격을 갱신하고, 법무부와 공명당 국회의원에게 인도적 지원을 요청한다. 1942년 제주도에서 태어나 외할머니 집에서 자란 P 씨는 1960년께 일본으로 가는 밀항선을 탔다. 일본 패전 후 제주 4·3과 한국전쟁 통에 고향 제주도로 오지 못하고, 대신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는 부모와 살기 위해서였다. 1967년 P 씨는 한국으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길렀다. 하지만 남편과 주위로부터 아버지가 조총련계, 빨갱이라고 박대를 받다 이혼당했다. 실제로 그는 중앙정보부(중정)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부산에서 제주도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중정의 감시 탓에 제대로 된 사회생활이 불가능했다.

살길을 찾아 다시 일본으로 가기 위해 여권 발급 신청을 했지만, 한국 정부는 빨갱이의 자식이라며 발급을 거부했다. 1983년쯤 결국 두 번째 밀항을 했고 한 달 만에 발각되어 강제송환되었다. P 씨는 이듬해 다시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밀항했다. 3년이 못 되어 다시 출입국관리국에 발각된 그는 아버지의 도움 및 일본인 남성과의 결혼으로 겨우 일본에 남았다. 암에 걸리고 투병 중 이혼을 하게 되자 일본 정부는 그에게 퇴거 명령을 내렸다. 한국에 기댈 곳이 전혀 없는 그에게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죽으라는 소리였다. 그 후 그는 불법체류자가 되어 30여 년을 유령처럼 살았다.

2015년 오사카시에 전기도 가스도 수도도 끊긴 채 쓰러져 있는 P 씨에 관한 신고가 들어왔고, 바다에서 그를 담당하게 되었다. 송정지는 그와 함께 오사카 출입국관리국에 출석해 불법체류자임을 신고했다. 일본 정부는 강제출국을 명령했지만, 의사는 고령에 고혈압·대동맥폐쇄부전증에 걸린 그가 비행기로 이동할 경우 생명에 위험이 있다고 진단했다. 국민의료보험 미가입자인 P 씨는 모든 병원으로부터 치료·수술을 거부당했고, 요양시설 입소도 불가능해, 우선 ‘고향’에 거주하게 되었다.

불법체류자에게 체류 자격·보험증 얻어줘

송정지와 변호사의 노력으로 P 씨는 법무성으로부터 ‘특정 활동’이라는 체류 자격(비자)과 주민증, 보험증을 얻었다. 처음으로 본명으로 된 신분증명서를 갖게 되었다. 생활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후생성은 경제활동을 금지시킨 ‘특정 활동’ 자격 보유자를 생활보호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P 씨의 보험증이 말소되지 않도록, 매년 바다에서 1년 치 보험료를 지불한다. 송정지는 변호사와 함께 3년째 출입국관리국에 P 씨의 체류 자격 변경을 요청하고 있다. 아버지와 재혼한 여성이 자신과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만 한국의 호적을 정리해 P 씨는 아버지와의 가족관계 증명도 불가능하다. 일본 국적에서 특별 영주권자가 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고 증명하면 일반 영주권자가 될 가능성도 있는데, 안타까울 따름이다.

식민지 지배와 일본의 패전, 제주 4·3과 한국전쟁, 냉전과 분단은 일본과 한국 사이에 P 씨 같은 수많은 이산가족을 낳았다.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 조선인 중 1945년부터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전에 일본으로 밀항한 사람들이 10만명은 된다고 한다. 그중에는 훗날 정식으로 외국인 등록을 한 사람도 있지만, P 씨처럼 통계에 잡히는 않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들이 이제 고령자가 되었다.

일본 정부는 매년 고령자에 대한 수치를 발표하는데, 2018년 10월1일 현재 고령화 비율은 28.1%다. 일본 정부가 발표하는 고령자 인구통계에 외국인은 보이지 않는다. 개호보험 제도의 과제와 해결 방안도 ‘일본인’만을 위한 것이다. 정부는 매년 앞으로 더 심각해질 고령화 사회에 대비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내고, 서점에는 초고령화 사회의 현상과 해결 방안에 관한 책이 넘치지만, 그 속에 ‘외국인 고령자’는 없다.

기자명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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