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사람들이 붐비는 휴게소나 공원에서는 여성 화장실의 줄이 더 긴 경우를 볼 수 있다. 서울숲 화장실의 모습.

목이 말라도 물을 마시지 못했습니다. 화장실을 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는 동안 자신을 대신해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닭을 자르고 포장하는 라인의 속도가 느려지거나 멈추면, 일이 지연되는 시간만큼 손해가 생기는 현장이었습니다. 관리자들은 노동자들이 최대한 화장실에 가지 않게 하거나 가는 시간을 지연시키려 했습니다. 저임금을 받으며 더럽고 위험한 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 상당수는 노동비자가 없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였습니다. 혹시라도 관리자에게 밉보여 일자리를 잃을까 봐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들은 화장실을 가지 않기 위해 온갖 방법을 찾아야 했지요. 어떤 노동자는 기저귀를 차고 일하기도 했습니다. 2016년 ‘옥스팜 아메리카’가 발표한 보고서 〈휴식 없음: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닭 가공 노동자들〉에 담긴 현실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오늘날 한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18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에서는 병원 중환자실에서 일했던 21년 차 간호사가 참고인으로 나왔습니다. 그 간호사는 인력이 부족한 상황과 계속되는 장시간 노동 속에서는 도저히 화장실에 갈 짬이 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역시 어쩔 수 없이 환자들이 사용하는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일해야 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미국과 한국의 노동자들이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노동 3권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되묻게 합니다. 상시적 인력 부족과 관리직의 ‘갑질’이 계속되는 현실에서 화장실은 종종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백화점 화장품 판매 노동자 연구 결과  

2018년 저희 연구팀은 민주노총 서비스연맹과 함께 면세점과 백화점에서 일하는 화장품 판매직 노동자 2809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화려한 매장에서 값비싼 화장품을 파는 노동자들은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연구에 참여한 노동자 중 59.8%가 ‘지난 일주일 동안 필요할 때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한 적이 있다’라고 답했는데, 가장 흔한 이유는 매장 인력 부족과 더불어 화장실이 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회사가 판매직 노동자에게 각 층에 가까이 있는 ‘고객 화장실’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고객 화장실과 달리 ‘직원용 화장실’은 칸수도 적고 거리도 멀어 사용하기 힘들었습니다. 매장을 지킬 사람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했지요. 화장실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고 심각했습니다. 연구에 참여한 여성 노동자 중 39.9%가 ‘지난 6개월 동안 필요할 때 생리대 교체를 못한 적이 있다’고, 20.6%가 ‘지난 1년 동안 방광염으로 진단받거나 치료받은 적이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당뇨병 때문에 화장실에 자주 가야 했던 동료는 결국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했습니다. 고혈압을 앓고 있던 한 노동자는 의사를 만나 복용하는 약을 바꿔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염분과 수분을 소변으로 내보내 혈압을 조절하는 이뇨제를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화장실에 가는 시간을 늦추기 위해 물을 먹지 않는 일은 일상이었습니다. 고객을 응대하며 계속 말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요. 그러다 성대결절로 치료받는 노동자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쌀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To pee or not to pee, that is the question).” 1973년 어느 날 하버드 대학 로웰홀 앞으로 이러한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든 여성들이 모였습니다. 흑인 여성 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였던 플로린스 케네디가 건물 계단 위에서 짧은 연설을 마치자 그 자리에 있던 하버드 대학 여학생들이 손에 든 유리병 속 내용물을 계단에 쏟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소변처럼 보이는 노란색 물이었습니다. 훗날 ‘1973 하버드 소변 투쟁(The Harvard Pee-In of 1973)’이라고 불리게 된 이 사건은 한 여학생이 플로린스 케네디에게 전화를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로웰홀에서 하버드 입학시험을 치렀던 그 학생은 시험 중간에 화장실을 갈 수 없었습니다. 로웰홀에 여자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학교는 그들에게 길 건너편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그 화장실에 다녀오려면 15분가량 걸렸습니다. 제한된 시간에 시험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서 명백한 차별이었습니다. 남학생들은 아무 걱정 없이 건물 내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 관리자가 여성은 사용할 수 없다고 명시했던 화장실이었지요.

하버드 대학은 1636년 설립 이후 1945년 첫 여학생이 입학하기까지 300년 넘게 남학생들만이 공부할 수 있는 학교였습니다. 1902년 지어진 로웰홀에 여자 화장실이 없었던 것도 그동안 여학생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계단에 선 플로린스 케네디는 그것이 결코 변명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는 그동안 이 대학에서 비서나 직원으로 일해온 수많은 여성들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말이라고요. 그들도 방광을 가지고 태어났다고요. 그리고 또 묻습니다. 베트남 반전 시위에 참석했던 그토록 많은 남학생들은 왜 인간의 가장 기본적 권리인 여성 화장실에 대한 이번 시위에서는 보이지 않느냐고요.

오늘날 대학이나 공연장 같은 공공장소에 여성 화장실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여성 화장실을 어떤 규모로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복잡하고 지난했습니다.

ⓒ연합뉴스민주노총 서비스연맹이 4월22일 집회를 열고 고객 화장실 사용 제한으로 인해 판매 노동자들이 건강권을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초 미국과 유럽의 공공장소에 설치된 화장실은 모두 ‘실제로는’ 남성 전용이었습니다. 남녀 공용이라 해도 여성에 대한 아무런 배려가 없는 화장실을 여성들이 이용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당시 권력을 가진 남성들은 여성용 공중화장실이 과도하고 사치스러운 시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성용 공중화장실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권력자들은 공공장소에 여성 화장실이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존재 여부만으로 평등을 따진 셈입니다. 이후 남성 화장실보다 훨씬 더 작은 크기로 만들어진 여성 화장실에 대한 불만이 늘어나자, 남녀 화장실 면적을 동일하게 디자인하는 관행이 생겼습니다. 이는 남녀 신체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방법이었습니다. 면적이 동일할 때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변기 수가 남성 화장실에 비해 여성 화장실에 더 적었습니다. 동일하게 해야 할 것은 면적이 아니라 변기 수라는 주장이 나온 이유입니다.

이것도 충분치 않았습니다. 연구마다 측정값이 다르긴 하지만 기존 연구들은 일관되게 여성의 화장실 평균 이용 시간이 남성의 2배가 넘는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성과 달리 여성에게 화장실은 종종 생리대를 교체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몸과 경험의 차이를 감안해 남녀가 화장실을 평등하게 이용하고 있는지를 검토하려면, 그 평등을 측정하는 척도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했습니다.

오랜 시행착오를 거치며 화장실의 존재 여부, 면적, 변기 수를 따져 마침내 도달한 결론은 남성과 여성이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2006년 공중화장실법 개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수용인원이 1000명 넘는 건물이나 고속도로 휴게소에 있는 공중화장실 여성용 변기 수를 남성용보다 1.5배 이상 많이 설치하도록 바뀌었습니다.

바람직한 변화이지만 이 조치가 충분한지 역시 검토가 필요합니다. 아직까지도 사람들이 붐비는 휴게소나 공연장에는 어김없이 여성 화장실의 줄이 더 긴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공중화장실에 개정법이 적용되지도 않았습니다. 대표적으로 2013년 한국화장실협회가 전국 공중화장실 120개소를 선정해 조사한 결과를 보면, 남성용 변기 1개당 여성용 변기는 0.82개로 여전히 여성용 변기 수가 적었습니다.

이처럼 여성용 공중화장실이 생겨나고 여성의 몸과 경험을 감안하며 시설이 개선된 것은 중요한 진보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얼굴 없고 이름 없는 존재로 취급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성별 분리가 확고한 화장실은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성별을 검열하는 사회적 장치로 작동했습니다. 출생 시 법적 성별과 스스로 생각하는 성별이 다른 트랜스젠더였습니다.

저희 연구팀에서 2017년 진행한 설문조사에 응답한 트랜스젠더 256명 중 지난 5년 동안 화장실 이용을 제지당하거나, 관련해 모욕적인 발언을 들은 적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각각 26.2%, 27.0%였습니다. 화장실에서 물리적 폭력을 경험한 경우도 5.1%였지요. 이런 상황에서 많은 트랜스젠더가 시선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때로는 언어적·물리적 폭력을 피하기 위해 화장실 이용을 포기하곤 합니다(〈오롯한 당신〉 2018, 숨쉬는책공장).

ⓒ김승섭 제공미국 보스턴 파인아트뮤지엄의 여성 화장실 표시.
ⓒ김승섭 제공미국 보스턴 퍼터햄 공공도서관 화장실 표시.

미국에서 연구년을 보내는 동안 감탄한 장면 중 하나는 사회 곳곳에서 ‘우리는 트랜스젠더인 당신을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대표 사례가 화장실입니다. 연구자들이 모인 학회 장소나 하버드와 같은 대학 건물의 화장실뿐 아니라, 지역의 작은 도서관이나 커피숍 화장실에서도 그런 메시지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보스턴 남부 퍼터햄 공공도서관 화장실 표시를 보면,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표시가 없는 게 아쉽지만 자신의 성별 표현이나 성별 정체성과 무관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미국 4대 미술관 중 하나인 보스턴 파인아트뮤지엄의 여성 화장실 표시는 자신이 여성인지 여부는 본인 스스로 판단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위쪽 사진). 이 사진은 미국 사회가 트랜스젠더를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던 과거와 어떻게 단절하고자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화장실은 미국 내에서도 논쟁이 될 때가 있습니다. 보스턴 파인아트뮤지엄처럼 스스로 정체화하는 성별에 따라 화장실을 이용하도록 할 경우, 몇몇 여성들은 공중화장실에 ‘낯선’ 트랜스 여성이 들어올 수 있다는 점을 탐탁지 않게 여기기도 하니까요. 특히 한국처럼 여성이 화장실에서 폭행당하거나 살해되는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사회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여성에게 공중화장실은 불법 촬영이나 폭력을 걱정해야 하는 불안한 공간이니까요.

“오줌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권리”

그 불안 앞에서 조심스럽지만,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트랜스 여성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안전한 여성 화장실을 만들 수 있는가?’라고요. 폭력의 원인이 되는 대상과 질서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닌, 또 다른 소수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과연 정당하고 실효성이 있을지에 대해서요.

2016년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으로 사망한 여성을 추모하며 붙었던 포스트잇을 모은 책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2016, 나무연필)에는 다음과 같은 메모가 등장합니다. “오늘도 억지로 ‘남장’을 해서 살아남았다(당신을 기억하는 트랜스 ‘여성’이).”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 질문이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공통점을 묻는 것이라면, 인간은 배설하는 존재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살아있는 한 대변과 소변을 보지 않는 인간은 없으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장애학 연구자이자 인권변호사인 김원영씨는 미리 눌 수도, 조금씩 나눠 눌 수도 없기에 “모든 권리 가운데 ‘오줌권’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권리” 아니겠느냐고 되묻습니다(〈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2018, 사계절).

일하고 살아가는 장소에 나를 위한 화장실이 존재하지 않거나 설사 화장실이 있더라도 그걸 이용할 수 없다면, 그 공간은 나를 인간으로서 존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여기서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당신을 존엄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가학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이지요. 동시에 이러한 현실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수자들이 사회 곳곳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합리적인’ 근거가 되어, 그들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합니다. 오랜 기간 화장실의 부재는 일터와 대학과 국회를 비롯한 공공 영역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근거로 작동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배제의 논리는 트랜스젠더나 장애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화장실은 그 사회의 권력관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동시에 화장실에 새로운 질서와 원칙을 구현하는 것은 그 사회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인권을 다음으로 미룰 수 없는 것처럼, 여성과 트랜스젠더와 장애인과 그 밖의 수많은 다양한 소수자들이 화장실을 이용할 권리 역시 다음으로 미룰 수 없습니다. 그 누구의 ‘오줌권’도 소외되지 않는 화장실이 필요합니다.

기자명 김승섭(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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