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권 시절, 동학혁명을 무지렁이 백성들의 난동 정도로 해석되는 ‘동학난’이라 가르치고 배웠다. 그러다 대학 시절 통념을 깨는 역사철학 책을 접했다.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외교관이던 에드워드 핼릿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였다. 그의 다른 저서 〈러시아 혁명〉도 잊히지 않는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저자의 정의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역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으로든 자신의 시대적 위치를 반영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내가 배운 역사는 독재자들의 입지를 위해 역사를 은폐하고 조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승만부터 전두환 정권까지 당대의 권력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과거를 덮는 데 급급했다.
이 책의 테제는 크게 두 가지다. ‘역사는 진보한다’와 ‘역사는 과학이다’. 역사가들이 연구 과정에서 사용하는 가설과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가설의 지위는 유사성이 크다고 한다. 저자가 역사를 과학이라고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과학’과 ‘진보’는 근대의 전형적인 거대 담론이 되었다.
이 책을 읽고 한국 근현대사를 복원하는 ‘기록자’가 되고 싶었다. 나를 기자의 길로 이끄는 데 적잖은 영향을 끼친 셈이다. 카의 저서를 접한 지 30년이 지나 〈역사란 무엇인가〉 개정판을 다시 읽었다. 카의 사후에 출판된 제2판은 그가 직접 쓴 서문과 함께 후배 사학자 R. W. 데이비스의 관련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카는 개정판에서 “미래를 향한 진보의 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잃은 사회는 과거에 자신들이 이룩한 진보에도 무관심하게 될 것이다”라고 설파한다. 진정한 진보적 지식인이라면 서구 지식인 사회에 만연해 있는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경계하고 스스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뉴라이트 계열의 일제강점기 미화와 5·18 민주화운동 가해자들의 역사 왜곡 등에 맞서 역사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개정판을 만나 더없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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