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2년생 김지영’이 담아낸 평범한 진리
  • 임지영 기자
  • 호수 632
  • 승인 2019.11.01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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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원작이 지닌 가치를 지키면서 영화적 이야기’를 놓치지 않는다. 김도영 감독은 소설 속 에피소드에 좀 더 선명한 서사를 입혀 몰입과 공감대를 높였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김지영 역을 맡은 정유미 배우(아래)는 지난해 9월 캐스팅되면서부터 악성 댓글에 시달렸다.

이름은 시대의 가치를 반영한다. 1990년대 교실엔 ‘지영’이라는 이름이 많았다. 한 반에 둘이라 ‘큰 지영’ ‘작은 지영’으로 불렸고, 성까지 같을 땐 ‘김지영 A’ ‘김지영 B’로도 불렸다. 대체로 알 지(知) 혹은 지혜로울 지(智)자를 썼다. 지혜·지연·지은·은지 같은 이름도 있다. <82년생 김지영>을 쓴 소설가 조남주에 따르면 1960~1970년대에 태어난 여성의 이름엔 진(眞), 선(善), 미(美)가 많이 쓰였다. 1980년대 전후, 여자도 지성을 추구한다는 공감대가 생겼다. 부모는 더 이상 ‘좋은 남자 만나 시집가야 한다’는 말을 딸에게 하지 않았다.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 것 같진 않은데, 여전히 관습적으로 불합리한 상황을 겪는 간극’을 경험하는 세대가 등장했다. 밀리언셀러 <82년생 김지영>의 탄생 배경이다.

주인공 김지영은 이름처럼 전형적이고 평범했으나 지난 3년, 책의 운명은 비범했다. 2016년 10월 책이 출간됐다. 이듬해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에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책을 300권 구입해 주변에 선물했다고 밝힌 후 판매가 급격히 늘었다. 한국 사회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다. 그해 5월에는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에게 소설을 선물했다. 출간 7개월 만에 10만 부를 돌파했고, 신생 제작사 봄바람영화사가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람들은 캐스팅을 궁금해했다. 그사이 이 ‘전형적인’ 소설이 ‘페미니즘 감별’의 도구가 되었다.

‘미투’ 국면에선 서지현 검사가 이 작품을 언급했다. 2018년 9월 정유미 배우의 캐스팅 소식이 들렸고 그의 인스타그램에 악성 댓글이 달렸다. 설현, 아이린, 수영 등도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졸지에 누군가에게 ‘믿고 거르는 연예인’으로 낙인찍혔다. 최근 수지는 영화의 시사회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유재석과 노홍철, 방탄소년단 RM도 읽었다고 밝혔지만 오래 회자되지 않았다. 출간 2년 만에 100만 부를 돌파했고, 일본에서만 10만 부가 넘게 팔린 원작의 영화가 기대와 우려 속에 개봉했다.

첫 장편영화를 만든 김도영 감독은 <82년생 김지영>의 제작발표회에서 “원작이 지닌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새롭게 영화적 이야기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스럽고 부담되었다”라고 말했다. 르포르타주를 연상케 하는 소설이었다. 에피소드가 이어지지만 뚜렷한 서사가 없었다. 영화적으로 서사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궁리했다. 영화는 어려워 보이는 그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낸다. 원작의 부담을 털고, 118분 동안 소설 속 에피소드를 위화감 없이 엮었다. 원작이 통계나 뉴스 등의 각주를 통해 이 시대 전형적인 여성을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조망하는 데 충실했다면 영화는 좀 더 선명한 서사를 입혀 몰입과 공감대를 높였다.

영화 시작, 해질녘 노을을 바라보는 지영의 뒷모습이 불안하다. 아이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지영의 무표정도 어딘지 서늘하다. 가끔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다는 지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른 사람으로 빙의되고 남편 대현은 그런 아내를 걱정스럽게 지켜본다. 지영은 출산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는 ‘경력 단절’의 전업 주부다. 어떤 때는 행복하지만 벽에 갇힌 기분이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서두르는 법이 없다. 천천히 주인공을 클로즈업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김도영 감독(위)은 “이 영화는 자신의 말을 잃어버린 여자가 말을 찾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영화 속 가족의 캐릭터 ‘풍부’

정유미 배우는 시나리오로 먼저 작품을 접했다. 원작을 나중에 읽었고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 감정을 잡을 때 의지했다. 개봉하기도 전에 쏟아진 ‘별점 테러’나 악플에도 답했다. 10월14일 시사회에 참석한 그는 “그런 얘기가 오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반응이 나오는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하나밖에 없었다. 시나리오를 봤을 때의 느낌이 영화에서도 느껴져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원작에는 외모에 대한 묘사가 없다. 배우 출신인 감독은 평범함을 연기하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기에 걱정했지만, 배우를 보는 순간 걱정을 덜었다.

활자에 숨어 있던 대사가 시공간을 만나고 목소리를 내니 또 다른 긴장감이 생긴다. 가령 이런 장면. 엄청난 음식더미로 명절을 치르고 비로소 친정에 가려는 찰나, 시누이가 들이닥친다. 전을 데우라는 새로운 미션에, 시어머니가 선물한 앞치마를 벗은 지영이 자신을 빼고 모두 거실에 있는 시댁 식구들을 향해 말한다. “사부인, 저도 제 딸 보고 싶어요. 보내주셔야 보죠.” 자신의 엄마로 빙의된 순간이다. 극장 안 관객들이 일순간 긴장하는 지점이자, 처음 지영의 빙의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이다. 지영은 엄마로, 할머니로, 대학 선배로 분해 그들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원인은 확실치 않다. 다만 지영이 살아온 이력이 중간 중간 펼쳐진다.

그간의 삶은 역시 평범하다. 오빠들을 공부시키려고 공장에서 일한 지영의 엄마 미숙, 3남매 중 막내 손자만 싸고돌며 아들을 더 낳으라고 하던 할머니, 출장 갔다 아들의 만년필만 사온 아버지, 아기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고 말하는 상사 등 지영의 일상에서 웃음을 거세하는 건 거악이 아니라 이런 자질구레한 순간의 연속이다. 원작 속 한 구절이 생각난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가족의 캐릭터가 풍부해졌다. 공유 배우가 맡은 남편 대현의 비중도 높다. 가족은 사회적 관습에 복무하며 지영에게 무심코 상처를 주지만 든든한 조력자이기도 하다. 특히 졸업을 앞두고 딸에게 시집이나 가라는 아빠의 말에 밥숟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고 “나대! 막 나대! 알았지?”라고 외치는 지영의 엄마 미숙이 인상적이다. 감독은 “심지어 화목해 보이는 가족 안에서도 상처가 있을 수 있다. 개인의 캐릭터로 인한 상처보다 제도, 사회적 풍경을 짚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미운 인물이 없다. 관객은 지영뿐 아니라 남동생, 언니, 남편, 아버지 등 여러 캐릭터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게 된다. 각을 세우기보다 모두 아우르는 전략을 택했다.

감독은 이 영화가 ‘자신의 말을 잃어버린 여자가 말을 찾는 이야기’라고 했다.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함으로써 성장하는 영화다. 영화 초반 1500원짜리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도 팔자 좋다고 수군대는 직장인들을 피해 도망치듯 자리를 떴던 지영이 영화 말미 ‘맘충’이라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려고 애쓰느냐”라고 묻는다. 그마저 담담한 목소리다. 말을 찾는 순간이다. 처음처럼 노을을 바라보는 지영의 얼굴에 조금씩 생기가 돈다.

조남주 작가는 영화를 보고 ‘소설보다 더 나아간 영화’라는 평을 남겼다고 한다. 김도영 감독은 “2019년을 사는 김지영들에게 괜찮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지영이 어머니보다는 지영이가, 지영이보다 지영이 딸 아영이가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그리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지영은 이름에서부터 튀지 않는, 평범한 삶을 예비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 사실 평범한 삶이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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