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전화상담원 활동을 시작한 지 석 달이 넘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3시간 동안 작은 방에 앉아 전화를 기다린다. 얼마 전 전화를 건 여성은 고통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무엇을 해도 더 나아지지 않는다고, 나아진 자신의 모습이 전혀 궁금하지 않다고도 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저는 그렇지 않다고 믿겠습니다.” 어딘가에는 당신의 이야기를 믿고 당신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알고 당신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그것이 가족이나 친구들이 아닐지라도 분명히 있다고, 바로 여기에 있다고 곡진히 말했다. 그 말은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내 삶을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지만…

지난 3년간 신경정신과에 다녔다. 몇 주에 한 번씩 병원에 들러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로 인해 지금 마음이 어떻고 몸이 어떤지 이야기했다. 치료를 받은 지 2년이 꼬박 지나고 나서 의사는 내게 “요즘은 조금 괜찮아 보이네요”라고 말했다. 오랜 시간 나아지지 않는 자신에 대해 짜증이 치밀어 오를 때마다 한강의 소설 〈회복하는 인간〉의 한 부분을 떠올렸다. “이제야 살아나네요. 당신의 왼쪽 발목의 구멍 속에서, 회백색 조직 가운데 샤프심으로 찍은 것 같은 불그스름한 점 하나가 생긴 것을 보고 의사가 말하리라는 것을 당신은 모른다. …습윤 테이프 안에서 끝없이 하얀 진물이 흐르고, 일주일에 두 번 레이저 치료를 위해 열어보는 상처는 변함없이 샤프심으로 찍은 붉은 점 하나이리라는 것을 당신은 모른다. 한 달도 더 지나서야 그 붉은 점이 두 개가 되고, 두 달이 가까워졌을 때에야 굵은 연필로 찍은 점 정도로 커지리라는 것을 모른다.”

회복의 과정은 그렇게 더디고 착실하게 찾아온다. 이제 나는 일도 하고 책도 읽고 고양이 앞발도 만지며 가끔 행복하다. 초코송이가 맛있다고 생각하고, 친구들하고 싸우기도 한다. 최근에는 적금도 들었다. 여성과,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과 진심으로 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수많은 여성이 서로를 지켜주고 있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고립되어 고통받는 여성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삶을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 너무 힘든 날은 도움을 받는다. 절박하게 의사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말한다. 문제는 그렇게 그 절박함이 잦아들고 삶이 다시 살아지더라도 어떤 고통들은 나의 일부가 되어 떠나가지 않고, 나는 여전히 매일 밤 잠들기 전 다시는 눈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오늘 내 하루를 충실하게 보낸 이후에도 여전히 내일은 깨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니 어제는 치열하게 싸웠던 이가 오늘은 삶을 멈추기로 선택한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상반되는 행위가 아니라, 공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과연 본인의 선택이었을까, 세상이 그를 그렇게 내몬 것 아닌가 생각이 될지라도 결코 그 사람이 죽음으로써 세상의 악의에 졌다고 표현하고 싶지 않다. 당신이 최선을 다해 싸운 결과가 이것이라면, 그것을 충분히 애도한 후 다음으로 나아가고 싶다.

설리의 부고를 들은 다음 날은 온종일 걸었다. 콧잔등에 검댕이 묻은 회색 슈나우저도 봤고, 민들레 씨가 바람에 실려 지나가는 것도 보았다. 날이 차가웠다. 더 걸을 수 없어 나는 멈춰 섰다. 쓰다 남은 글을 생각했다. 석양을 등지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떠난 사람들은 결국 그 석양에 도착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간다. 언젠가 다시는 눈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원은 결국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죽더라도 결코 죽임당하지 말자고, 오늘도 삶과 고통이 공존하는 상태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는 나에게, 여성들에게 말하고 싶다.

기자명 박수현 (다큐멘터리 감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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