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에 대한 잔혹한 진실
  • 장정일 (소설가)
  • 호수 632
  • 승인 2019.11.01 15:3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지영 그림

2016년 영국 <옥스퍼드 사전>은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했다. 이 단어는 1992년 세르비아계 미국 희곡작가인 스티브 테쉬가 미국의 시사주간지 <네이션>에 쓴 글에 처음 등장했다. 테쉬는 걸프전쟁과 이란-콘트라 스캔들(미국 레이건 행정부는 레바논의 친이란 무장단체에 납치된 미국인을 구하기 위해 적대적 관계였던 이란에 무기를 팔고, 그 대금으로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다)에 대해 쓰면서 “우리들은 탈진실 세계에서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라고 꼬집었다. <옥스퍼드 사전> 관계자들에 따르면 “객관적 사실보다 개인적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더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환경”이 곧 탈진실의 세계다.

그동안 이 분야의 책이 간간이 출판되었지만, 자크 데리다의 <거짓말의 역사>(이숲), 베티나 슈탕네트의 <거짓말 읽는 법>(돌베개), 리 매킨타이어의 <포스트 트루스>(두리반), 로버트 기요사키의 <페이크>(민음인), 미치코 가쿠타니의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돌베개)는 모두 올해 출간되었다. 이 책들은 거짓말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진지한 화제라고 웅변하는 듯하다.

탈진실이라는 단어가 부상한 것은, 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와 미국 대통령 선거가 맞물리면서, 그때 나온 ‘가짜 뉴스(fake news)’의 막대한 파급력 탓이라고 한다. 하지만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를 쓴 미치코 가쿠타니는 그 기원을 좀 더 멀리서 찾는다. 지은이는 오늘날 탈진실이 무성하게 된 원인을 196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리버럴 계층의 반문화 운동과, 그보다 약간 뒤늦게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수입된 포스트모더니즘(혹은 해체주의) 사조에서 찾는다. 반문화 운동과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성의 전통과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려 했던 공통점이 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적인 실재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진리 개념을 관점 개념으로 대체하면서 주관성의 원칙을 신성시했다. 이런 주장은 어떤 사건을 이해하거나 기술하는 타당한 방식이 단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많다는 연관된 주장으로 이어졌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백인·남성· 가부장제가 만들어놓은 주류 담론을 거기에서 소외된 주변인과 소수자의 위치에서 의심하고 전복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런 전략과 각성은 사회와 문화계 전반에 바람직한 평등주의를 퍼트림과 동시에 허무주의와 상대주의도 널리 실어 날랐다. 학문에는 색깔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은 수십 년 동안 좌파들이 서구·백인·남성이 만들어놓은 거대 담론을 공격하기 위해 애용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역전됐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이 사회과학과 역사에 적용되자, 의도했든 아니든 온갖 종류의 철학적 함의가 생겨나 마침내 그것이 우리 문화에 홀연 스며들었다. 얄궂은 건, 우파 포퓰리즘이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를 전용(轉用)해 객관성에 대한 철학적 부인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옹호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 논의를 이용해 트럼프의 거짓말을 변명하고 싶어 하고, 우파는 진화론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기후변화의 현실을 부인하거나 대안 사실을 홍보하고 싶어 한다.”

이 책 전반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했던 미치코 가쿠타니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궁극적으로 허무주의를 함축하는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선포”했다고 선고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은이가 탈진실과 가짜 뉴스의 원인을 포스트모더니즘에 전가하고 있지는 않다. 탈진실의 최대 수혜자인 트럼프가 잘 보여주듯이, 탈진실이 현실이 된 데에는 백인 노동계층의 몰락이라는 정치·경제적 배경과 인터넷 매체의 발달이라는 문화·기술적 변화 요인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거짓말 읽는 법>베티나 슈탕네트 지음김희상 옮김돌베개 펴냄

‘탈진실’은 어떻게 현실이 되었나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 기간 중에 민주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과 그의 측근이 아동 성착취 조직과 관련되어 있다는 ‘피자게이트(Pizzagate)’와 ‘텍사스가 이슬람 이민에게 접수되고 있다’와 같은 가짜 뉴스를 무수하게 만들어 퍼트렸다. 이런 가짜 뉴스는 히틀러가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유태인을 독일 민족의 적으로 삼았던 원리와 같다. 트럼프는 문화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백인 우월주의자와 경제적 빈곤선을 넘나드는 백인 노동계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정치 엘리트·여성·이민자·이슬람교도들을 손가락질해 가리켰던 것이다. 트럼프 진영이 구사한 대안 현실에서는 “백인이 박해당하고, 다문화주의가 심각한 위협을 제기하며, 남성이 여성에게 억압당한다. 트럼프는 이런 공포감, 분노감에 불을 지펴 해결책 대신 희생양을 제공했다”.

탈진실과 가짜 뉴스는 인터넷 발달과 연동된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빼면 설명이 불가능하다. 인터넷이 탄생하기 전에는 뉴스를 제작하고 유통하는 것이 훈련되고 공신력 있는 언론인에게 맡겨졌으며, 뉴스 제작자(언론인)와 뉴스를 보고 토론하는 시민들이 공론장(公論場)을 형성했다. 하지만 인터넷과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의 발달은 누구나 뉴스를 발신할 수 있게 했고, 그런 만큼 기존 언론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과학기술이 선사한 새로운 매체는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하는 정보만 골라서 받아들이는 확증편향을 더욱 손쉽게 해주었고, 이 때문에 서로 대립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시민들 사이에 높은 장벽이 만들어졌다. 탈진실과 가짜 뉴스는 이 틈을 마음껏 이용한다.

칸트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베티나 슈탕네트는 거짓말에 대해 꾸준히 연구해온 특이한 철학자다. <거짓말 읽는 법>에서 그는 거짓말을 이렇게 정의한다. “거짓말은 누군가 절박한 의문을 품고 있을 때 그 답을 주는 것이어야 거짓말일 수 있다(①).”
이 정의가 참이라면, “사람은 절박한 나머지 속을 위험을 감수하는 바로 그런 이유로 속는다(②)”라는 정의도 틀리지 않다. 생각해보면, 지금껏 거짓말의 피해자가 동정을 받아온 이유는 ①과 ②의 조합에서 거짓말쟁이만 분리해서 추죄했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는 마치 나치와 나치를 지지했던 독일 시민을 완벽하게 분리할 수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 때문인지 지은이는 마지막으로 거짓말에 대한 잔혹한 진실 하나를 더 추가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져야 한다(③).” 예전 같으면 거짓말을 거르거나 의심하는 것이 정상인데, 탈진실 시대에는 자신의 감정과 신념을 강화해주는 것이라면 그것이 미심쩍더라도 괘의하지 않는다.
가짜 뉴스는 불안과 공포를 부추기고, 불안과 공포는 가짜 영웅에게 매달리게 만든다.

Magazine
최신호 보기 호수별 보기

탐사보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시사IN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