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걸그룹 래퍼에게 기대되는 이미지는 어느 정도 전형성이 있다. 공격적인 ‘센 언니’이거나 ‘앙칼진 목소리’ 같은 것이다. 그에 비해 우주소녀의 엑시는 굳이 말하자면 ‘청순’이 두드러지는 얼굴을 가졌다. 그렇다고 유약한 랩을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앞으로 뛰쳐나갈 필요가 없다는 듯, 부릅뜨지도 않는 그의 눈빛처럼 차라리 거만한 듯한 목소리다. 가사 전달은 확실하면서도 조금은 웅얼거리는 특유의 발음도 마치 사색하며 중얼거리는 듯한 독특한 느낌을 담는다.
무해한 걸그룹 세계에서 공격성이 허용되는 포지션이 래퍼라지만, 뒤로 한 발짝 물러서 상황을 내려다보는 자세의 ‘스왜그’는 다른 아이돌에게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청명한 음색을 기조로 간절하고 애타는 마음을 곧잘 표현하는 우주소녀의 무대에서 그의 래핑은 묘한 균형점을 만들어내곤 한다.
데뷔 전, 여성 래퍼 서바이벌 〈언프리티 랩스타 2〉에 출연해 “난 이제 지옥이라도 들어올려 줄게” 같은 라인을 선보였던 그다. 걸그룹 멤버들의 창작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우주소녀의 대다수 곡에 작사자로 참여해왔다. ‘걸그룹 랩’은 단순히 분위기를 조금 띄우는 역할에 그치기도 하는데, 그럴 때에도 엑시는 기능에 충실하다. 우주소녀 특유의 비장한 노래에서도 그는 빛난다. 치열하게 쏟아지는 비트 위에 멤버들이 사랑에 대한 절박한 확신을 노래할 때 그는 “세상의 대답에는 가치가 없다” 같은 묵직한 표현을 던져버린다(‘꿈꾸는 마음으로’). 그런가 하면 “해가 진 어두운 밤 보이지 않는 너의 그림자를 밟고 있어” 같은 서정적 은유도 구사한다(‘그때 우리’).
우주소녀는 데뷔 초부터 연속성 있는 서사와 ‘세계관’을 설정한 그룹이었다. 이런 전략은 주로 보이그룹에게 더 효과적이라고 여겨지며, 어느덧 이들은 평이한 팝송을 부르는 걸그룹이 되는 듯했다. 아쉬워한 팬도 많았다. 지지층이 서서히 견고해지면서 우주소녀에게 서사성은 다시 중요한 축이 될 수 있었다. 우주적 환상 세계 속에서 좀처럼 닿기 어려운 사랑과 애타는 마음이라는 테마였다.
그 과정에서 엑시의 기여도 작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자신의 라인을 직접 쓰는 래퍼로서 그가 반복해 사용하는 개인적 은유 덕이다. ‘바람’과 ‘바램’의 대구, ‘마지막 춤’, 이동 경로로서의 ‘달빛’ 등이다. 상업적으로 편안한 팝송과 일관된 서사라는 갈림길에서 그가 곳곳에 조금씩 심어둔 낱말은 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이어지는 느낌’을 주었다.
여전히 랩이나 개인기를 보여달라고 하면 쑥스러워하지만, 랩을 시작하면 확실하게 실력을 보여주는 엑시. 그는 ‘반전 래퍼’라고 불린다. 그는 걸그룹 래퍼의 세계에서도 반전이다. 또한 아이돌 멤버로서, 특히 걸그룹 멤버로서 콘텐츠에 기여하는 방식 또한 저평가되기 쉬운 환경을 생각하면 반전이라 부를 만하다.
원래 보컬 지망이었다가 성대결절을 겪은 뒤 래퍼로 전향했다는 그는 데뷔 이후에도 만만치 않은 고난을 겪으며 성장했다. 친근한 팬들에게 털털하고 시원한 유머를 내던지듯 구사하는 그의 차분한 얼굴 뒤에는, 어쩐지 더 많은 반전이 간직돼 세상과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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