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 그림

다문화 사회를 실감하려면 시골로 가야 한다. 내가 근무하는 강원도의 경우 매년 다문화 가구가 증가하고 있고, 2017년 현재 3897명의 학생이 등록되어 있다. 전체 학생의 2%, 초등학생만 따지면 3.4%나 되는 수치다. 나도 다문화가정 자녀들을 여럿 가르쳤다. 모두 어머니가 외국 출신이었다. 대부분 남편과 나이 차이가 열 살 이상 났고, 한국 출신 학부모에 비하면 어렸다. 이건 내가 강원도 벽지에 근무하기 때문에 경험하는 특수한 상황일 수도 있다.

다문화가정 아이들은 한국어만 썼다. 어머니가 중국, 필리핀 출신이라고 해서 이중 언어를 구사하지는 않았다. 다른 애들과 똑같이 영어 단어 퀴즈에 쩔쩔매고, 방과후 교실 중국어반에 등록했다. 외갓집이 해외에 있으니 수시로 인천공항을 드나들 것 같지만 2년에 한 번 가면 꽤 나가는 축에 속했다. 나는 이 아이들이 다문화가정 출신이라는 걸 잊고 지냈다. 그건 평온한 시절의 풍경이고, 외부에서 무슨 사건이 터지면 우리 안에 도사린 ‘집단 구별 짓기’의 본성을 발견하곤 했다.

일본인 다문화가정 학생 1만3000명

지난 7월 베트남 출신 아내를 무차별 폭행한 남편 기사가 쟁점이 되던 무렵이었다. 동정심의 발로였겠지만 아이들은 귀신같이 베트남 엄마를 둔 친구를 떠올렸다. 겉으로는 다 똑같은 한국 사람이라고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다문화가정 학생은 ‘우리’와 다른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다. 다문화가정은 더 여유 있는 우리가 도와줘야 하는 대상이었다. 베트남 출신이라 해도 각자 배경이 다를 텐데, 아이들은 특정 국가와 국민의 특성을 고정관념으로 묶어 판단했다. 사람 한 명 한 명을 배려하는 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지만, 고정관념에 따라 살면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동정심보다 더 위험한 감정은 혐오였다. 일본 다문화가정이 대표적이었다. 한국과 일본은 수많은 역사의 질곡으로 감정의 골이 깊다. 그 결과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주한 학부모와 자녀는 여러 어려움을 겪는다. ‘쪽바리’ ‘왜X’ 소리는 예사고, 일부 일본 정치인의 망발이 화제에 오르면 싸잡아 비난을 받는다. 한국인 모두가 시간을 안 지키거나 부동산 투기에 목숨을 걸지 않듯, 집단으로 묶어버리기는 숱한 오해와 폭력을 낳는다.

2018년 현재 일본인 다문화가정 학생은 1만3000명이 넘고 비율로 따지면 중국, 베트남에 이어 세 번째에 해당한다. “일본에게는 가위바위보도 져서 안 된다”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나라에서 일본 다문화가정 학생들은 일종의 죄책감을 안고 산다. 군국주의 시절로 돌아가려 하는 일본의 우경화 세력을 비판하고 거부할 수 있다, 아니 해야 한다. 그러나 특정 민족 전체를 악으로 규정하고 매도하는 건 곤란하다.

폭력은 그 속성상 약한 곳을 가장 먼저 건드린다. 혐오의 화살은 때로 힘 있고 멀리 있는 ‘일본 우경화 정치세력’에 꽂히지 않고 평범하고 가까이 있는 ‘일본 관련 한국인’에게 날아온다. 혐오는 쉽다. 일본처럼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경우, 혐오 행위에 대한 심리적 부담도 덜하다.

교육은 생각하는 인간, 편견과 차별에 저항하며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인간을 기르는 일이다. 어렵겠지만 일본 정부의 후안무치한 태도에 저항하는 가장 멋진 방법은 혐오가 아니라, 민주시민으로서의 윤리와 책임감을 갖춘 다음 세대를 기르는 것이다.

혐오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헤아려보고 다음 행동 결정하기, 비판할 때 비판하더라도 집단으로서 미워하지 않기. 요즘 구상 중인 수업 주제다. 제주도 예멘 난민, 중국의 사드 보복 등 타국·타민족과 엮인 갈등 상황은 지속해서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문화가정이 늘어나는 시골 학교 교사로서 무슨 사안이 나올 때마다 해당 국가 출신 학생이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왠지 예감이 좋지 않다. 기우이길 바란다.

기자명 이준수 (삼척시 도계초등학교 교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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