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윤 제공스리나가르 시내를 순찰하는 군인의 모습.

인도 북부 카슈미르 계곡은 아름다운 곳이다. 잠무카슈미르 주도 스리나가르의 명물인 하우스 보트(호수에 설치한 붙박이 배)의 뱃전에 앉아 저 멀리 보이는 피르판잘 산맥과 거대한 달 호수에 비친 희끗한 설산의 자태, 수면 위에서 앞다퉈 피워내는 연꽃과 수련, 소금쟁이처럼 수면을 스치며 지나가는 작은 배 시카라를 보고 있자면, 왜 무굴의 4대 황제였던 제항기르가 이곳에 빠져 있었는지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수많은 나라가 독립했다. 그중 몇 나라는 자의나 타의로 분단됐다. 타의로 분단된 나라가 한반도다.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북위 38도선을 기점으로 남북이 나눠졌다. 인도는 자의에 따라 힌두교도가 다수를 차지하는 인도와 무슬림이 다수를 이루는 파키스탄으로 나눠졌다. 협상의 대가들답게 독립도 분단도 협상을 통해 이뤄낸 성과였다.

남아시아에서 가장 격한 분쟁지역으로 손꼽히는 카슈미르는 해당 지역에서 다수를 점하는 종교에 따라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쪼개자던 계획이 덧니처럼 돌출된 지역이다. 왕은 힌두교도였지만 주민은 무슬림이 절대다수였다. 파키스탄 땅이 되어야 했지만 서로 한바탕 전쟁을 벌인 끝에 60%는 인도 땅, 40%는 파키스탄 땅이 되었다.

인도는 애써 얻은 카슈미르 지역에 중국이 홍콩에 부여한 일국양제 못지않은 특별한 혜택을 부여했다. 인도에서 유일하게 무슬림이 다수인 이 지역을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인도 대륙의 힌두교도들이 혹여 카슈미르로 몰려가 무슬림들을 소수자로 만들지 않을까 우려했다. 중국의 위구르 자치구나 티베트 자치구에서 벌어지는 이주자에 의한 인구 역전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조차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카슈미르를 둘러싸고 인도와 파키스탄은 무려 세 번이나 전쟁을 벌였고, 카슈미르는 카슈미르대로 1990년 이후 수회에 걸쳐 봉기를 일으켰다. 인도도 파키스탄도 싫으니 그냥 우리끼리 살게 해달라는 독립파가 카슈미르 반군의 다수를 이루고 있다.

지난 8월1일 카슈미르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극우 성향의 집권당인 인도국민당(BJP)이 내세운 지난 총선 공약이었다. 압승을 거둔 극우 여당은 공약을 착착 이행했다. 카슈미르에서 4인 이상의 집회는 당연히 금지됐고, 인터넷과 유선전화까지 차단됐다. 그리고 며칠 뒤 인도 하원은 인도 헌법 제370조의 폐기를 의결했다. 헌법 제370조는 인도 연방에서 카슈미르의 특별한 대우를 용인하는 조항이다. 인도는 헌법을 개정할 때 상·하원의 의결만 필요할 뿐 국민투표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계엄령 선포된 카슈미르에서 4000명 연행

카슈미르 계곡에 있는 도시 스리나가르의 지인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가 불가능하다는 음성만 보름째 이어졌다(〈시사IN〉 제585호 ‘스리나가르로 보내는 뒤늦은 안부’ 기사 참조). 애가 타들어갔다. 외신은 봉쇄된 카슈미르에서 무려 4000명이 연행되었다는 보도를 냈다. 카슈미르에서는 이렇게 사라지고 난 뒤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그렇게 남편과 자식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아내와 어머니의 절규가 이어지는 땅인데, 여기에 또 4000명이 더해졌다는 이야기다.

8월24일에야 통화가 이어졌다. 아들이 연행되었다는 친구 아내의 절규가 수화기 너머로 이어졌다. 난 해줄 말이 없었다. 2대에 걸친 이 집안의 수난을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 비극의 주도자인 나렌드라 모디 총리에게 ‘서울 평화상’이 수여됐다는 사실은 나를 더더욱 절망스럽게 한다.

기자명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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