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

이한아씨(23·가명)는 중국인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5)을 홀로 돌보는 탈북 여성이다. 탈북이 한국에 입국하는 것만을 의미한다면, 이씨는 애초 탈북할 생각이 아니었다. 이씨는 중국에서 일해 돈을 번 뒤 북한으로 되돌아갈 생각이었다.

이한아씨는 열여덟 살이던 2014년 국경을 넘었다. 이씨를 중국으로 데려온 브로커는 다른 사람에게 돈을 받고 이씨를 팔아넘겼다. 그나마 이씨는 남편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이씨는 ‘적어도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으니까, 나를 해치지는 않겠지’라는 추측만으로 자신보다 일곱 살 많은 남편을 택했다. 이듬해 이씨는 아들을 낳았다.

통일부 통계에 따르면 2019년 6월 기준으로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은 총 3만3022명이다. 이 중 72%에 달하는 2만3786명이 여성이다. 특히 2017년 이후부터는 전체 입국자의 80% 이상이 여성이다. 탈북 브로커들은 남성보다 매매결혼이나 성매매 등으로 팔아넘길 수 있는 여성을 더 선호한다. 여성에게 ‘탈북’은 한국에 입국하는 ‘순간’이 아니다. 북한 국경을 넘어 중국을 거치는 ‘과정’에 가깝다.

탈북 여성이 중국에서 머무는 동안의 삶은 한국에 들어온 이후의 삶을 좌우한다. 영국의 비영리단체 ‘코리아 퓨처 이니셔티브(Korea Future Initiative)’가 2019년 5월에 발표한 보고서 〈성노예: 중국 내 북한 여성과 소녀들의 성매매, 사이버섹스, 강제 결혼〉에 따르면, 중국에 있는 북한 여성의 60%가 인신매매를 당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들 중 50%가 성매매, 30% 이상이 강제 결혼, 15%가 사이버섹스(웹캠 등)에 내몰린다.

한국에 오기까지 평균 수년이 걸린다. 지난 7월31일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의 한 아파트에서 아들과 함께 굶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한 아무개씨도 북한을 떠난 뒤 곧바로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다. 한씨는 중국인 남성 사이에서 첫째 아들을 낳아준 뒤에야 한국에 올 수 있었다. 두 나라를 오가던 한씨는 결국 어느 공간에서도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한 채 장애가 있는 둘째 아들을 홀로 키우다 고립된 죽음을 맞았다. 자살에 가까운 고독사였다(〈시사IN〉 제624호 ‘배곯는 모자를 우리는 방치했다’ 기사 참조). 고립과 가난은 한씨만의 문제였을까. 다른 탈북 여성들은 한국에서 어떻게 삶을 꾸리고 있을까.

ⓒ시사IN 신선영탈북 여성이 꾸린 보금자리에 엄마와 두 아이의 신발이 나란히 놓여 있다.

팍팍한 삶에도 북한에 있는 동생에게 ‘송금’

이한아씨는 중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메신저를 통해 헤어진 어머니를 찾기 시작했다. 어머니 역시 이씨와 마찬가지로 돈을 벌기 위해 중국으로 넘어갔다가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중국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어머니는 한국에 정착해 있었다. 이씨 혼자 한국으로 가려 했지만, 네 살 아들을 두고 갈 수 없었다. “엄마가 중국으로 떠났을 때 막냇동생이 네 살이었거든요.” 엄마가 떠나고 2년 뒤 막냇동생은 이씨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국으로 떠나려는 자신을 바라보는 네 살짜리 아들이 어머니가 중국으로 떠날 당시 네 살이었던 막냇동생과 자꾸 겹쳐 보였다. 죄책감이 들어 이씨는 아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남편과는 연락이 끊겼다.

탈북 여성에게 안정적인 직업이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던 어머니는 이씨에게 대학 입학을 권했다. 100명 정도 되는 하나원 동기 중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이씨가 유일했다. 이씨는 낮에는 운전학원, 제과학원 등을 다니며 닥치는 대로 자격증을 따고 늦은 오후부터 야간대학을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는 주민센터가 연계해준 위탁 가정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이씨는 아파트 이웃이나 대학 동기들과도 쉽게 친해지지 못했다. “탈북민이라고 하면 어떻게든 흠을 잡으려고 눈 두 개에다 눈 두 개를 더 가져다놓고 들여다보는 것 같아요.”

이씨는 한 달에 55만원 나오는 기초생활수급비와 한부모 가정으로 받는 혜택으로 빠듯하게 살림을 꾸리고 있다. 아이 앞으로 나오는 양육수당과 아동수당은 위탁 가정으로 간다. 틈틈이 식당 아르바이트로 모아둔 돈을 1년에 두 번 정도 북한에 사는 두 동생에게 150만원씩 부쳐주기도 한다. 실제 동생들 손에 들어가는 돈은 중개 수수료 40%를 제한 90만원 남짓이다.

이씨를 버티게 해주는 힘은 아이다. 이씨의 목표는 빨리 대학을 마치고 좋은 직장을 구해 아이에게 안정적인 가정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나중에 새로운 가정을 꾸리더라도 아이가 우선이다. “(남자가) 저에게 잘해주는 것보다 아이에게 진심으로 잘해주는지가 중요하죠. 저 자신은 이미 포기했어요.” 이씨는 만성적인 불면증을 겪고 있다. 위탁 가정에 맡겨져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아이가 보고 싶기도 하고, 8년 전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던 막냇동생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히 떠오르기도 한다. 중국에서 낳은 아들과, 북한에서 잃은 동생을 떠올리며 밤새 뒤척이는 이씨가 할 수 있는 일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뿐이다.

장혜선씨(34·가명)는 중국에 있는 딸에게 문자를 썼다 지우곤 한다. 장씨는 1998년 ‘고난의 행군’ 시절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하던 어머니를 따라 중국으로 넘어갔다. 북한으로 돌아갈 돈조차 떨어졌을 때,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장씨를 담보로 돈을 빌려 북한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돈을 갚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약속한 기한이 지나버렸고, 장씨는 내륙 지방으로 팔려갔다.

당시 장씨는 열세 살이었다. 한집에 사는 남편의 여동생이 그와 동갑이었다. 장씨의 남편은 얼굴을 제외한 전신에 화상을 입은 남성이었다. 이듬해 장씨는 딸을 낳았다. 아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도망쳐서 북한으로 돌아왔지만 배고픔은 계속됐다. 하루 종일 ‘내일 아침에는 가마에 뭘 넣을 수 있을까’만 생각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7년 뒤 장씨는 자발적으로 북한을 떠나 다시 중국의 시댁으로 돌아갔다. “어린 나를 돈 주고 산 나쁜 사람이기도 하지만, 어찌됐든 중국에서 신분이 없는 나를 보호해준 유일한 사람이잖아요.”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장씨의 딸은 돌아온 장씨를 냉대했다.

강제 북송의 공포에 떨던 장씨는 한국행을 선택했다. 중국을 떠나기 전 장씨는 딸에게 “엄마가 한국에 가서 주민등록증도 만들고 신분이 당당해지면 돌아올게”라고 약속했지만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두 번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딸은 장씨와 통화할 때마다 비꼬기 일쑤였다. “딸도 자기가 말하면서 상처를 받겠지만, 저도 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상처를 받는 거예요. 애가 크고 나서는 ‘엄마가 원해서 한 결혼이 아니었다’고 설명도 해보고 대화도 해봤는데, 딸한테는 혼자 남은 아빠만 불쌍한 거지.”

딸과 통화를 한 날이면 장씨는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울었다. 결국 지난해 11월 마지막 통화를 한 이후 지금까지 장씨는 딸에게 전화를 걸지 못했다. “딸한테 ‘네가 나중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서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면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말하고는 끊었어요. 아직도 딸에게 문자를 보내려고 한참 쓰다가 그냥 지워요. 어떤 답장이 올까 무섭기도 하고….”

중국에서 일정 기간 살지 않고 바로 한국에 들어오는 경우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다. 탈북자들은 중국에서 몇 달에서 몇 년 동안 체류하다 남한으로 들어오는 경우를 ‘중국행’이라고 한다. 반면 며칠 동안만 중국에 짧게 머물고 한국에 오는 것을 ‘직행’이라고 한다. 중국행 브로커 비용이 평균 200만~300만원이라면 직행 브로커 비용은 평균 1000만~1500만원 선이다.

ⓒ시사IN 이명익탈북 여성을 지원하고 심리 상담을 제공하는 ‘여성인권을 지원하는 사람들’ 사무실 모습.

“두만강 넘던 정신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남편과 함께 직행한 박지수씨(30·가명)는 큰 어려움 없이 정착한 드문 사례다. 박씨 부부는 남한에 들어와 아들과 딸을 낳았다. 다른 도시에서 일하는 남편은 주말에만 집에 들르기 때문에 두 아이의 양육은 박씨 몫이다. 남편 혼자 일해서 아이 둘을 키우는 살림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가까운 가족 모두 한국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북한이나 중국에 따로 돈을 보내야 할 일은 없다. 박씨는 최근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 집에서 북한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배송하는 일이다. 두 아이 모두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여유가 생겨 본격적으로 준비 중이다. 주변 지인들에게 알음알음 주문을 받아 음식을 만든 지 열흘 남짓 됐다.

탈북 여성들은 자신이 경험하는 어려움이나 속마음을 터놓기를 어려워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두만강 넘던 정신’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이웃에게 아이를 부탁하느니 차라리 위탁 가정에 아이를 맡기기로 결정했던 이한아씨가 말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은 그게 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 질문을 받는 건 우리니까요. 그냥 혼자 짊어지는 게 마음 편해요.”

탈북 여성을 지원하고 심리 상담을 제공하는 비영리단체 ‘여성인권을 지원하는 사람들’의 박용란 상담가는 “탈북 여성들이 북한에서 겪었던 일이나 중국에서 지냈던 시간은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트라우마가 아니다. 결국 깊은 인간관계를 맺어야 터놓을 수 있는데, 이북 억양만 들려도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는 한국 사회에서 마음을 열기란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 상담도 먹고살 만해야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남북하나재단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탈북자들의 평균임금은 189만9000원이다. 탈북 여성이 홀몸으로 저임금 노동을 하면서 중국과 북한 내 가족까지 먹여 살려야 하는 상황에서는 상담도, 제대로 된 교육도 요원한 일이다. 이는 숨진 한 아무개씨 사례처럼 고립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 된다.

한국에 잘 정착했다고 자평하는 박지수씨가 바라는 것은 특별하지 않다. 지금처럼 화목하게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중국을 거쳐 힘겹게 남한으로 온 이한아씨와 장혜선씨의 꿈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난 한씨의 꿈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