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지소미아 종료 손익계산서
  • 남문희 기자
  • 호수 625
  • 승인 2019.09.09 12:3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의 지소미아 종료 선언 이후 아베 총리 얼굴에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지소미아 종료 결정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은 긴밀하게 협의했다. 미국으로선 또 다른 군수 시장이 열릴 기회이기도 하다.
ⓒ연합뉴스

아베 총리와 함께 있으면 악동 기질이 발동하는 모양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 얘기다. 8월24~26일(현지 시각) 프랑스에서 진행된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공동 기자회견이 열렸다. 원래 예정에 없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좋은 얘기는 빨리 발표해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아베 총리 측은 패닉에 빠졌다.

이유가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좋은 얘기’가 아베 총리에겐 ‘아주 나쁜 얘기’였기 때문이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중국이 구매를 거부한 미국산 사료용 옥수수 275만t을 일본이 떠맡기로, 미·일 정상회담에서 합의했다는 내용이다.

일본은 이 옥수수 구입 문제로 시끌벅적하다. 275만t이면 일본 한 해 옥수수 구입량의 4분의 1 정도다. 트럼프 행정부는 옥수수를 중국에 팔 수 없게 되는 바람에 미국 농민들 달래기가 막막해졌다. 이것을 아베 총리가 떠맡아줬다. 문제는, 일본이 이 막대한 양의 옥수수를 사료용으로도 거의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료용 곡물은, 풀떼기인 ‘조사료’와 영양가 높은 알곡으로 만들어진 ‘농후사료’로 나뉜다. 아베 총리가 수입하기로 약속한 미국산 옥수수는 전량 농후사료다. 가축에게 농후사료만 먹이면 살만 찌고 병에 걸리기 쉽다. 결국 아베 정부는 농후사료만 불필요한 규모로 대량 수입하게 된 것이다.

일본이 옥수수를 대량 구매한 대신 다른 부문에서 양보를 얻어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미국 축산 농가의 이해관계가 걸린 쇠고기 수입에 대해 아베 총리는 관세율을 38.5%에서 단계적으로 9%까지 낮춰주기로 약속했다. 반면 자동차의 대미 수출에서 현행 2.5% 관세율을 점진적으로 철폐해달라는 일본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 도중 “일본은 민간인들이 정부 얘기를 잘 듣는다”라는 비하성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8월27일 <마이니치 신문>은 “트럼프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무기로 삼았던 아베 총리가 그에게 농락당하는 모습이 특히 눈에 띄었다”라고 지적했다.

일본 경제 ‘10월 위기설’

옥수수 275만t 구매 비용은 한국 돈으로 8조원에 해당한다. 일본 경제에 대한 전망도 좋지 않은 시기다. ‘10월 위기설’까지 나온다. 그동안 아베노믹스에 따라 수출이 호조를 나타내면서 기업 수익률이 개선되고 실업률도 떨어진다는 낙관론이 팽배했다. 하지만 일본이 불황을 탈출하는가 싶을 때마다 등장했던 ‘엔고의 덫’이 이번에도 들이닥쳤다. 미·중 갈등으로 세계경제가 불안정해지자 ‘안전자산’으로 분류되는 엔화로 글로벌 투자 자금이 몰린 탓이다. 2015년 하반기에 달러당 125엔까지 떨어졌던 엔화 가치가 지난 8월 달러당 105엔 수준까지 높아졌다. 엔화 가치가 올라가면 그만큼 해외시장에서 일본 상품의 가격이 상승한다. 일본의 수출 채산성이 크게 악화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나마 일본 국내 수요로 수출 경기의 악화를 보완해왔는데 10월1일 단행되는 소비세 인상으로 이마저 여의치 않다. 현행 8%에서 10%로 소비세가 인상되는 가운데 과거의 인상 때 나타났던 가계 소비 위축과 경기 둔화가 재현되리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대(對)한국 수출규제의 배경에는 일본 경제가 계속 잘나갈 것이라는 전망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더구나 수출규제로 인한 한국의 불매운동과 관광절벽 사태로 위기감이 심화되고 있다. 안소은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일본에서 최근 확산 중인 ‘10월 경제위기설’이 현실화하는 경우, “즉각적인 수출 개선을 위해 대한국 수출 허가가 완화될 가능성도 있다”라는 분석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아베 정부는, 한국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라는 강수를 둘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한국에 지소미아를 유지하라는 강력한 신호를 보내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은 굳이 한국과 직접 말을 섞을 필요조차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의 여러 제안에 대해 무시 전략으로 일관했다. 한국이 지소미아 종료라는 결단을 내린 직후 G7 회담 참가를 위해 출국하는 아베 총리 얼굴에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Reuter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아베 일본 총리가 8월25일 프랑스에서 열린 G7 정상회담에서 회담을 하고 있다.

사실 한·일 간 군사정보 교류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지소미아 종료로 한국 측이 향후 얻어내지 못할 정보는 많지 않다. 반면 일본은 북한 미사일의 발사 정보를 구할 수 없게 되어 어려운 처지가 된다. 아베 총리에게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매달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베 총리가 일본 경제의 하락 국면을 무릅쓰면서까지 8조원 가치의 쓸모없는 미국산 옥수수 사료를 수입할 때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바라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즉,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를 비판하는 한마디가 트럼프 대통령 입에서 나와야 했다. 그렇게 되면 한국과의 팽팽한 시소게임에서 일본이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 다음 날(8월23일), 트럼프 대통령 발언은 다음과 같았다. “문 대통령도 나의 아주 좋은 친구다. 한국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자.” 공식 발언의 전부다.

물론 일부 일본 언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다른 말도 했다고 한다. <요미우리 신문>(8월24일)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만찬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신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산케이 신문>은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태도는 너무 심하다. 현명하지 않다’고 말했다”라고 보도했다. 두 신문은 과거에도 한국과 미국 사이 갈등을 부각시키는, 확인되지 않은 뉴스를 실은 전력이 있고 친(親)아베 성향이 짙다. 설사 트럼프 대통령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아베 총리에 대한 립서비스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한국 정부의 판단은 트럼프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상황을 보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아베 총리 손을 들어줄 이유가 없다. 먼저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를 발표한 시점이 언제인가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다. 7월1일 <산케이 신문>이 예고 기사를 내보내더니 그다음 날 아베 정부가 전격적으로 수출규제를 단행했다. 7월1일이면 바로 전날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미 정상 회동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이다. 남의 잔칫상에 재를 뿌린 것이다.

미국 측의 ‘휴전협정’ 제안 사실 공개

물론 아베 총리로서는 화를 낼 만한 일이었다. 그는 오사카에서 G20 정상회담을 개최한 외교적 성과를 한껏 부풀려 7월 말 참의원 선거에 활용할 계획이었다. 느닷없는 남·북·미 정상 판문점 회동으로 외교적 성과가 퇴색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모기장 바깥의 모기 신세가 됐다”라는 일본 언론의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다. 남·북·미 정상 판문점 회동 당일 고노 다로 외무장관은 한가하게 트위터 팔로어들과 ‘다로를 찾으라’며 G20 당시 사진에서 자기가 어디 있는지 찾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일본 언론은 아베 정부가 남·북·미 정상 판문점 회동을 파악하지 못한 ‘재팬 패싱’의 정황이라고 꼬집었다.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부는 G20 기간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무시당하거나 느닷없이 미·일 동맹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 등의 수모를 겪었다. 남·북·미 정상 판문점 회동으로 뒤통수까지 크게 맞은 꼴이 된 것이다. 지난해 말 강제노동 피해자 배상금 지급 소송과 관련한 한국 대법원 판결 이후 아베 정부가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을 중심으로 ‘한국 때리기’를 준비해왔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시사IN> 제622호 ‘아베 정부의 기습과 한국경제 나비 효과’ 기사 참조). 공격 사인을 내린 것은 아베 총리다. 그 시점이, 트럼프 대통령이 G20 정상회담 참석차 오사카에 오기 전부터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여러 차례의 친서 외교로 어렵게 마련해 자신의 치적의 하나로 만들어낸 극적인 판문점 회동 직후였다.

그렇다면 아베 총리가 수출규제로 때린 건 문재인 대통령일까, 트럼프 대통령일까? 트럼프 대통령의 처지에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사태 이후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20여 일 지난 7월19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역할’을 요청받았다며 “한·일 정상이 원하면 관여하겠다”라고 밝혔다. 7월22~24일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일본에 특사로 보내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지 말 것’과 ‘호르무즈해협 호송함대에 자위대도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일본은 미국의 이 두 가지 요구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평소 일본이라면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7월30일(현지 시각), 미국 정부 고위 관리가 백악관에서 기자들에게 “한·일 두 나라가 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도록 추가보복 조치를 중단하는 휴전협정(a standstill agreement)을 제안했다”라고 공개했다.

당시 일본 측은 ‘휴전협정’을 완강히 거부하는 방침을 굳히고 있었다.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사실상 주도해온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미국으로부터 그런 요청을 받은 사실이 없다”라며 완고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미국으로서는 아베 정부로부터 굴욕을 당한 것이다.

ⓒ조선중앙통신6월30일 판문점 남측 자유의집 앞에서 문재인 대통령, 김정은 국무위원장, 트럼프 대통령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국 측이 ‘휴전협정 제안’ 사실을 공개한 것은 호르무즈해협 파병에 선뜻 동의해준 한국을 배려해서라고 한다(8월29일 현재 한국 정부는 호르무즈 해협 파병에 대해 결정된 바가 없다는 입장이다). ‘미국도 나름 노력했다’는 것을 한국에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노력은 일본 각의가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국가 배제를 결정하기 하루 전인 8월1일,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고노 다로 외무장관을 한 번 더 만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이뤄지지 못했다.

이후 미국 측은 문재인 정부를 설득해서 지소미아를 유지시키려고 노력했다. 한국 정부 역시 사실상의 대화 움직임을 보였으나 일본 측의 거부로 결국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내리게 된다. 한국이 지소미아를 종료시키자 잠잠하던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 고위관리들이 한국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는 지소미아 종료 결정 과정에서 미국 측과 여러 차례에 걸쳐 긴밀하게 협의했다고 밝혀왔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 내에서 간헐적인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이에 한국이 다시 항의하는 진풍경이 벌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한·미 간 협의 채널 문제에서 파생된 해프닝일 가능성이 높다. 지소미아 종료와 관련된 주요 협의 채널은 청와대 국가안보실과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실이다. 청와대 측이 밝힌 바에 따르면, 모두 9차례에 걸쳐 한·미 간에 긴밀한 협의가 오갔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정부 및 문재인 대통령 입장을 국무부나 국방부보다 상세히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과거에도 남북 정상회담 등 수뇌부 사이의 의사소통은 주로 청와대와 백악관 간에 이뤄져 국무부와 국방부 등에서는 잘 모를 때가 있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경우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 처지에서 보면 지금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동안 미·일 동맹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때 반드시 따라 나오는 얘기가 ‘미국산 무기를 구매하라’는 요청이었다. 어떻게 보면, 무기 판매를 위해 의도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식이다. 이번에 청와대의 지소미아 종료 발표를 보면, 트럼프 대통령의 그런 측면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지난 8월22일 지소미아 종료 선언 이후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제2차장의 발언 내용이 그렇다. 그는 “당당하고 주도적으로 안보 역량을 강화해 나간다면 이는 미국이 희망하는 동맹국의 안보 기여 증대에도 부합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한·미 동맹의 강화로 이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 차장의 다음 발언을 보면, 그동안 천문학적 규모의 무기 구매로 미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던 일본의 수법을 청와대가 차용하려고 시도하는 듯하다. “안보 분야에서도 외부 세력의 의존도가 너무 높으면 부품 소재와 같은 문제가 안 생긴다는 보장이 없다. 일본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 우리도 빨리 저궤도 정찰용 인공위성을 만들어 올려야 한다.”

정찰용 위성 개발도 독자적으로?

한·일 간의 군사력 격차에서 가장 차이가 벌어지는 게 바로 정찰위성 분야다. 지소미아 종료로 한국이 일본의 협조를 얻지 못하면 하루빨리 자력으로 해결할 길을 찾는 게 바람직하다. 한국이 정찰용 인공위성을 만들려면 미국의 군수품을 살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또 다른 군수 수요가 발생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결과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덕분에 골치 아픈 옥수수를 275만t이나 일본에 떠넘길 수 있었다. 또 다른 큰 장이 서게 된다면 그에겐 나쁜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의 중재로 한·일 간 협상이 재개돼 관계가 봉합된다 해도 한·일 관계가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한·미 동맹이 약화되고 미·일 동맹이 지배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한·미 동맹은 또 다른 방식으로 진화하게 될 것이다.

ⓒ연합뉴스8월2일 방콕에서 만난 강경화 외교부 장관,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 고노 다로 일본 외무 장관.

 

Magazine
최신호 보기 호수별 보기

탐사보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시사IN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