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

미국의 비영리단체 ‘에이징 위드 디그니티(Aging with Dignity)’는 1996년 ‘다섯 가지 소원(five wishes)’이라는 제목의 생전 유언장을 만들었다. 단체 차원의 운동으로 시작된 다섯 가지 소원은 현재 미국 내 40개 주에서 법적 효력을 갖는 문서가 됐다. 적는 내용은 건강 관련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없을 때 나를 대신해 결정을 내릴 대리인을 3명까지 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밖에 심폐소생술을 비롯해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치료나 간병 방식 등을 구체적으로 적도록 되어 있다.

김대균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권역호스피스센터장(가정의학과 교수·사진)은 죽음에 대해 이런 차원의 접근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한다. “한국은 연명의료 중단 제도가 도입되면서 의료적인 부분만 작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 가지 소원’을 보면 완화 의료 단계에서 목욕은 일주일에 몇 번 하고 싶은지, 패디큐어나 매니큐어는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지, 임종 순간에 당신의 퇴장곡은 무엇이 되길 원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적게 돼 있어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껄끄러울 때 좋은 대화 주제로도 사용할 수 있겠죠. 이 정도는 미리 써야 우리가 죽음을 진지하게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김 센터장은 전공의 시절 읽었던 미국 논문 한 편을 지금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내과 전공의 4년 차와 말기암 환자를 연결해 환자가 죽을 때까지 집을 방문하며 돌보는 프로그램을 시범운영한 결과를 소개하고 있었다. 프로그램 시행 전후 차이가 컸다. 의사로서 전인적인 돌봄에 대한 의지와 지식이 늘었다는 내용이다. 마침 수련하던 병원에 방문 간호사 제도가 있어서 간호사를 따라 나섰다. “환자 집에 갔는데 소변이 너무 마렵더라고요. 그런데 차마 화장실이 어디냐고 못 물어봤어요. 그때 깨달은 게 ‘아, 환자가 병원 진료실에 들어오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더라고요. 의료진이 집으로 방문하면 환자가 주인이고 나는 방문객이잖아요. 그럴 때 의료진이 갖고 있는 권위 같은 걸 내려놓게 되는 거 같아요.”

그 ‘압도적’인 경험 후 김 센터장은 호스피스에 관심을 갖게 됐다. 헌신이나 봉사 혹은 일부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닌 보편적 제도로 호스피스를 도입할 수 없을까 고민하는 시간이 쌓였다. 김 센터장은 호스피스가 존엄한 생애 말기에 있어 대안의 전부처럼 이야기되는 것 역시 경계한다. 호스피스는 완화 의료의 ‘작은 일부’라는 의미다. “호스피스 팀은 최소 3~5명으로 구성돼야 하는데 아무리 인프라를 확대한다 한들 이 도움을 현실적으로 몇 명이나 받을 수 있겠습니까? 완화 의료는 모든 의사가, 특히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커뮤니티 케어를 위해서라도 주치의 제도 도입을 통한 1차 의료 정상화가 함께 이뤄져야 합니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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