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홍구‘평화의 소녀상’ 옆에 한 젊은 정당인이 ‘노 아베’ 팻말을 들고 서 있다.

일부러 일본 대사관 앞을 갔다. 재건축 공사를 한다는 일본 대사관은 높다란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평화의 소녀상’은 더위 속에도 숄을 걸쳤고 꽃다발이 발밑에 놓여 있다. 누군가가 보여준 정서적 교감이었다. 작품의 심미성과 상관없이 이 조각상만큼 대중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작품은 근래에 드물다. 소녀상 옆에는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단식 농성 천막이 있고, 한 젊은 정당인은 ‘노 아베’ 팻말을 들고 서 있다.

노 아베 팻말을 보니 자동으로 ‘반일’ ‘극일’ 구호가 떠올랐다. 반일은 일본에 반대한다는 뜻인데 무엇을 반대한다는 것일까? 아마도 친일이라는 말과 비교해보아야 그 의미가 명확해질 것이다. 친일은 단순히 일본을 좋아하고 친하게 여긴다는 뜻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와 독립투쟁의 역사가 내재된 개념이다. 친일은 일본을 숭상해 민족을 배신하고 개인적 이득을 보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반일은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과 간섭을 포함한 모든 것을 반대하고 싫어한다는 의미이리라.

최근 경제전쟁 때문에 다시 등장한 극일은 또 무슨 뜻일까? 짐작하건대 일본에 의존하던 기술이나 학문을 우리가 만들어내거나 이루어 일본의 영향력과 힘으로부터 벗어나자는 뜻일 것이다. 일본은 넘어서야 할 대상이라는 얘기다.

반일 구호가 함축하는 의미가 넓어서 범위를 좁히고 반대하는 목표를 명확히 한 게 바로 ‘노 아베’이다. 노 아베는 현재 일본의 집권세력인 극우파를 통칭하는 용어다. 일본에 대한 반대 구호가 반일이나 극일 등에서 좀 더 구체적이고 명료해지는 데 수십 년이 걸린 셈이다.

북한에 대한 구호도 마찬가지다. ‘반공’이 제1의 국시였던 1961년 5·16 쿠데타의 혁명 공약부터 시작해 그 이후 ‘멸공’ ‘승공’ 같은 구호가 이어졌다. 멸공은 공산당을 없애버린다는 뜻이고, 승공은 공산당을 이긴다는 의미다. 심지어 〈승공 통일의 길〉이라는 교과서 보조 자료를 학교에서 나눠주고 가르쳤다. 기억이 희미한데, 북한의 침략 근성과 체제의 열악함을 열거하고 승공을 위해 유신을 단행했다는 선전이 주였던 것 같다.

북한에 친밀감을 표시하거나 옹호적인 태도에 대한 구호도 마찬가지로 변화했다. 친북이라는 용어는 이제 종북으로 바뀌어 정치적인 수사와 편 가르기에 이용되고 있다. ‘빨갱이’ ‘친북’ ‘종북’ 등 구호는 간단하고 명료하며 상대방을 단순화해 정치적으로 비난하기 쉽다. 정서적 호소력도 있었다. 오랜 시간 전쟁 공포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살아왔기 때문이다.

각성이며 진화일까, 일시적 현상일까

일본이나 북한 등 특정 국가를 반대하거나 찬양하는 용어는 어린 시절부터 우리 의식을 지배해왔다. 정치적인 무의식으로 자리 잡아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것을 대놓고 드러내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어디서 어떤 불이익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에는 일종의 이런 공포가 내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노 아베는 국가적 차원에서 주입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한 구호는 아니다.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구호다. 역시 자발적으로 벌이고 있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도 초유의 일이다. 이것은 일종의 각성이며 진화일까, 아니면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기자명 강홍구 (사진가·고은사진미술관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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