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O 홈페이지 갈무리

〈체르노빌〉은 스포일러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잘 알려진 1986년 4월26일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를 다루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시작되면 곧 큰 재앙이 닥치리라는 걸 누구나 안다. 최종회인 5화가 끝날 때쯤, 실은 우리가 사고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드라마를 만든 요한 렌크 감독도 체르노빌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지만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고 영화 전문 매체 〈컬라이더(Collider)〉 인터뷰에서 말했다.

〈워킹데드〉와 〈브레이킹 배드〉 시리즈를 만든 감독은 작품을 만들 때 재미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진실이 왜곡되더라도 가능한 한 최고의 영화적 경험을 구현하는 데 집중했다”라던 그가 이번에는 “진실에 집착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체르노빌〉을 만들며 처음으로 목표를 다른 데 두었다. 체르노빌 사고와 관련된 사람을 기리는 일이었다. 픽션이지만 진실이 중요했다. 진실은 드라마가 다루는 주제이기도 하다.

지난 5~6월 미국에서 방영된 HBO와 SKY의 합작 드라마 〈체르노빌〉이 〈왕좌의 게임〉(46%)을 제치고 HBO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 시청률 52%를 기록했다. HBO 드라마 중 최초로 50%를 넘겼다. 로튼토마토(신선도 지수 98%), 메타크리틱(9.4점) 같은 영화 평점 사이트의 반응도 심상치 않다. 9월 예정된 에미상에는 최우수 미니시리즈상을 포함해 19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한국에서도 8월, OTT 서비스 ‘왓챠플레이’를 통해 공개됐다.

사고 당일의 첫 장면은 소방관 바실리의 아내 류드밀라로 시작된다. 새벽 1시23분. 폭발음이 들리고 땅이 흔들린다. 자고 있던 남편을 포함한 소방대원이 현장에 출동한다. 원전에서 증기가 상공으로 치솟았다. 수십 종의 방사성 동위원소를 품은 증기는 무지갯빛으로 아름답다. 주민들은 원전이 잘 보이는 다리로 몰려가 방사능 낙진을 눈처럼 맞는다. 나중에는 죽음의 다리로 불리는 곳이다. 원전 내부는 분주했다. 전력 공급 실험이 진행 중이던 4호기에서 조작 미숙으로 원자로 내 노심이 녹아내렸다. 폭발이 일어났고 불길은 감속재로 사용하던 흑연에 옮아붙었다. 방사능 수치는 1만5000뢴트겐으로 치솟았다. 1시간 만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양이다.

“중요한 것은 영웅이 아니라 원흉이다”

인류 최대의 재앙을 다루지만 다큐멘터리 같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담담하고 건조하다. 체르노빌을 다룬 작품은 많다. 사고 당일을 자세하게 다룬 드라마는 처음이다. 당시의 고증에 충실했다. 제작진은 2014년부터 책, 영상, 사고 당시 문건들을 찾았다. 특히 원전 사고의 원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판 장면에 공을 들였다고 밝혔다. 5년 전 〈체르노빌〉의 시나리오 작가 겸 제작자인 크레이그 메이진은 타이태닉호가 왜 가라앉았는지는 알지만 체르노빌 원전이 왜 폭발했는지는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원전 사고 자체와 재난을 겪으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코미디를 주로 써온 그는 〈체르노빌〉의 장르를 정치 스릴러, 공포 영화 혹은 법정 드라마로 규정했다. 누구도 편안하게 보길 원치 않았다는 그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33년 전 실화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에 사람들이 감응한 이유는 뭘까. 드라마는 시작부터 ‘거짓의 대가가 무엇인지’ 묻는다.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정말로 위험한 것은 거짓을 계속 듣다 보면 진실을 보는 눈을 완전히 잃는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영웅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건 원흉이다.’ 원흉은 하나가 아니다. 당일 밤 원전의 책임자는 아나톨리 댜틀로프였지만 승진을 앞둔 그의 상사들은 안전하지 않은 테스트를 강요했고, 위험을 알면서도 부하 직원은 그의 지시에 따랐다. 거슬러 올라가면 원전 설계 과정에 오류가 있었고, 그걸 알면서도 자부심에 오점이 될까 봐 눈감은 국가가 있다.

ⓒHBO 홈페이지 갈무리

수습 과정에서 비극은 한층 강화된다. 일을 축소하기 바쁜 관료들과 서방세계에 알려지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최고 통치자가 있다. 단지 폐쇄적인 구조의 소비에트연방이라 그랬던 걸까. 크레이그 메이진은 “원자력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게 드라마의 요점은 아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 치명적인 비용을 수반하며, 우린 그걸 할 수 있고, 계속해서 할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영화 잡지 〈필름〉)”라고 말했다.

침묵의 살인자가 공기 중에 떠다니는 걸 몰랐던 발전소 주변 주민들은 36시간 만에야 대피한다. 사건이 악화되는 걸 막은 이는 ‘원흉’이 아니었다. 과학자 발레리 레가소프는 현장 수습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폭발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고농도 방사능으로 오염된 물속에 들어가 밸브를 연 사람은 원전 노동자이다. 광부 400여 명은 원자로아래 터널을 뚫어 냉각장치를 설치한다. 흑연을 처리하는 장면이 특히 압권이다. 로봇을 동원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 병사들을 투입해 지붕 위의 조각을 치운다. 입안에서 (플루토늄에 노출될 때 느껴지는) 금속 맛이 나는 것 같다.

ⓒEPA
ⓒEPA체르노빌 원전 사고 현장 인근의 프리피야트시에 버려진 차량을 촬영하고 부서진 건물(맨 위)을 살펴보는 관광객.

체르노빌의 희생자 수는 정확히 헤아릴 수 없다. 드라마는 마지막에 희생자의 수를 4000~9만3000명이라고 알려준다. 1987년부터 공식적인 사망자 숫자는 31명이다. 드라마 방영 후 체르노빌을 찾는 관광객이 증가했다. 이른바 ‘다크 투어리즘’이다. 2011년 2월부터 우크라이나 정부는 체르노빌의 견학 투어를 허용했다. 4기 원자로는 석관이라 불리는 콘크리트 구조물로 덮었지만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다. 드라마가 인기를 얻자 러시아의 한 텔레비전 채널은 CIA(미국 중앙정보국) 요원이 원자로 폭발의 배후로 지목되는 드라마를 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드라마 초반, 반복해서 나오는 대사가 있다. “노심 용해는 불가능하다.” 드라마에 영감을 주었다고 알려진 책 〈체르노빌의 목소리〉에는 발전소에서 일한 사람들과 과학자, 의료인, 군인, 이주민들의 증언이 나온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홋카이도 도마리 원전 방문 당시의 기억을 들려준다. 체르노빌에 대한 의견을 묻자, “우리가 일하는 원전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들은 답했다. 건물 위로 비행기가 떨어져도, 규모 8.0의 지진이 나도 견딜 수 있다고 했다. 국제원자력 사고등급이 체르노빌과 같은 7등급으로 분류되는 후쿠시마 사고 당시 9.0의 지진이 일어났다.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난 지 25년 뒤였다. 작가는 말한다. “나는 과거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것은 미래를 닮았다.” 드라마 〈체르노빌〉에서도 같은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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