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지 그림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으로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내주는 행위이다(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얼마 전 서울대 공학관 건물에서 근무하던 청소 노동자가 휴게실에서 사망했다. 수천 평에 이르는 넓은 캠퍼스에서 고인에게 허락된 공간은 계단 밑에 지어진 1평짜리 간이 공간이 전부였다. 35℃로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무더운 여름, 에어컨은커녕 창문조차 없이, 곰팡내를 참다못해 동료가 스스로 설치한 환풍기가 전부인 공간.

지난 10여 년간 휴게 공간을 포함한 노동자들의 처우와 작업환경을 전면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공론화하려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으며, 정부가 지난해 7월 ‘사업장 휴게시설 설치 가이드라인’까지 만들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투명인간처럼 일해야 하는 청소 노동자

허락되지 않은 것은 휴게 장소만이 아니다. 청소 노동자를 만나거나 인터뷰 기사를 읽다 보면 꼭 나오는 것이 첫차 출근과 조기 출근이다. ‘학생들이 오기 전에 치우고 사라져야 한다’ ‘이른 새벽 사람들 출입이 적은 때를 이용해서…’, 그러다 보니 정시 출근 시간보다 30분 일찍 와서 무급노동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오전 업무 시작 전 청소를 끝내라는데 담당 구역이 많다 보니 다 돌 수 없어서다. ‘지저분하고 미관상 좋지 않으니까 문을 닫고 있어야 한다’며 휴게실 문을 꼭꼭 닫아두었던 것처럼, ‘높은 분들이 오시는 날’이라며 청소도구를 치우게 하는 것처럼, 그들이 일하는 시간과 동선조차도 최대한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다. 대학 강의실에서, 비행기와 철도에서, 진료실에서, 일상의 풍경 안에서 그들의 존재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2000년대 들어 청소 노동은 아예 ‘외부화’되기 시작했다. 같은 곳에서 수년, 수십 년 동일한 일을 하고, 임금, 인력, 업무 내용 및 시간, 교대조까지 원청의 과업지시서에 의해 정해지는데, 그들의 소속만 용역업체로 바뀌었다.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해도, 용역업체는 권한이 없다고 하고 원청은 자기 소속 직원이 아니라며 서로 책임을 미루기 일쑤였다.

일터에서 동료들을 모아 집회라도 할라치면 업무방해죄로 기소되곤 했다. 업체 소속이니 조합 활동이든 쟁의행위든 업체를 찾아가서 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낯선 주소를 수소문해 찾아낸 용역업체는 방문하기도 어려운 먼 지방에 있거나, 오피스텔 방 한 칸에 전화기 하나 놓인 인력 모집 회사에 불과했다. 그렇게 그들은 실제 노동하는 곳에서 노동자로서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다. 고인은 얼마 전 직접고용으로 전환되었고 공공부문 정규직화가 진행 중이지만, 지난 십수 년간 청소 노동이 노동 3권의 사각지대에 내몰려 있지 않았더라면, 열악한 1평의 노동조건이 방치될 수 있었을까.

“자리를 주는 것은… 권리들을 주장할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김현경).”

우리 사회는 아직 충분한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환대라는 것이 사회가 정해놓은, 그래서 정말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가 만들어갈 수 있는 자리를 주는 것이라면, 그들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노동자들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만들어가는 경험을 통해서만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기시감이 드는 이런 비극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아직 우리는 그들의 ‘자리’에 대해 질문을 계속해야 한다.

기자명 우지연 (공공운수노조 법률원 변호사·민변 노동위원회)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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