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그동안 특혜적인 지위를 누려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되거나, 아니면 우리 아세안 친구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게 될 것이다.” 7월31일 아세안지역포럼에서 고노 다로 일본 외무장관이 남긴 말이다.
비비안 발라크리슈난 싱가포르 외무장관의 한마디는 정곡을 찔렀다. “화이트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한국을 뺄 게 아니라 아세안 국가들을 리스트에 포함시켜야 한다.” 공교롭게도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27개 국가는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 모두 백인 국가다. 한국이 빠지고 이제 명실상부하게 ‘화이트 국가들을 위한 화이트리스트’가 된 셈이다.
한·일 갈등 국면에서 보이는 황색백인의 고약한 단면
이 말을 들으며 필자는 문득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5년 저서 〈행동하는 양심으로〉에서 언급한 다음 문장을 떠올렸다. “명치(明治) 이래 백인에 대한 숭배와 동경은 동시에 ‘시나징(支那人)’이나 ‘조센징(朝鮮人)’을 철저하게 얕보는 황색백인적 우월감(黃色白人的 優越感)을 일본인에게 심어주었으며, …최근 100년간 일본의 역사는 아시아의 여러 민족에 대한 철저한 맹주의식(盟主意識)과 지배자의식, 선민의식(選民意識)의 역사이기도 하다.”
최근 한·일 갈등 상황에서 이 ‘황색백인적 우월감’의 고약한 단면을 본다. ‘한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 국제법을 어기는 나라, 은공을 모르는 나라’이고 ‘일본은 문명국, 한국은 아직도 미개한 야만국’이라는 프레임이 깔려 있는 주장이다.
한·일 양국이 1965년 청구권협정과 2015년 ‘위안부’ 합의를 체결한 것은 사실이다. 두 합의 모두 실질적 당사자인 징용 피해자들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국가 중심주의 관점에 선 일본의 눈에는 약속 파기일지 모르나, 피해자 중심주의에 선 한국 정부로서는 맹목적으로 존중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불법적으로 희생당한 피해자의 권리를 지켜주는 게 국가의 의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이 국제법을 어겼나. 대법원은 우리 헌법, 국제인권법, 국제인도주의법에 기초해, 식민 지배 시대 불법 징용에 대한 개인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으며 당시 징용에 관여한 일본 기업들은 민사 배상의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반면 일본 정부는 해당 판결이 청구권협정의 취지에 어긋나므로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과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보상 완결 사이에 다툼의 여지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국제법 위반인 것은 아니다. 더구나 한국에는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행정부와 사법부 사이의 견해차를 사전 조율하는 ‘법정의 친구(Amicus Curiae)’ 같은 제도가 없다. 오히려 국제법과 규범을 어긴 것은 수출규제를 통해 세계무역기구(WTO)의 자유무역 원칙을 저해한 일본이 아닌가.
한국에 수출하는 전략물자가 적성국 또는 준적성국에 유출되는 사례가 있기 때문에 수출규제를 가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4대 전략물자 통제체제에 모두 가입해 의무를 이행해온 한국은 미국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의 의무이행 성과평가(2018년 기준)에서 17위를 기록했다. 36위 일본보다 한참 모범생이다.
가장 고약한 것은 이른바 ‘은공론’ 혹은 ‘배은망덕론’이다. 국교정상화 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의 대가로 일본이 제공한 8억 달러(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덕분에 한국이 지금의 경제적 부를 얻은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후 한국의 경제성장 덕분에 일본은 1965년부터 2018년까지 그 850배에 달하는 6800억 달러의 대한(對韓) 무역흑자를 누려왔다. 일본 역시 차고 넘치게 돌려받았다.
“일본은 정신적 구각에서 탈피하여 타 민족에 대한 존경과 수평적 시각에 입각한 우호관계를 맺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충고다. 과거처럼 우월적 지위로 한국의 굴복을 강요하려다가는 재앙적 결과를 피할 수 없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피해자의 집단기억을 힘으로 억누를 수 있는 길은 없다. 그 상처를 헤아리고 치유할 때만이 가해자의 멍에도 제거될 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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