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나 학생이 주민이라면 단과대 행정실이나 대학본부는 동사무소 또는 구청에 해당한다. 대학에서도 교육·연구에 필요한 물적 기반과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다 보면 주민들의 각종 민원에 직면한다. 비합리적인 제도에 대한 지적부터 캠퍼스 쓰레기 처리나 식당에 대한 불만, 불친절한 직원에 대한 성토 등 갖가지 요구가 연중 접수된다. ‘느림’은 행정의 본능이다. 평소 복지부동, 무사안일 대학 행정이 답답했던 구성원이라면 다음 지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검토’ ‘논의’ ‘협의’ 같은 말에 속지 마라. 이 단어들은 행정부서가 생산하는 서류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표현일 것이다. 사안이 무엇이든 행정부서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관련 규정과 과거 자료를 뒤지고 여러 부서가 머리를 맞대고 토의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그런 행위가 이루어지기는 한다. 문제 해결을 위한 열 걸음 중 겨우 반보만 내딛고 진행이 안 되고 있다면? 그렇더라도 ‘검토 중’ ‘내부 논의 중’ ‘관련 부서 협의 중’은 틀리지 않은 말이다. 어쨌든 뭐라도 했기 때문이다. 민원인의 처지에 서서 최선은커녕 제대로 뭘 해보지도 않았지만,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다.

ⓒ박해성 그림


검토하고 협의 중이라는데 별 진척이 없을 때는 구체적으로 캐물어야 한다. 관련 부서와 책임자를 확인하고 해당 문제가 어느 선, 누구까지 보고됐는지, 미팅·회의가 열린 적이 있는지, 다음에는 언제 열리는지, 어떤 내용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예산 부족’이라는 말은 핑계일 가능성이 높다. 정치가 생물이라 했던가. 정치적·정책적 고려의 산물인 예산도 생물이다. 예산이 움직이는 방향을 보면 학내 역학 관계, 친소 관계를 읽을 수 있다.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예산이 부족하다는 것은, 총장이 무관심하거나 우선순위에서 밀렸다는 뜻이다. 아니면 관심이 있더라도 학내 기득권을 무너뜨릴 수단이나 리더십이 없거나, 적어도 관련 행정부서가 그 일을 해결할 의지가 없다고 해석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가용 예산이 정말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대학 재정이 점점 어려워지고 사용처가 고정된 예산도 많기 때문이다. 큰돈이 아니라면 보직교수들의 의지와 총장과 부총장의 결단으로 돈 문제가 해결되는 일을 꽤 많이 보았다. 예산을 주무르는 보직교수인 기획처장을 공략할 필요가 있다. 다른 보직교수들도 민원 해결을 위해 기획처장의 권한과 결정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

과감하게 요구하고 흔들어야 ‘겨우’ 변한다

‘학내 의견을 폭넓게 수렴한다’는 말을 기대하지 마라. 공문 하나 뿌리고 지정일까지 의견을 달라고 한 뒤 ‘회신이 없으면 의견 없음으로 간주한다’는 식이거나, 학내 게시판에 공지를 올리고 알아서 보라는 경우가 많다. 의견이 없을수록, 목소리 내는 이들이 적을수록 행정부서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간담회나 공청회 참석자가 적을수록 안도한다. 여기엔 약이 없다. 적극성이 답이다.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팔 필요도 있다. ‘왜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지 않느냐’고 구슬리고 채찍질해야 한다.

공부도 필요하다. 학내 규정을 찾아 안 된다고만 하는 행정부서 답변의 근거가 되는 규정과 문구를 잘 음미할 필요가 있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나 예외 조항은 없는지 살피고, 다른 대학 사례는 없는지 찾아보자. 규정과 사례는 행정부서에 양날의 칼이다. 규정 때문에 싫지만 해야 하는 경우가 있고, 사례가 없어서 하고 싶어도 못할 때가 있다.

대학, 그리고 대학의 행정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안정성도 중요하지만, 모든 면에서 그럴 필요는 없다. 더 과감하게 요구하고 흔들어야 겨우 변한다.

기자명 이대진(필명∙대학교 교직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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