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정부의 기습과 한국경제 나비 효과
  • 남문희 기자
  • 호수 622
  • 승인 2019.08.19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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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정부는 한국이 달라졌다는 걸 계산에 넣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반도체 산업이 곧 위기를 맞을 것처럼 주장했지만 3개 소재 모두 국산화 내지 대체 투입이 가능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AP Photo

 

닌자의 나라답게 기습을 한 것까지는 좋았다. 기습전의 요체는 단기 결전이다. 거사와 동시에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한국산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핵심소재 3개에 대한 일본의 ‘경제보복’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각자 알던 일본에 입각해 다른 그림을 제시한다. 공통점은 있다. ‘일본이 하면 뭔가 다를 것’이라는 선입견이다.

정작 아베 정부는 한 달이 훌쩍 지나기까지 최초의 기습 이외엔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한국 논자들이 각각 만들어낸 ‘일본몽’에 따라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그럴싸한 ‘이유’를 창조해낸 것인지도 모른다.

<월스트리트저널> 도쿄지국 부국장을 지낸 윌리엄 스포자토는 8월6일자 <포린폴리시>에서 일본 아베 정부의 기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싸울 준비도 안 된 채 한국과의 전쟁을 시작”해서 “모순된 입장과 모호한 빈정거림 외에는 (스스로의 입장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조차 못할 정도로 허술하다.”

거사의 막후 인물은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라는 게 일본 정가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일본 정치권력의 실질적 ‘당중앙’인 스가 장관이 경제산업성(경산성)을 동원해 일으킨 소요가 이번 ‘경제 침공’이라는 것이다.

ⓒAP Photo아베 일본 총리는 8월2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왼쪽은 스가 관방장관.

문제는 기습의 설계부터 오류였다는 점이다. 목표와 수단의 괴리다. 스가 장관이 노린 것은 문재인 정부였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한국의 행보를 못마땅해했던 그의 심기에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이 불을 붙인 셈이다.

다만 엉뚱하게도 한국 반도체 산업을 ‘수단’으로 선택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3개 핵심소재의 대한국 수출에 내주던 3년짜리 포괄허가를 개별허가로 바꾼 것이다. 문재인 정부를 혼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의 소재산업과 글로벌 분업구조를 모두 뒤흔들 만한 조치다. 목표와 수단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발생한 것이다. 한국 내에서 ‘일본의 논리’를 설파하며 문재인 정부를 뒤흔들어 고립시키는 움직임도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베 정부는 한국이 과거의 한국이 아니라는 점을 미처 계산에 넣지 못했다. 촛불혁명으로 아시아 민주주의 수준을 끌어올렸다는 자부심이 있는 한국의 시민사회를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스가 관방장관의 심경이 복잡한 이유

일본 내부는 이미 7월 하순부터 분열되기 시작했다. 경산성은 한국의 산업을 가장 심각하게 타격할 만한 공격 수단으로 3개 반도체 핵심소재를 고르는 과정에서 게이단렌(일본 경제단체연합회)을 소외시켰다. 수출규제로 초래될 부메랑은 게이단렌의 몫이었다. 게이단렌의 불만이 <니혼게이자이 신문>을 필두로 한 언론과 경산성 내 지역 경제과를 중심으로 확산됐다. 이들의 입장은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는 더 이상 일본을 위한 실익이 없으니 중단하자는 것이다. 역사 문제는 쟁점으로 놔두더라도 통상 문제에서는 철수하자는 ‘전술적 후퇴론’이다.
 

ⓒ삼성전자 제공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가운데)이 8월6일 삼성전자 천안 사업장을 둘러보고 있다.

반면 이번 사태를 주도한 스가 장관을 비롯한 경산성과 외무성 일부의 입장은 ‘전략적 공세론’으로 부를 수 있다. 더욱 전방위적으로 공세를 강화하면 한국이 무너질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만 예상외로 한국의 반격이 거세 이 상황을 장기간 끌고 갈 수 없다는 데에는 공감대가 이뤄진 듯하다.

그렇다면 아베 정부는 이번 사태에서 명분 있게 빠져나올 수 있는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7월 중순 이후 일본 외무성이 국내의 일본 인맥을 통해 발신해온 ‘1+1+α(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에 한국 기업, 일본 기업, 한국 정부가 함께 참여)’ 방안과 ‘이낙연 국무총리 특사 파견’이 그것이다. 즉, 이낙연 총리가 ‘1+1+α’ 같은 수정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방안을 들고 특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는 방법으로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보자는 것이다.

지난 7월 말,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를 들고 도쿄를 방문한 것은 일본 내부가 저마다의 수습책을 놓고 암중모색하던 시점이었다. 일본 정가 소식통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8월2일로 예정된 한국에 대한 화이트리스트 국가 제외를 중단하고, 호르무즈해협의 선단을 호위하는 호송 연합에 자위대를 동참시키라는 것이었다. 일본 자위대는 호르무즈 선단 동참 요구에 환호했다.

그러나 스가 장관의 심경은 복잡했을 터이다. 호르무즈 파병안을 수용할 경우 일본 여론의 반발이 심상찮을 것이 우려됐다. 더구나 미국의 요구에 따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중단할 경우, 아베 정권의 정체성이 손상될 수 있다. <로이터 통신>이나 <아사히 신문>까지 미국의 중재 사실을 보도했는데도 “그런 사실 없다”라고 스가 장관이 강력하게 부인한 배경이다. 또 이란과의 우호관계를 들며 호르무즈해협 파병까지 거절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참의원 선거 이후로 미뤄뒀던 미·일 무역협상이라는 큰 산이 버티고 있다. 미국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일본 경제의 운명이 요동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베 정부는 지난 8월2일 각의(국무회의)에서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아베 정부는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의 이유를 ‘일본의 안보적 사유’라고 둘러대왔다. 안보라는 명분까지 내세운 마당에 관련 조치를 슬그머니 철회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AP Photo한·일 우호 관계를 희망하는 일본 시민들이 8월4일 도쿄 신주쿠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8월7일 경산성은 시행세칙을 발표했다. 당초엔 일본 측이 3개 반도체 핵심소재 이외에 1100여 개에 이르는 ‘전략물자 취급 품목’ 가운데 일부 물자의 대한국 수출을 ‘개별허가’로 추가 지정할 것이 우려되었다. 그러나 이날 발표된 시행세칙을 보면, 추가로 개별허가 품목에 묶인 물자가 하나도 없다. 즉, 일본 기업들은 7월4일 개별허가 품목으로 지정된 3개 반도체 핵심소재 이외의 다른 물자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큰 규제 없이 한국으로 수출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일본 경산성이 자국 기업들에 화이트리스트 국가가 아닌 나라에 대해서도 간편하게 수출할 수 있게 마련해준 제도들(특별일반 포괄허가와 특정 포괄허가)을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하도록 시행세칙을 정했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 가운데 특별일반 포괄허가와 특정 포괄허가를 얻은 업체들은 화이트리스트 국가가 아닌 나라의 기업에도 개별허가 없이 포괄적으로(예컨대 한 번 허가를 얻으면 3년 동안 개별허가 없이 수출) 수출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더욱이 한국의 대기업과 거래해온 일본 업체들은 대다수가 특별일반 포괄허가증과 특정 포괄허가증을 보유하고 있다(36~39쪽 기사 참조).

8월8일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일본 경산성이 현재 개별허가 심사 중인 세 가지 반도체 핵심소재 중 일부에 대해 조만간 대한국 수출을 허용하기 위한 최종 조정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90일 걸릴 것이라는 기존 예상을 깨고 일부 승인을 앞당기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날 오후, 경산성은 3개 소재 가운데 하나인 포토레지스트의 한국 수출을 승인했다. 스가 장관은 정례 브리핑에서 “엄정한 심사를 거쳐 안보상 우려가 없는 거래임을 확인했다”라고 말했다.

이유는 명백하다. 8월24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연장시한과 8월28일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한국 제외 실행을 앞두고 미국과 국제사회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해보겠다는 심산이다. 즉, 일본의 최근 조치들은 한국에 대한 공격이나 보복이 아니라 오직 ‘일본의 안보를 위한 것’이며, 안보상 우려가 없다고 판단될 때는 대(對)한국 수출을 허가해줄 수도 있으니 ‘아베 정부를 믿어달라’는 제스처다. 그 대신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강행함으로써 언제든 허가권을 무기로 휘두를 수 있는 칼자루만은 쥐고 있겠다는 이야기다. 만약 한국 측이 불안하다면 그동안 여러 루트로 흘려온 ‘이낙연 총리 특사 사절단’을 일본으로 파견해, ‘한국 정부가 강제징용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겠다’는 ‘1+1+α’ 안을 내놓으라는 말도 된다.

문재인 정부가 아베 정부 측의 안을 받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 아베 정부는 일본 시민들에게 한국이 사죄 사절단을 보냈다며 일방적으로 승리를 선언할 것이다. ‘1+1+α’ 안에는 일본 정부가 빠져 있다. 일본의 한국 병합은 합법적이었고 개인 청구권 역시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아베 총리 등 일본 극우집단의 입장이 그대로 관철된 방안이다. 반도체 핵심소재에 대한 수출규제로 자유무역 질서뿐 아니라 첨단산업의 국제분업 구조를 교란해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아베 총리와 스가 장관 등에게는 최선의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의 입장은 어떠한가? 앞으로 한국이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국가로 복귀한다 해도 통상 부문에서 일본과의 신뢰 관계가 이미 깨져버린 상황이다. 아베 정부가 언제든 허가권이란 칼자루를 휘두를 수 있게 된 지금의 양국 간 통상 시스템에서는 ‘신뢰’를 거론하기도 민망할 지경이다.

또한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이후 국내 일각에서는 반도체 산업이 곧바로 위기를 맞을 것처럼 주장했지만 3개 소재 모두 국산화 내지 대체 투입이 가능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오히려 국산 소재가 양산 체제에 들어가는 내년 2월 이후에는 일본 소재 산업 기업들이 위기를 맞으리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국내 첨단소재 분야에 미칠 영향

아베 정부가 타깃으로 삼은 최첨단 소재조차 한국 측은 단기간에 국산화 내지 대체 투입 방법을 찾고 있다. 그보다 낮은 기술 수준의 부품소재 분야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탄소섬유나 카메라 렌즈 등 일본이 강점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분야도 국내 기업이 비슷한 수준으로 추격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동안 국내 부품소재 기업들이 빛을 보지 못한 것은 그 자리를 일본 기업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베 정부의 단견이 한국과 일본의 고착화된 국제분업 질서에 변화를 이끌고 있다. 삼성은 이미 반도체 분야에서 ‘탈일본’을 목표로 국산화에 박차를 가한다. 과거 특허분쟁을 겪었던 대기업 간 협력체제가 구축되고, 중소기업들을 부품소재 강소기업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산학연 협력체제가 본격 가동되기 시작했다. 신성장동력인 첨단소재 분야에서 강한 중소기업 등장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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