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원 그림

활동지원사는 ‘장애인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급여를 받고 장애인의 일상생활을 지원하는 사람을 말한다. 덕분에 많은 중증장애인이 지역사회로 나와 독립적으로 생활한다. 다만 활동지원사와 관계를 맺는 일이 현장에서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상호 존중하고 합리적으로 지원을 요청하고 받는 관계가 적지 않지만, 갈등도 많다.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기에 장애인 이용자는 활동지원사에게 종속될 수 있고, 반대로 장애인 이용자를 통해 일자리를 얻은 활동지원사가 이용자에게 종속될 수도 있다. 인격과 인격이 자존심을 걸고 충돌하기도 하며, 때로 지원을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수치스러운 일을 겪기도 한다.

장애인 이용자 처지에서 그날그날의 컨디션 등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존심이나 수치심도 느낄 일 없는 로봇에게 돌봄을 받는다면 어떨까? 만약 로봇이 요양시설 등에서 장애인이나 노인을 돌본다면 우리가 종종 접하는 인권침해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로봇은 돌봄을 받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 요구를 해도 묵묵히 그 일을 수행할 테고, 그의 사생활에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않으며 불쾌감이나 수치심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확산된 장애인 자립생활운동 (Independent Living Movement)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지역사회와 분리된 복지시설에서 누군가의 도움에 의존해 생활하거나 집 안에서 가족들 손에 의지해 평생 돌봄을 받으며 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타인의 선의나 의무감에 의존하는 삶은 장애인의 자율성을 보장하기에는 너무 취약하므로, ‘완전한 자립’이라는 이상을 충족하는 데 불완전하다. 이 때문에 급여를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활동 지원제도가 도입됐으나, 활동지원사와 장애인의 관계도 언제나 단순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장애인의 자기 결정과 주체성을 완전히 보장하면서 그가 물리적·정신적 제약에도 자립해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가 사이보그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장애를 가진 우리가 다른 ‘인간’의 도움 없이 우리의 생활공간과 신체를 제어하고 통제하는 시스템을 체화한, 사이버네틱 유기체가 되는 것이다.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일본은 이미 2015년 헬스케어 로봇에 대한 개호보험 적용을 검토한다고 밝혔고, ‘간병’을 위한 로봇시장의 크기만 2016년 34억 엔이었다. 2018년 40대 이상의 일본인 1238명을 대상으로 오릭스리빙(Orix Living)사가 시행한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의 84.3%가 로봇에게 돌봄을 받는 데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로봇의 돌봄은 고령화한 사회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현실화 단계에 와 있다. 

돌봄 로봇을 비롯한 각종 ‘돌봄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사이보그가 되어 우리가 자립을 꿈꾸고자 할 때, 우려되는 점도 있다. 첫째는, 이런 테크놀로지에 둘러싸인 사회에서 과연 노인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이 ‘실재하는’ 인간과 대면할 수 있을지의 문제다. 둘째는, 이런 삶이 ‘자립인지’ 혹은 ‘자립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더 근본적인 물음이다.

내가 열네 살 무렵, PC 통신은 존재했지만 접속은 할 수 없던 시골 마을에 전화사서함이라는 일종의 만남 플랫폼이 유행했다. 특정 번호로 전화를 걸어 자신의 사서함을 개설해두고, 서로 무작위로 사서함 번호를 눌러 자기소개와 전화번호를 담은 메시지를 남기고는 응답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 플랫폼을 통해 나는 거의 처음 내 또래 이성 친구를 여러 명 사귈 수 있었다. 물론 그 친구들에게 나는 강릉에 위치한 중학교에 다니고, 농구를 좋아하고, 자전거를 자주 타며 공부도 잘하는 남자아이였다(물론 현실에서는 하루 종일 방 안에 갇혀 만화 〈슬램덩크〉를 읽고, 혼자 팔굽혀펴기를 하고, 바닥에서 빙그르르 돌고, 자위행위를 하고, 16비트 게임을 하루 3시간씩 했다).

장애인이 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조건 

전화 속 나의 아바타는 인기가 많았고, 나는 누구보다 당당했다. 하지만 당시 알게 된 이성 친구 중 누구와도 나는 실제로 만나지 않았다. 거짓말을 무마해도 좋을 만큼 정서적으로 가깝다고 믿었을 때조차(그중 한 명에게 나의 현실을 고백했지만), 주말 어딘가에서 만나자는 제안은 이리저리 둘러대며 거절했다. 목소리의 세계를 떠나 몸을 가진 인간으로서 타자를 대면할 수 없었다. 내가 휠체어를 탄 채로 나의 아바타를 버리고 누군가를 만나는 데 따른 부담을 떨친 시점은,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나와 다양한 경로로 여러 타인을 만난 뒤였다. 지하철에서 마주하는 사람들, 교복을 입고 학교에서 어울린 아이들, 마트에서 물건을 사며 마주한 판매원과 다른 고객들은 때로 불편하고 종종 불쾌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물리적 세계에서 타인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약간의 위험을 수반하기 마련이다(타인이란 애초에 온갖 바이러스와 세균, 편견과 다른 생각, 동의하기 어려운 이념의 운반체다). 우리는 그 위험과 불일치 속에서 마침내 우정, 환대, 사랑과 연대가 가능한 만남도 있음을 깨닫는다. 정치사상가 아이리스 영은 이처럼 사람과 사람이 무수히 만나고 헤어지는 가능성을 지닌 도시적 삶을 ‘에로틱’하다고 묘사했다. 약간의 두려움과 긴장, 서로를 존중하는 순간이 겹칠 때의 보람과 감동, 공감하고 협력할 때의 구체적인 접속감은 우리가 몸을 가진 존재로서 서로 대면했을 때에 가장 극적으로 실현된다.

물론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페이스북 친구로서도 우리는 협력하고 서로를 도울 수 있다. 디지털 세계가 더 정교하게 발전한다면 위에서 말한 에로틱함이 가상현실에서도 모조리 구현될지 모른다. 이는 긴 논의가 필요한 문제다. 나는 우리가 직접 만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악수를 하고, 가까이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땀 냄새에 찌들거나 좋은 비누 향을 풍기는 실재하는 인간과 하나의 공간을 점유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굳이 타인을 만나지 않아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고, 디지털 세계에서는 완벽한 아바타로 사회생활이 가능한 때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세상으로 나올 수 있을까? 비장애인들은 장애를 가진 신체나 나이 든 신체를 대면하려고 할까?

스마트폰을 이용해 카페 직원을 대면하지 않고 커피를 주문하는 사이렌오더 기능이 도입되자, 청각장애가 있는 내 친구는 기뻐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카페 직원의 얼굴을 바라보며 “프라푸치노에 시나몬을 얹고…” 등을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다. 나는 이것이 친구에게 정말로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사이렌오더 형식을 띠는 사회에서 청각장애인이 자신의 목소리로 (또는 수어로) 말하고, 비청각장애인이 그
말을 듣는 의사소통이 더는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얼마간 혼란스럽기도 하다. 과학기술과 결합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장애인 자립생활운동’의 이념을 완전히 성취할 수 있다고 믿을지 모른다. 분명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는 삶에 한발 다가갈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연합뉴스지난해 10월 고위험 희귀난치 근육장애인들이 ‘활동지원사들의 근무 축소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며 침대에 누운 채 시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발달장애인에 대한 활동 지원을 생각해보자. 발달장애인의 활동지원사는 주로 발달장애인 이용자의 생활에 필요한 지식 정보 습득과 처리, 일상적 의사결정 지원 등의 일을 한다. 만약 어떤 발달장애인이 매일 커피 20잔을 마신다면, 활동지원사는 어떻게 그를 지원해야 할까? 어느 정도 말리거나 제한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설득할 수 있을까? 반대로 커피를 많이 마시는 행위도 발달장애인 이용자의 자기 결정인 만큼, 오히려 활동지원사는 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하는 주변인이 있다면 자신의 이용자가 커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알리고, 오래전부터 여러 사람의 설득에도 확고하게 많은 양의 커피를 마시기를 이용자가 선호해왔음을 강조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 활동지원사는 이런 문제를 두고 고민할 것이고, 그 고민은 인권교육이나 활동지원사 보수교육 등에서 토론될 것이다. 이는 실천적인 윤리 논쟁이다. 만약 ‘로봇’이 돌봄을 제공한다면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하게 될까? 발달장애인의 건강 상태와 그가 마신 커피의 양 등에 따라 필요하다면 커피 광고를 차단하고, 커피 전문점이 있는 길목을 지나가지 않도록 유인하는 일종의 너지(Nudge) 알고리즘을 설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개별 사안을 두고 숙고하고 집단적으로 토론하는 ‘인간’ 활동지원사의 지원보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더 온전한 보장법인가? (비록 느리고 둔해도) 여러 사람이 숙고한 판단에 따른 지원과 의사결정 알고리즘에 기초한 테크놀로지를 통한 지원 가운데 무엇이 더 ‘자립적’인지를 판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장애인 인권운동가 김도현은 장애인의 자립(自立)이 아니라 ‘연립(聯立)’을 기본적인 삶의 조건으로 우리가 꿈꿔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분명 장애인을 사이보그적 존재로 본다는 말은 특정한 문제 해결을 위한 테크놀로지와 장애인이 결합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장애인이란 다른 존재자(안내견·활동지원사·휠체어 등)와 접속해 함께 살아감을 근본 조건으로 삼는 존재라는 점에서, 우리는 근대적 인간상과는 다른 ‘포스트휴먼’ 시대의 사이보그로 장애인을 논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립 생활을 삶의 조건으로 우리가 꿈꿀 때 장애인의 신체적·정신적 ‘결함’이란, 타 존재자와의 결합을 돕는 이음매일지도 모른다.

기자명 김원영 (변호사·〈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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