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살의 가을 어느 날, 나는 포항에서 서울까지 가는 기차를 탔다. 장애 대학생 기업 채용설명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컨벤션 센터에 도착했을 때 설명회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홀 아래층에서 열리는 보조공학기기 박람회였다. 박람회를 둘러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신기하다거나 놀랍다는 감정이 아니라 ‘낯설다’는 감정이었다. 보조공학이라니, 그런 기계들이 있다고는 알았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휠체어용 차량, 특수 모니터와 특수 키보드, 의족과 의수, 점자 단말기를 지나 전시장의 구석진 곳으로 향하자 보청기를 출품한 부스가 보였다. 그곳에서 소개하는 보청기들은 내 것과는 달리 낯설기만 했다. ‘FM 시스템’ ‘텔레코일’ 같은 이름을 단 최신 기술에 대한 설명이 부스 벽면에 붙어 있었는데, 그건 어쩐지 내 보청기나 내 삶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어 보였다. 영상 속의 프로토타입처럼 느껴졌다.

ⓒ한성원 그림


그다음 해, 영국까지 가서야 비로소 보조공학 기술이 일상에도 널리 쓰임을 알았다. 우리 연수팀이 머문 호텔에서 체크인을 하다 보니 프런트에 표시된 특이한 귀 모양의 픽토그램이 눈에 띄었다. 그게 ‘히어링 루프’를 사용할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히어링 루프는 소음이 있는 장소에서 보청기나 인공와우에 무선신호를 직접 전달해 말소리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기술로, 영국에서는 많은 공공장소에 보편화되어 있다고 했다. 이튿날 인터뷰를 위해 방문한 왕립시각장애인협회는 런던 시내에 위치했는데, 아예 한 층 가득히 시각장애인을 위한 보조기기를 전시하고 있었다. 시각장애인 당사자인 직원은 우리에게 시각장애인을 위해 디자인된 주방을 보여주었다. 요리의 모든 과정을 음성, 촉각, 소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게 만든 주방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직원은 자신이 이 기기들을 주방에서 능숙하게 쓰고 있으며, 주방이 안전하게 느껴져서 매우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보조공학기기들이 누군가에게 새로운 신체이자 감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뒤 보청기를 새로 구입하면서, 이전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보청기의 첨단 기술에 눈길이 갔다. 특히 ‘사운드 리커버’ 기능이 흥미로웠다. 이는 고음역대의 청력 손실이 큰 난청인들을 보조하기 위해 고주파수의 소리를 압축하여 저주파수로 변형하는 기술이다. 즉, 난청인이 거의 들을 수 없는 고음을 아직 잔존 청력이 있는 음역대의 소리로 바꾸어 들려주는 것이다. 그때 구입한 내 보청기에는 이 기능이 탑재되어 있어서, 나는 고주파수의 새 소리나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볼펜 딸깍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원래 소리 그대로가 아니라, 기계를 통해 변형된 소리이다.

그러니까 보청기를 착용할 때 나는 일종의 ‘변형된 감각’을 갖는 셈이다. 어쩌면 가청주파수를 넘어서는 소리에 대해서도 같은 기능을 적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래는 (보통) 사람도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음역대로 압축해서 옮겨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는 굳이 필요가 없겠지만, 보청기는 이미 그러한 가능성을 지녔다. 그렇다면 그것을 확장된 감각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확장된 마음 이론’이 제공하는 인식의 세계

이러한 형태의 기술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대학원생 때 실험실에서 다루었던 장비들이 떠오른다. 실험실에는 값비싼 측정 장비가 많았는데 대개 인간이 맨눈으로 관찰할 수 없는 신호를 검출하는 기기였다. 형광 염료를 샘플에 넣고 희석하다 보면 나중에는 투명한 물과 구분이 되지 않는데, 그렇게 되어도 측정 장비는 이 샘플에 형광 염료가 있다고 수치를 띄워주었다. 장비를 쓰지 않고 맨눈으로 보아야 하는 샘플의 해석은 치열한 논의가 필요했다. “이쪽 밴드가 더 진한 것 같은데?” “아니, 자세히 보면 두 줄이 겹쳐져 있어.” 기계와 달리 인간의 눈은 분명한 한계가 있었고, 나는 기계의 감각을 더 믿었다. 때로 다른 연구실에서는 일종의 ‘확장된 신체’를 다루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민감한 화학반응을 일으키거나 밀폐 환경이 필요한 실험을 할 때는 장갑이 실험 박스에 달려 있는 ‘글러브 박스’를 쓴다. 사람은 벤치 밖에 있고, 손만 커다랗고 두툼한 장갑에 끼워 넣어 밀폐된 내부의 기구와 시약을 조작하는 것이다.

내가 보았던 확장된 감각과 신체의 경험들은 아직 일상이 아닌, 실험실과 같은 특수한 환경에서만 관찰할 수 있는 것일까? 앤디 클라크는 모든 인간이 도구와 외부 환경으로 연결된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확장된 마음(The Extended Mind)’ 이론을 주장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이 우리 기억의 일부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본 사람들은 이미 많을 것이다. 앤디 클라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스마트폰이나 통신 기술이 발달하기 전부터 이미 인간 자체가 도구와 긴밀히 연관된 ‘타고난 사이보그’라고 주장한다. 종이에 쓰면서 계산하는 행위는 단순히 머릿속에서 숫자를 굴릴 때와는 다른 사고 과정을 만든다. 손목시계도 그가 소개하는 흥미로운 예시다. 손목시계를 착용한 사람은 “지금 몇 시인가요?”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모른다’고 답변하지 않을 것이다. 손목을 돌려 시계를 눈으로 보고 시간을 확인하기 전에도, 즉 엄밀히 말해서 시간을 모르는 그 순간에도 시계는 이미 사용자의 지식의 일부로 간주되어 있다. 그는 “네. 잠시만요” 하고 시간을 ‘안다’는 전제로 시계를 확인할 것이다. 시각장애인의 지팡이와 스포츠 선수의 라켓도 마치 인지적으로 연결된 것처럼 느껴지는, 확장된 신체의 예시다.

 

ⓒ연합뉴스지난해 열린 제13회 대한민국 보조공학기기 박람회에서 선보인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계.
추를 돌려 시간을 알 수 있게 제작되었다.


확장된 마음 이론은 학계에서 다소 비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신체와 감각, 자아가 단지 이 몸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인식을 제공한다. 특히 장애인들을 보조하는 스크린리더, 보청기, 음성-문자 변환 기술, 점자 디스플레이, 보완대체 의사소통 도구와 같은 것들은 사람의 신체나 피부 안쪽에 직접 내장되지 않고도 사용자의 인지와 밀접하게 결합된 기술의 예시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이렇게 기술로 인해 감각과 신체가 확장되는 현상은 당연하게도 장애인 사이보그에게만 한정되는 일은 아니다.

과학은 인간의 감각을 확장하기 위해 도구를 발명해왔다. 과학의 역사는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를 어떻게 인식의 영역으로 가져오기 위해 분투했는가’ 하는 것과도 이어진다. 인간은 현미경을 통해 우리가 한때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미시 세계의 문을 열었고, 망원경을 개발하고 우주로 띄워 보내면서 더 먼 곳에서 오는 별빛들을 보게 되었다. 많은 장비들이 우리가 감각하지 못하는 세계를 가시광선으로, 혹은 데이터로 변형하여 보여준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것들을 실제로 ‘본다’고 믿는다. 우리의 문명 자체가 변형된 감각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장애 보조기술과 보편 기술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을까? 그 기술이 인간 몸의 경계 밖에 있는 확장된 감각과 신체에 관한 것이라면, 크게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 유튜브 영상의 자막을 생각해보자. 음성-문자 변환 기술을 이용한 자동 자막 서비스가 점점 발전하는 중이고, 동시에 유튜브 영상 제작자들이 별도로 자막을 다는 경우도 늘고 있다. 자막은 청각장애인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영상의 집중도를 높여주기도 하며, 소리를 켤 수 없는 상황에서 영상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오디오북은 글자를 읽기 어려운 시각장애인과 노인들에게 특히 유용하지만, 바쁜 직장인들이 틈틈이 즐기는 새로운 콘텐츠로서의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엘리베이터, 경사로, 굴곡 없는 보행로는 휠체어를 타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매우 편리하다.

인간이 기계를 통해 세계로부터 받아들이는 정보들은 대개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형태로 전환된다. 이를테면 화재 감지 센서는 인간이 느끼기에 미약한 열기나 위험 기체를 빠르게 감지하고,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정보(소리)로 전환하여 위험을 경고한다. 그런데 그 정보가 ‘정상적인 청력을 가진 보통의 사람들’만을 고려하고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이미 확장된 감각의 기술을 손에 쥐고 있는데도, 그것을 ‘정상 인간’만이 접근 가능한 정보로 한정하는 오류를 자주 범한다.

흔히 기대하는 바와는 달리, 가까운 미래에 성취될 기술은 장애인들이 신체의 정상성을 회복하도록 돕는 것과는 다른 쪽에서 먼저 달성될지도 모르겠다. 많은 종류의 고통이 분명 치료를 필요로 하지만, 의학과 생체공학의 발전에는 속도 제약이 있고, 손상으로부터의 ‘완벽한 회복’이 가까운 미래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지금 이곳에 도착해 있는 기술은 대안을 제시한다. 이 기술들은 장애인이 세계를 변형된 방식으로 감각하게 하며, 신체 바깥의 확장된 도구를 가지고 살아가게 한다. 기술문명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그러하듯 말이다.

우리는 기술의 공생자이고, 생명과 기계의 혼종체이다. 피부에 직접 닿는 기계는 물론이고, 접촉되지 않은 기술들마저 우리의 인지와 감각, 삶의 방식에 폭넓게 영향을 미친다. 기계와 유기체, 인간과 비인간, 그 밖의 수많은 이분법을 해체하는 사이보그의 가능성이 이미 우리 손에 있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한 손에서 정상성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한다면, 사이보그 기술은 오직 정상성에 복무하는 방식으로만 수행될 터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떤 사이보그가 될 것이며, 어떤 사이보그가 되어야 하는가? 변형된 신체와 감각의 최전선에 있는 장애인 사이보그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기자명 김초엽 (SF 작가·〈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