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하나 바쳐서 민주주의를 찾는 데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었다면 삼형제 다 바친들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중략) 마산 시민 여러분이 보여주신 그 거룩한 뜻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내 자식 주열이는 신선이 되어 올라갔을 겁니다. 마산 시민 여러분, 이제 안심하십시오(1960년 5월8일 김주열 열사 어머니 권찬주 여사가 마산 시민에게 보낸 편지).”

1960년 3월15일 마산상고 신입생 김주열은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얼굴이 관통당한 채 사망했다. 경찰은 그의 사체를 쇠사슬로 묶은 뒤 돌을 매달아 몰래 마산 앞바다에 수장했다. 고향 남원에서 아들의 실종 소식을 들은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28일 동안 마산 시내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다. 경찰이 살해 유기한 김주열의 시신은 4월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올랐다. 이승만 정권의 만행이 밝혀지면서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애도의 물결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 사건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시사IN 조남진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숨진 김주열 열사의 동생 김길열씨.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자 권찬주 여사는 그해 5월8일 마산 시민들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권 여사는 이 편지에서 ‘민주주의를 찾는 데 조그만 도움이라도 된다면 삼형제를 다 바친들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썼다. 그 삼형제가 광열·주열·길열이다. 4월 혁명 유족 중에서도 상징적 대표로 활동했던 권 여사는 1989년 작고했다. 광열씨와 둘째 누나 경자씨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 현재 김주열 열사 형제자매 중 첫째 누나 영자씨와 막냇동생 길열씨(65)만 생존해 있다. 길열씨를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자택에서 만났다.

“어머니는 중학생 때부터 입버릇처럼 주열이 형의 죽음이 민주주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가르치셨다. 형이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사 행동거지를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전북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에서 1944년에 태어난 김주열은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친 뒤 외가가 있던 경남 마산상고로 진학한다. 그는 먼저 마산에 와서 지내고 있던 형(광열씨)을 따라 시내에 나갔다가 3월15일 저녁 수천명에 이르는 부정선거 규탄 시위대에 합류한다.

1960년 제4대 대통령·제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당인 자유당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갈수록 악화되는 고위층의 부정부패와 민생고로 민심은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에서 멀어졌다. 1959년부터 선거를 관리할 내무부는 물론 경찰과 정치깡패까지 동원된 광범한 부정선거가 조직된다. 최인규 내무부 장관은 일선 경찰서장을 연고지 중심으로 재배치하는 대대적 인사를 단행했다. 이어 전국 시·읍·면·동 단위로 공무원 친목회를 조직한다. 이 밖에도 내무부는 1959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전국 각급 기관장에게 다음과 같은 구체적 부정선거 방법을 극비리에 지시했다. 4할 사전투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한 조에 경찰 등 공무원 1인 반드시 투입), 완장 부대 활용, 야당 참관인 축출 등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의 득표율을 모두 85%까지 끌어올린다는 내용이었다.

이 와중에 야당인 민주당의 조병옥 대통령 후보가 선거가 코앞인 2월15일 지병으로 사망한다. 단독 후보가 된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문제는 부통령이었다. 대통령 유고 때 승계할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 자유당 후보가 장면 민주당 후보를 이길 가능성이 희박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80대 중반의 고령에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이라 정부와 자유당은 이기붕 후보의 당선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자행되었고 시민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 3∙15의거기념사업회 제공1960년 권찬주 여사(가운데)가 국회에서 아들 김주열 열사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권 여사는 4·19혁명을 알리기 위해 분투했다.

이승만 정권은 권 여사를 ‘빨갱이’로 매도

3월15일 저녁 마산 무학초등학교 앞에는 수천명이 규탄 시위를 벌였다. 이날 밤 마산 경찰은 규탄 시위 진압 과정에서 시위대에 발포해 2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했다. 당시 경찰에 쫓기던 무학초등학교 앞 시위대 속에서 김광열은 동생 김주열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큰형이 ‘주열아 도망쳐’라고 외쳤지만 그 뒤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밤새 작은형을 찾지 못한 광열이 형은 다음 날 주열이 형이 시위 도중 없어졌다고 남원 부모께 전보를 쳐서 어머니가 마산으로 가셨다.” 이때부터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경남 지역 방송과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아들의 실종 소식을 알렸다. 28일 동안 마산 시내를 뒤지면서 시민들의 손을 붙잡고 눈물로 호소했다. 마산 시청 앞 연못에 수장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연못물을 퍼낸 뒤 아들 이름을 부르며 진흙 속을 손으로 휘젓고 다니던 어머니 모습은 마산 시민들에게 아픔과 함께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머니의 애끓는 모정에 김주열은 어느새 ‘마산의 아들’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권 여사를 ‘빨갱이’로 매도했다. 김주열을 죽인 뒤 몰래 바다에 수장했던 마산 경찰이 색깔론 공세의 선봉장 노릇을 했다.

권 여사는 4월11일 아침 8시 남편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편지를 받고 고향 남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권 여사가 남원으로 향한 지 3시간 만인 4월11일 오전 11시30분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올랐다. 시민들은 김주열의 시신을 경찰에 앞서 인양해 마산도립병원에 안치했다. 그러자 경찰은 영안실을 지키는 시민들을 강제 진압하고 김주열의 시신을 빼돌려 남원으로 싣고 갔다. “경찰이 어머니를 마산으로 다시 못 가게 막고 주열이 형 시신을 밤에 몰래 남원으로 싣고 오자 어머니는 ‘고향에서는 받을 수 없다. 부정선거로 당선된 이기붕이 집 앞에 갖다 묻어라’ 하고 고함을 쳤답니다.” 김주열의 시신은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고향 뒷산에 묻혔다.

마산이 들끓었다. ‘김주열을 살려내라’ ‘김주열을 살해한 범인을 처단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민 3만여 명이 시위에 나섰다. 이 시위는 들불처럼 번져나가 마침내 서울에서 4·19혁명으로 폭발한다. 10대 소년의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을 포착한 김주열 보도사진이 전 세계에 타전되면서 국제 여론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밝혀진 바에 따르면, 김주열은 3월15일 밤 7시부터 10시까지 벌어진 마산 무학초등학교 앞 시위대 속에 있다가 경찰이 얼굴에 직접 대고 쏜 직격 최루탄을 맞았다. 그의 시신을 유기한 장본인은 일제강점기에 헌병보조를 지냈던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였다. 박종표는 최루탄 발사와 시신 유기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나중에 시신 유기만 인정되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지휘책임자인 마산경찰서 손석래 서장은 사건 후 장기간 잠적했다가 도피 8년 만인 1968년 체포되었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그를 보석으로 석방했다.

4·19혁명 뒤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고 민주주의가 도래하는 듯했다. 이듬해 5·16쿠데타로 김주열 열사와 3·15의거, 4·19혁명은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난다. ‘김주열 추모곡’이 금지곡으로 지정당한 게 가장 상징적이다. 4·19혁명이 성공한 뒤 그해 5월 ‘남원 땅에 잠들었네’라는 김주열 추모곡이 라디오 전파를 탔다. 하지만 1961년 5·16쿠데타 세력은 이 곡을 금지하고 음반도 없애버렸다. “주열이 형 사건 뒤 우리 가족은 오랫동안 빨갱이로 몰려 적잖은 고초를 겪었다.” 김주열의 아버지는 아들이 사망한 뒤 화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1965년 작고했다.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박정희 정권 들어 경찰 감시가 심해지자 고향 남원을 떠나 자식들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다. 김길열씨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였다. “서울 현저동에서 어머니가 하숙을 쳐서 우리를 가르쳤다.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전두환 정권까지 경찰이 우리 가족을 상시 감시했다. 감시를 피해보려고 연희동으로 이사 갔지만 소용없었다.” 유족에 대한 경찰 감시는 1987년 6월항쟁 이후에야 멈추었다.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1989년 작고하기 전까지 경찰 감시 속에서도 해마다 수유리 국립4·19민주묘지를 찾았다. 4·19혁명의 상징적인 역할을 다했다. 1989년 권 여사가 작고한 뒤 주변에서 유족을 찾는 발걸음도 뚝 끊겼다. 4·19 희생자들 대부분이 학생이라 직계 후손은 없고 부모가 연로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3·15의거는 국가기념일이 되었지만···

1990년대 이후 김주열 열사를 재조명하고 기리는 움직임이 시작된 게 유족에게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1995년 김 열사의 모교인 용마고(마산상고 후신)에서는 3·15의거 35년 만에 김 열사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1999년에는 마산상고 입학 동기들이 주축이 돼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를 꾸린 뒤 ‘민주시민 항쟁정신’을 주제로 한 다양한 추모행사를 이어왔다. 2008년에는 용마고 교정에 김주열 열사 흉상 및 조형물을 제막했다. 해마다 3월14일에는 남원에서 김주열 열사 추모식이 열리고, 시신이 떠오른 4월11일에는 마산에서 추모제가 열린다. 3·15의거 및 4·19혁명 50주년이던 2010년에는 동문들이 모여 김주열 열사 국민장을 거행했다. “현재 주열이 형 묘는 3개입니다. 경찰이 강제로 싣고 와서 묻은 고향의 묘와 마산 국립3·15민주묘지에 있는 가묘, 그리고 서울 국립4·19민주묘역에 있는 가묘입니다.” 추모사업회에서는 김주열 열사를 ‘살아서는 남원의 아들, 죽어서는 마산의 아들, 4월 혁명을 통해서는 부활한 국민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들은 5·16쿠데타 세력이 금지곡으로 지정해 말살해버린 김주열 추모곡 ‘남원 땅에 잠들었네’를 40여 년 만에 가사를 찾아내 부활시켰다.

정부 차원에서는 김주열 열사를 비롯한 민주화 유공자에 대한 예우가 상대적으로 빈약한 편이다. 3·15의거는 2010년 3월에야 국무회의 의결에 따라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희생 당시 주로 학생 신분이라 직계 후손이 없었던 3·15의거 및 4·19혁명 희생자들의 경우 거의 형제자매 유족만이 남아 있다. 독립운동 유공자와 달리 민주화 유공자의 형제자매 등은 보훈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김길열씨는 “주열 형님이 가신 지 58년 만인 지난해 4·19 행사 때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처음으로 유가족 대표로 초청장을 받고 감격스러웠다”라고 말했다. 그는 3·15의거와 4·19혁명 희생자의 경우 민주화 유공자 선양을 위해 형제자매도 보훈 대상에 포함하는 전향적 조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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