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은 글을 쓰기 위해 마련했다. 출판을 염두에 두고 에세이를 쓰고 있는데 쉽지는 않다. ‘매일 조금씩 쓰자’는 다짐이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지 알게 됐다. 작업실은 주로 공부방이 된다. 촬영이 없는 날에는 기타도 배우고, 영어도 배우고, 요리도 배운다. “채식 요리를 배워요. 살아야 하니까.” 임씨는 채식주의자다. 그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비건’이다. 남들보다 체력을 회복하는 데 오래 걸려, 3년 전 대대적인 건강검진을 받은 게 계기였다. 우유·치즈·달걀 등에 포함된 동물성 단백질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건강상의 이유로 채식을 시작했지만 환경과 동물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해왔다. 일회용 컵 대신 되도록 텀블러를 쓰는 식이다. 임씨와 친구들은 비정기적으로 플리마켓을 열어 수익금으로 길고양이 사료를 후원하기도 한다.
연차가 쌓이는 동안 삶을 대하는 태도만큼이나 영화를 대하는 태도에도 변화가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미쟝센 단편영화제, 대단한 단편영화제, 제천국제영화음악제 등 크고 작은 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다. “한국에서 이렇게 다양하고 훌륭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구나, 이런 다양성이 한국 영화의 힘이었는데 싶더라고요.” 상업 영화에서 주로 활동하는 자신 같은 배우가 독립 영화나 저예산 영화와 협업해 영화가 더 많은 대중을 만날 수 있다면 어떨까. 한국 영화 시장이 좀 더 풍성해질 것 같았다. 흥미롭고 좋은 작품이 있다면 개런티가 적다고 해서 피하지 않았다. “뭐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작품하는 동안 내가 행복했으니까. 물론 ‘돈 따위!’라고 생각하면서도 울고(웃음).”
필모그래피에 쌓여가는 독립 영화
그렇게 필모그래피에 독립 영화 혹은 저예산 영화가 쌓였다. 임씨가 주연을 맡아 4월19일 개봉하는 〈당신의 부탁〉 역시 순제작비 7억원의 저예산 영화다. 이른바 대작에서는 볼 수 없고, 투자받기도 어려웠을 여성을 앞세운 작품이다. 이상희·서신애·오미연 등 조연 배우도 대부분 여성이다. 임씨는 〈당신의 부탁〉 시나리오를 처음 읽고 나서 감탄했다. “이야기에 흐르는 결이나 정서가 마음에 들었어요. 대사도 어쩜 이렇게 섬세하고 현실적일까, 궁금해서 감독님을 만났는데 처음 만난 사람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잘 통했어요.” 언감생심 캐스팅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이동은 감독은 임씨가 ‘효진’ 역을 선뜻 수락하자 적잖이 놀랐다고 말했다.
이 납득하기 어려운 설정을 시나리오가 탄탄하게 풀어냈다면 (〈당신의 부탁〉은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 당선작이다), 임씨는 단단한 연기로 돌파하며 관객을 설득해낸다. “이미 가족의 형태가 많이 변했잖아요. 현실에서는 이른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깨지고 있는데 부모라는 존재,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나 법은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으니까. 꼭 혈연으로 맺어져야만 가족일까요. 〈당신의 부탁〉 같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목표랄까 이유는 그런 편견들이 조금씩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 아닐까요.”
〈당신의 부탁〉에서 임씨는 다크서클이나 뾰루지 같은 것들, 때론 칙칙하고 푸석한 얼굴을 부러 숨기지 않았다. ‘효진다움’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다. “보통 여성 배우들이 촬영하다 얼굴이 좋지 않다 싶으면 조명을 바꾼다든가, 스케줄 조정을 하거든요. 근데 그냥 찍었어요. 감독님이 걱정하는데도 ‘괜찮아요’ 하면서.”
임씨는 나이를 먹는 일이 나쁘지 않다. 그러면서 여성 배우는 ‘어떠해야 한다’라는 대중의 간섭으로부터도 한결 자유로워졌다. 2016년 SNS를 개설했을 때 올린 자신의 맨얼굴 사진을 두고 오간 누리꾼의 인신공격에도 의연할 수 있었던 이유다. 당시 임씨는 “평소 저는 제 나이를 정확하게 인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의 저를 인정하고 사랑합니다. 제 생의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의 나’, 30대 여성으로서의 제 삶과 제 모습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런 모습입니다”라는 글과 함께 다시 한번 맨얼굴 사진을 올렸다.
최근 임씨가 공들여 즐겁게 하는 일 중 하나는 〈씨네21〉 김혜리 기자, SBS 최다은 PD와 함께 1년 넘게 만들고 있는 팟캐스트 〈필름클럽〉 진행이다. “배우를 이렇게 오래 했는데도 아직도 많은 사람 앞에 서거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면 진땀 나고 가슴이 콩닥거려요. 너무 힘들어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소소하게 하는 활동이 저한테 좀 더 맞는 거 같아요. 녹음 준비하면서 다양한 개봉 영화를 접하는 것도 연기에 큰 공부가 되고요.” 팟캐스트를 언제까지 할지 끝을 정해두지는 않았다. 즐겁게, 할 수 있을 때까지 하자 정도가 전부다. 청취자들이 보내는 3000원, 5000원 정도 간헐적으로 들어오는 후원금 외에 따로 제작비 등을 투자받지 않는 환경이 주는 자유로움이 있다.
그 덕분에 언론 시사회에 몰래 ‘출몰’하기도 한다. 기자들 틈에 섞여 영화를 보면서 언론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졌다. “배우 입장에서 보면 언론 시사회 관객 반응이 제일 나쁘거든요. 잘 웃지도 않고. 그런데 제가 하루가 멀다 하고 몇 편씩 영화를 보고 있으니까, 그 피로감이랄까. 무반응이 너무 잘 이해가 되더라고요(웃음).” 〈당신의 부탁〉 언론 시사회에서 웃음소리가 들렸을 때 임씨는 ‘대박, 이건 정말 큰 반응이야!’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크게 환호했다고 했다.
마흔 이후를 상상하는 배우의 삶
검토하고 있는 차기작은 아직 없다. 소속사와 전속 계약도 끝났다. 〈당신의 부탁〉 홍보 활동이 끝나고 나면 거취를 천천히 생각해보려 한다. 지난해 출연했던 tvN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의 시청률은 좋지 않았지만 예전과 달리 드라마도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어졌다. 사전 제작 혹은 반 사전 제작 시스템이 어느 정도 정착된 상태라 연기에 집중할 시간이 확보된다는 점이 드라마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줬다. “그리고 제가 정말 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상업 영화에서 좋은 역할을 맡아서 몇 년 안에 ‘천만 배우’ 해보고 싶어요. 그래야 또 제가 하고 싶은 독립 영화나 저예산 영화를 좀 더 힘 있게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간절해요. 천만이여, 나에게 오라!(웃음)”
20대의 임수정은 마흔 이후 배우의 삶을 상상하지 못했다. 2008년 〈GQ〉와의 인터뷰에서 “연기는 마흔 정도까지 할 수 있지 않을까. 더 할 수 있을지는 그때 판단해보려 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2018년 40대를 목전에 둔 임수정은 더 해보고 싶은 연기가, ‘여성 배우’로서 자신이 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임씨가 맡고 싶은 좋은 역할은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끌고 나가는 캐릭터이고, 그런 작품으로 승부를 보고 싶다. 그렇게 해서 영향력을 갖게 된다면 한국 영화의 다양성을 위해 ‘선하게’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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