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으나 이렇게 빨리 와버렸다. 가을이다. 언제 그 볕과 더위가 있었냐는 듯 아침저녁으로 날이 제법 선선하다. 가을볕이 따갑다고는 하나 아직 무르익지 않은 탓에 초가을 볕은 여름의 것과는 다르게 몸소 느껴볼 만하다.
어제 저녁에는 적적하여 걷다가 어슴푸레하게 불 밝힌 양옥집 창문을 가만, 보았다. 보았다기보다는 들었다고 하는 편이 더 맞겠다. 창문을 넘어 아마도 도자기 그릇에 쇠젓가락이나 숟가락 따위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 그 소리가 그렇게 먼 곳까지 들렸을까, 싶겠지만 들렸다. 저녁 밥상 소리는, 가족이 둘러앉아 분주하게 수저를 움직이는 소리는 그렇게 멀리까지 들린다. 혼자 앉아 밥 먹는 소리가 가까이 있어도 잘 들리지 않는 것과는 다르게. 처서와 백로 사이에 가벼운 바람을 맞으며 걷다가 듣게 되는 소리는 참 다른 가을 소리였다.
계절마다 들리는 소리가 다르다. 들으려고 하는 소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계절이 시작되고 계절이 무르익고 계절이 끝나는 걸 알려주는 소리를 떠올려본다.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손쉬운 소리는 귀뚜라미 울음이다. 귀뚜라미 울음이 어느 밤에 들려오면 몸이 계절을 기억하는 양 따뜻한 차 한잔을 내려 마시게 되고 라디오 볼륨을 조금 낮추게 된다. 어릴 적에는 한 살 터울의 누나와 함께 밍크이불 같은 걸 깔고 엎드려 〈인어공주를 위하여〉나 〈호텔 아프리카〉를 읽는 것으로 가을밤을 시작하기도 했다. 사이좋은 남매가 순정만화의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소리는 한밤 단골 분식집으로 대접을 들고 가서 쫄면을 받아와 먹던 소리와는 분명 다른 계절의 소리였다.
그러나 가을이 무르익으면 들리는 소리도 역시 먹는 소리다. 삶거나 끓이거나 굽는 소리. 멸치로 낸 육수에 국수 삶는 소리는 냄새보다 먼저 그윽하고, 꽁치가 기름에 지글지글 구워지는 소리는 입에 침이 고이는 소리이며, 가을 전어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생선살 한 점이 눈앞에 어른어른한다. 알밤이 익어 터지는 소리나 지붕으로 과실이 떨어지는 소리는 또 어떤가. 야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듣는 ‘015B’의 목소리는 절로 ‘혼술’을 부르는 소리.
그렇게 듣다 보면 어느새 계절은 다 가고. 가을의 끝에서만은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리고, 듣고 싶어진다. 지금도 여전히 ‘가을은 독서의 계절’ ‘가을은 사색의 계절’인지는 모르겠다. 이제 누가 종이책 같은 걸 들고 다니며 읽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어딘가 한 사람쯤은 가을에 한 권의 책에서 지혜를 찾고 삶을 잠시 관조해보기도 할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가을에는 몸이 먼저 여름의 생동이 저만치 물러서고 있음을 알고 반응하니까.
그곳에서 편히 쉬시길…
어쩌다 보니 연락이 끊긴 사람에게 타전하고 싶거나, 평일 하루쯤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극장을 찾거나, 카페를 찾거나 산을 찾거나 바다를 찾아가려는 심사. 괜히 이면지 한쪽에 손글씨를 적어보거나 서랍 속에 잘 감춰두었던 전 애인의 편지를 꺼내 읽고, 싸이월드 사진첩에 들어가 ‘흑역사’에 젖는 청승. 모두 다 저물어가는 것의 영향 아래 있어서다. 그럴 때 책은 꽤 실용적이고 친근하며 때때로 위대해 보인다. 가령, 이런 문장은 가을에 읽으면 달다.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 거야?/ 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 시가 불이야?/ 나한테는 등불이었으니까./ 아빠는 그래도 어두웠잖아?// 등불이 자꾸 꺼졌지./ 아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보여?/ 등불이 있으니까./ 그래도 멀어서 안 보이는데?/ 등불이 있으니까(마종기 시인의 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중에서).”
그리고 가을에는 부고(訃告)가 온다. 짝꿍이 말했다. “살아서 조동진 공연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니….” 그 말을 듣고 나는 친구와 함께 턴테이블에 조동진
LP를 얹어두고 술잔을 나누던 기억을 떠올렸다. 나는 조동진의 ‘당신은 기억하는지’를 듣기 좋아했다. ‘그곳에서 편히 쉬시길.’ 가을에는 읽던 책 귀퉁이에 이런 문장을 적고 혼잣말로 여러 번 읽게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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