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던 검사가 세 시간을 넘겼다. 위경련 때문에 찾은 병원에서 검사 목록을 계속 추가했다. 배급사 리틀빅픽처스의 전 대표이자 영화제작사 삼거리픽처스를 운영하는 엄용훈 대표(50)를 만났다. 요즘 트위터 속 그의 프로필은 ‘대기업과 전쟁 중’으로 되어 있다. 투자 한 푼이 아쉬운 제작자로서는 위험 수위의 공언이다. 최근의 잦은 위경련과도 관련이 있다.

삼거리픽처스가 제작해 지난해 말 개봉한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미국 작가 바버라 오코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집 없이 차에 사는 아이가 부동산의 ‘평당 500만원’이라는 전단을 보고 평당에 있는 집을 사기 위해 사례금을 노리고 개를 훔친다는 이야기다. 205개 스크린이 개봉 2주 만에 10개 관으로 축소됐다. 같은 달 개봉한 〈국제시장〉은 931개 관에 걸렸다. 꺼져가던 불씨는 배우를 비롯한 유명 인사들의 대관 릴레이가 이어지면서 주목을 받았다. ‘스크린 독과점’ 이슈가 불거졌다. 제작사는 2월12일 재개봉을 선언했다. 연휴에 54개까지 개봉관이 늘었고 2월25일 현재 53개 스크린을 확보 중이다. 엄 대표는 “처음 개봉할 때는 설렘 같은 게 있었는데 재개봉 때는 두려움이 더 많았다. 더 참담해질 수도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우려대로 성적이 신통치 않다. 누적 관객수 약 30만명(2월25일 기준)이다. 설 연휴가 가시방석이었다.

ⓒ시사IN 이명익엄용훈씨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흥행 부진에 책임을 지고 배급사 대표 자리에서 사퇴했다.

엄용훈 대표는 1월14일 흥행 부진의 책임을 지고 배급사 리틀빅픽처스 대표 자리에서 사퇴했다. 오로지 제작사 대표로서 극장 측의 불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했다. 극장은 스크린 확보의 근거로 예매율과 좌석점유율을 들었다. 엄 대표는 극장을 가진 대기업이 자사 계열 배급 영화에는 예매 오픈 시기를 2주 전으로 잡으면서 중소 배급사 영화의 경우 개봉이 임박해서야 열어준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예매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조조 및 심야 시간대 중심으로 배정해 좌석 점유율도 덩달아 떨어졌다.

‘정직한 영화’를 철학으로 내세우는 삼거리픽처스는 2008년에 설립돼 〈도가니〉 〈러브픽션〉 등의 상업영화를 만들었다. 한 영화평론가는 “이번 문제의 핵심은 ‘공익’이 아니라 ‘공정’의 문제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그동안 ‘대기업이 작은 영화나 다양성 영화를 배려하지 않는다’ 이런 비판이 있었다면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상업영화다. 상업성이 떨어지는 영화라서가 아니라 자기네 영화가 아니라 차별하는 대기업 배급사와 극장의 못된 관행을 보여준 경우다”라고 말했다. 극장 측도 할 말은 있다. 자사 계열의 영화라도 인기가 없으면 내린다는 것. 제작사 측은 ‘관객이 원하는’ 정도를 측정하는 지표 자체가 애초에 공정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의 대기업에 대한 55억원 과징금 조치에서도 확인된다. 공정위에 따르면 CGV와 롯데시네마는 각각 〈R2B리턴투베이스〉(배급 CJ E&M), 〈돈의 맛〉(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에 관례보다 많은 스크린을 내줬다. CGV는 〈광해〉(배급 CJ E&M)의 좌석 점유율이 경쟁 영화와 비교해 떨어졌음에도 종영하거나 스크린 수를 줄이지 않고 넉 달간 연장 상영했다. 흥행성 지표와 상관없이 밀어주기를 한 사례다. 작품의 운명을 결정짓는 가장 큰 변수는 작품 자체지만 이 못지않게 중요한 게 극장의 스크린 수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위)은 재개봉까지 이어졌지만 흥행 성적이 신통치 않았다.

영화 매출 2조원 시대의 그림자

배급 역시 투자를 겸하는 4대 배급사(롯데·CJ·쇼박스·NEW)가 한국 영화 시장점유율의 90%를 차지한다. 엄 대표는 “지금은 투자배급사가 너무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과거 제작사가 하던 기획개발, 제작 기능을 가져갔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감독, 배우, 아이템 선정 등에 다 관여한다”라고 말했다.

독과점에 대한 반발로 2013년에는 한국영화제작가협회와 영화제작사 리얼라이즈픽처스, 명필름, 삼거리픽처스, 영화사 청어람 등 10개 회사가 뭉쳐 배급사 리틀빅픽처스를 만들었다. 제작자들은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시위나 성명보다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모범적인 배급회사를 스스로 만들기로 했다. 일단 배급수수료를 대형 배급사에 비해 낮췄다. 투자배급 계약 시 영화와 관련된 모든 권리가 배급사로 넘어가는 게 관례인데, 리틀빅픽처스는 5년 뒤 판권을 돌려주기로 했다. 마케팅 비용도 투명하게 공개한다. 그간 〈소녀 괴담〉 〈카트〉 〈네 심장을 쏴라〉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을 배급했다. 아직까지는 성적이 썩 좋지 않다. 올해는 임권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 김훈 소설 원작의 〈화장〉을 시작으로 〈고녀석 맛나겠다 2〉 〈마돈나〉 〈오피스〉 〈산다〉 등 영화 다섯 편을 배급할 예정이다.

엄용훈 대표는 한국 영화산업이 늘 ‘독과점과의 싸움의 역사’였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할리우드 영화의 독과점과 싸웠고, 그 뒤에는 대기업 중심의 자본 독과점과 싸웠으며, 그다음에는 거기서 파생된 스크린 독과점과의 싸움이었다. “퀄리티가 떨어지는 건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는데 자본과 스크린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경쟁자와의 싸움이 아니라 구조와의 싸움이 되어버린 거다.” 어려운 싸움인 이유다.

리틀빅픽처스가 배급하는 개봉 예정작 <화장>.

국내 대기업은 상영-배급-투자로 이어지는 수직계열화 전략을 취하고 있다. 게다가 다양한 영화를 공급하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멀티플렉스’ 시스템이 ‘와이드 릴리즈(한꺼번에 많은 스크린에서 개봉하는)’ 방식과 맞물려 짧은 시간에 성과를 내야 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영화인들은 영화가 산업의 규모로 성장하는 데 기여한 대기업의 공을 인정하지만 독과점의 폐해 역시 자주 현장에서 목격한다. 엄용훈 대표는 “나라 경제도 그렇고 사람 몸도 그렇고 허리가 튼튼해야 건강한 건데, ‘중박 영화’가 사라졌다. 〈도가니〉(470만 관객) 같은 영화가 없어지고 있다. 중박 영화는 관객의 힘이 만드는 결과이고 대박 영화는 관객의 힘과 극장의 힘이 합쳐진 결과다”라고 말했다. 영화 매출 2조원 시대의 그림자다. 엄 대표를 비롯한 영화인들이 배급과 상영의 겸업 금지를 법제화하자고 주장하는 이유다.

얼마 전 엄용훈 대표의 첫째 딸이 방송영화제작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축하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영화다. 영화쟁이로서 가족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극중 아빠가 집을 떠나면서 고생길에 들어선 엄마와 아이들이 본인의 가족처럼 느껴졌다. 월세방을 전전할 당시 아내가 친척에게 빌린 돈으로 이 영화의 판권을 샀다. 영화를 통해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빚까지 지게 됐다. 영화판에 발을 들인 지 10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활동이라 이번에 성공했다고 다음을 보장할 수 없다. 바꿔 말하면 이번에 실패했다고 다음에도 실패하는 게 아니라는 데 희망을 걸밖에.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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