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공간에서 테러 단체 서청의 이름을 각인시킨 계기는 제주 4·3사건(사진)이었다. 2003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위원장 고건 국무총리)가 펴낸 진상조사 보고서를 보면, 이승만은 ‘신뢰할 수 있는 토벌대’로 서북청년회를 지목했다. 미군도 군 병력 대부분을 서북청년회 단원으로 충원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4·3사건 직전 제주도에 입도한 서청 단원은 500~700명이다. 4·3사건 발발 직후에는 500명, 1948년 말에는 1000명 이상이 제주도에 파견됐다. 1948년 11월9일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이 서청의 고문을 받다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제주도 서청의 김재능 단장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금품 갈취와 고문은 물론 살인과 부녀자 능욕을 일삼았다고 보고서는 썼다.
서청 출신 이윤도 경찰은 이른바 ‘도피자 가족’을 지서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했다.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다. 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다.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위에서 바동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다. 당시 경찰특공대로 활동했던 고치돈의 증언이다.
‘정 주임’으로 불린 서청 출신 경찰 정용철의 악명도 높다. “하루에 한 명 이상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며 사람을 죽여야 밥을 먹던 사람이었다” “남편이 입산했다는 이유로 끌려온 임신부의 옷을 벗겨 난롯불로 달군 총구를 몸 아래 속으로 찔러넣은 뒤 머리에 휘발유를 뿌려 태워 죽였다. 우리에게 시신 위로 흙을 덮으라고 했는데 아직 덜 죽어 있던 상태라 흙이 들썩들썩했다” 등 잔혹한 증언이 이어진다.
제주 4·3사건 희생자는 2만5000명에서 3만명으로 추정된다. 신고된 희생자 수만 1만4028명이다. 이 중 10세 이하 어린이 814명(5.8%)과 61세 이상 노인 860명(6.1%)이 전체 희생자의 11.9%다. 여성의 희생도 2985명(21.3%)으로 컸다. 서북청년단은 1948년 12월19일 대한청년단으로 흡수 통합되면서 해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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