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2008년, 시중은행들은 중소 수출업체들에게 환율 관련 신용 파생상품인 키코(Knock-In Knock-Out)를 집중적으로 판매했다. 키코는 은행과 중소기업이 달러화를 일정한 가격에 의무적으로 사고파는 거래다. 한 예로, 키코 계약을 체결한 수출기업은 환율이 달러당 900~940원인 경우 100만 달러(계약 금액)를 9억4000만원(달러당 940원)으로 은행에 팔 수 있었다. 환율이 900원인 경우에는 수출기업이 4000만원 정도의 이익을 보는 셈이다. 수출기업 처지에서는 달러화 가치가 내려갈수록 이익을 볼 수 있는 계약이다. 그러나 1달러가 900원 이하로 떨어지면 이 계약은 소멸된다.

ⓒ연합뉴스새정연 의원들이 4월8일 키코 사건 재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반대로 환율이 달러당 960원 이상으로 올라가면, 기업은 계약금액인 100만 달러의 두 배인 200만 달러를 달러당 940원으로 은행에 인도해야 한다. 즉 기업은 달러당 960원으로 200만 달러(19억2000만원)를 매입한 뒤 달러당 940원(18억8000만원)으로 은행에 팔아야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수출기업에는 4000만원의 손실이 발생한다. 더욱이 키코에서는 환율이 오르는 경우에는 계약이 소멸되지 않았다. 달러당 1000원인 경우 기업의 손실은 1억2000만원, 1500원인 경우에는 11억2000만원까지 치솟는다. 결국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즈음에 달러화 가치가 폭등하면서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키코 계약 때문에 줄도산했다.

이후 관련 재판에서 상당수의 수출기업들은 은행 측이 키코의 위험성을 잘 알려주지도 않은 채 감언이설로 계약 체결을 유도했다고 주장했다. 판매업체가 상품을 소비자에게 팔면서 그 결함을 숨겼다면 이는 명백한 불공정 거래다. 더욱이 은행들은 키코가 기업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2007~2008년 당시 은행들은 키코를 ‘제로 코스트(기업 측이 수수료를 낼 필요 없는) 상품’ 혹은 ‘우수 고객에 대한 특별 서비스’라고 선전했다.

ⓒ시사IN 이명익대책위가 검찰에 요구한 수사보고서는 1년6개월 만에야 받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2013년 9월2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은행들의 손을 들어줬다. 키코로 피해를 본 중소기업들이 우리·씨티·신한·SC은행을 상대로 낸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에서 “키코는 환헤지(환율 변동이라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금융상품) 목적에 부합한 상품으로 불공정 계약이 아니다”라고 판결한 것이다. 은행들은 환영했고, 기업들은 반발했다.

그런데 지난 3월 중순,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가 키코 사태와 관련된 검찰의 수사보고서를 입수했다. ‘SC은행 직원들 간 통화 내역이 담긴 이 보고서를 보면 키코가 불공정 상품이 아니라는 은행 측 주장의 허구성이 명백히 드러난다’고 대책위 측은 주장한다.

보고서의 존재를 알린 결정적 힌트는 2012년 10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나온 박선종 박사의 증언이었다. 당시 박선종 박사는 “(검사로부터 조언을 요청받아 관련 내용을 살펴보다가) 본점 직원과 지점 직원 간 통화 내용이 요약된 수사보고서를 봤다. ‘키코 가입 계약자들을 일본으로 초대해 골프 접대를 해야 하는데, 절대로 우리가 돈이 많이 남는다는 것을 알게 하면 안 된다’ 등의 내용이 보고서에 있었다”라고 증언했다.

ⓒ연합뉴스2010년 키코대책위 회원들은 우량 수출 중소기업에 수여하는 ‘수출의 탑’을 반납하며 반발했다.

2012년 11월, 대책위는 곧바로 박선종 박사가 언급한 보고서 확보에 나섰다. 하지만 검찰은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정보 공개를 거부했다. 대책위는 이후 1년6개월에 걸친 행정소송 끝에 지난 3월 가까스로 보고서를 입수할 수 있었다.

4월15일 대책위 정정식 사무총장, 김화랑 사무차장을 만나 보고서의 내용을 함께 들여다봤다. 다음은 보고서의 내용과 의의를 문답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수사보고서를 얻는 데 1년6개월이나 걸렸다.

보고서 내용은 전체적으로 은행 직원들이 서로 통화한 내용이다. 그래서 검찰은 은행 직원들의 사생활을 보호한다면서 정보공개 청구를 거절했다. 결국 행정소송을 냈고 1심, 2심, 3심 모두 ‘검찰이 공개하는 게 맞다’며 피해 기업들 손을 들어주는 결과가 나왔다. 검찰은 대법원의 결정이 나온 다음에야 보고서를 공개했다. 검찰은 보고서가 불러올 파장이 두려워 끝까지 숨기려 했던 것 같다.

ⓒ연합뉴스2008년 ‘환헤지 피해대책 마련을 위한 공청회’에서 키코 피해 기업인들이 ‘키코 아웃’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며 항의하고 있다.
수사보고서의 개요부터 설명해달라.

2010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금융조세조사2부 박성재 검사실의 주사보 1명과 서기보 1명이 SC은행(옛 제일은행) 직원들 간의 통화 내역을 청취해 분석한 결과물이다. 청취 방법에 대해선 ‘녹음 시스템상 키코 계약 내용을 특정할 수 없는 관계로 1200통화 중 초기 녹음 약 10초 정도만을 들어서 키코 계약 관련 내용에 해당하는 것만 청취함’이라고 나와 있다.

보고서 내용은 크게 △상품 구조 및 제로 코스트(zero cost) △선물환 등과의 비교 △마진 △계약 전후 통상적 접대 등의 항목으로 정리됐다. 각 항목에는 은행 직원의 눈에 띄는 발언과 그에 관한 의견이 첨부되어 있다. 모든 항목이 경악스럽기 그지없다. 심지어 은행 내부에서도 거짓말이 횡행했다. 예컨대 딜러는 다른 직원(심사역)에게 수출보험공사의 환헤지 서비스가 은행의 관련 상품보다 기업에 불리하다고 노골적인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검찰 수사관은 보고서에 ‘딜러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대답을 했다’고 의견을 밝히고 있다.

제로 코스트는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 ‘수수료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보고서에 포함된 녹취록을 보면, 제일은행 본점 직원이 지점 직원에게 ‘초기 평가값이 제로임을 (중소기업 고객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지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은행 측의 수수료가 ‘제로’가 아닌데도 ‘제로’인 것처럼 보이게 숫자로 장난을 치라는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기업들과 은행이 체결한 계약서를 보면, 실제로 ‘수수료:제로코스트(zero cost)’라고 적혀 있다. 당시 기업들은 ‘수수료도 없는데 은행이 왜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냐’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은행 측은 ‘환전 수수료로 먹고산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결국 제로 코스트와 관련해 은행이 ‘수수료가 없다’며 기업을 속인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재판부는 은행이 챙긴 수수료가 많았는지 적었는지만 따졌을 뿐, 수수료를 챙긴 행위 자체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하지 않고 넘어갔다.

보고서의 세 번째 항목은 ‘마진’이다. 이 항목에서는 무엇을 알 수 있나?

이 항목에 소개된 은행 직원 간의 대화부터 보자. 2008년 1월3일께 지점 직원이 ‘D기업 관련해 마진을 높이고 싶다’고 말하자 본점 직원이 ‘마진 이빠이(충분히) 해서 11만 달러 이상 나온다’고 대답한다. 은행 직원들이 마진을 말 그대로 ‘이빠이’ 먹고 신이 난 모습이 드러났다.
은행은 키코에 대해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을 피하기 위한 환헤지 파생상품’이라고 설명했다. 이 설명대로라면 은행은 키코에 가입하는 기업의 수출입 규모부터 파악하고 그에 맞게 약정금액을 산정했어야 했다. 그런데 보고서에 드러난 대화들을 보면 오히려 반대다. 자신들이 챙길 마진을 미리 정해놓고 이에 맞게 기업을 키코에 가입시킨 것이다.


은행이 상품을 판매해 마진을 남기는 것 자체가 그른 일은 아니지 않나?

2007~2008년만 해도 은행과 기업과의 관계가 지금과 달랐다. 거의 공생관계였다. 증권회사에서도 키코와 비슷한 상품이 있었지만 기업들이 거들떠도 안 봤다. 하지만 은행에겐 ‘설마 은행이 우리를 망하게 하겠느냐’와 같은 믿음이 있었다. 환변동보험(환헤지 상품)에 가입해서 망한 기업들 전례도 없고, 저축은행 사태도 일어나기 전이고, 다들 그냥 은행을 믿었다.

이 보고서는 검찰이 은행을 ‘사기’ 혐의로 조사할 당시 작성됐다. 대책위는 이 보고서에 은행이 사기 행각을 벌인 증거들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인가?

보고서를 통해 드러난 은행의 사기 행각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은행은 키코가 위험한 상품인 줄 알면서도 이를 기업에 숨기고 적극적으로 판매했다. 녹취록에 따르면, 2008년 1월8일 제일은행의 한 직원은 다른 직원에게 “옵션 상품이 이렇게 위험한 상품이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라고 말한다. 둘째, 수수료가 없다는 설명도 명백한 사기다. 셋째, 은행은 선물환보다 키코가 훨씬 더 많은 이익을 남긴다고 판단하고 전략적으로 키코를 판매했다. 넷째, 환율 관련 금융상품의 특성상 기간이 긴 계약은 기업에 불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은행의 잇속을 채우기 위해 일부러 장기 계약을 유도했다. “씨티은행이 3년짜리 계약으로 많이 꼬시고 있다”라는 등의 녹취록이 그 증거다. 다섯째, 키코 계약 전후로 기업에 행해진 접대를 보면 은행이 얼마나 키코 상품을 의욕적으로 팔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동안 은행은 기업이 원해서 키코 상품을 만들어 판매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은행이 마진을 무지 많이 남기는 것으로 순박한 사람들한테 비춰지면 오히려 디마케팅이 된다(마케팅을 망친다)”는 등의 증언은 은행의 주장을 무색하게 만든다.

향후 계획은 무엇인가?

지난해 9월 이미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이 보고서에 드러난 혐의점들만이라도 철저히 조사됐더라면 지난해 9월과 같은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점이 너무 아쉽다.
또 이 수사보고서를 작성했던 박 아무개 검사는 수사 도중 갑자기 전보 조치되었다. 수사 의지가 강했던 박 검사가 왜 갑자기 전보 조치됐는지에 대한 경위도 밝혀져야 한다.
게다가 이번 자료는 원본이 아닌 요약본이다. 은행도 SC은행에 한정됐다. 그러므로 은행에 대한 전체 수사 기록을 보면 키코 사태의 진실에 제대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대책위는 검찰에 키코 사건 수사 기록 전부를 공개할 것을 요구할 예정이다. 키코 사태의 진실 규명을 위한 재수사와 금융 당국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 또한 촉구할 계획이다.

기자명 허은선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les@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