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쟁에서 돌아온 아들이 변사체로 발견된다. 아들이 왜 죽었는지 아버지는 알고 싶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산 자들이 말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들의 동료들, 동료의 상관들, 그 상관의 동료들까지 모두 말을 아낀다. 결국 진실을 밝히는 일은 아버지 몫이 되었다. 2003년 미국의 어느 아버지가 겪은 이 실제 사건을 2007년 할리우드가 영화로 만들었다. 〈엘라의 계곡〉이다.

토미 리 존스가 연기한 주인공 행크가 어떤 꼬마에게 옛날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주는 장면. 비로소 제목의 뜻이 밝혀진다. ‘엘라의 계곡’은 3000년 전 다윗과 골리앗이 싸움을 벌인 곳이다. 행크는 다윗이 작은 새총과 돌멩이만으로 거구의 골리앗을 쓰러뜨린 비결을 꼬마에게 말해준다. “다윗은 자신의 공포심을 이겼어. 그래서 골리앗이 상대가 안 된 거야. 골리앗이 달려오는데 꼼짝 안 하고 기다렸단다. 그게 얼마나 큰 용기인 줄 아니? 괴물하고는 그렇게 싸우는 거야. 다가오게 놔뒀다가 눈을 똑바로 보고 끝장내는 거지.”

2009년 한국에서 개봉할 당시 이 영화를 소개하면서 나는 이렇게 썼다. “(〈엘라의 계곡〉이) 우리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격려한다. 괴물하고는 이렇게 싸우는 거다, 어느 아버지의 고군분투를 보여주는 것으로 세상의 모든 다윗을 응원하는 것이다”(〈시사IN〉 제119호). 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내가 쓴 그 문장들이 몹시 부끄러워졌다. 어쩌면 영화가 들려주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행크의 대사가 아니라 꼬마의 대사일지 모른다고, 뒤늦게 생각했다. 그날 행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되물었다. “그런데 그때 다윗은요… 무섭지 않았을까요?”


지난해 다른 지면에 〈엘라의 계곡〉을 다시 소개하면서 이렇게 썼다. “어쩌면 다윗은 특별히 용감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용기 때문에 특별히 외로워진 사람일 것이다.”

〈또 하나의 약속〉을 보는 동안 내 마음은 계속 ‘엘라의 계곡’ 어디쯤을 헤매고 있었다. 특별히 용기 있는 아버지가 아닌, 오히려 그 용기 때문에 ‘특별히 외로워진’ 또 한 명의 아버지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딸의 억울한 죽음을 억울하지 않은 죽음으로 바꾸는 싸움에서 그동안 얼마나 무서웠을지. 모두가 포기하라고 말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서 매 순간 얼마나 외로웠을지. 다행히 이번엔 처음부터 그 외로움과 두려움의 무게를 헤아리며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울면서 한복판에 직구를 던지는 투수처럼

영화가 투수이고 관객이 타자라면, 〈또 하나의 약속〉이 타자를 압도하는 유형의 투수는 아닐 것이다. 이야기를 던지는 폼, 이야기가 꺾여 나가는 궤적, 그리고 이야기의 속도까지 모두 평범해 보인다. 그런데도 〈또 하나의 약속〉을 보며 뭉클한 건, 말하자면 이런 투수를 보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관객의 타이밍을 빼앗는 예리한 변화구 없이, 영리한 볼 배합 없이, 그저 익숙한 직구를 계속 한복판에 찔러넣는 투수. 그런데… 그가 울고 있다. 가슴에 검은색 리본을 달고 애써 눈물을 참으며 공을 한 개 한 개, 최선을 다해 던진다. 어깨가 부서져라 공을 뿌린다. 보는 이는 궁금해진다. 왜 저토록 절실한 걸까? 왜 저렇게까지 간절한 걸까? 검은 리본은 누구를 위해 달았을까? 그 사람은 누구기에 살아서 이 순간을 함께하지 못하고 그의 가슴에서 검은색 리본으로 펄럭이게 된 걸까?

세상엔 그런 경기도 있다. 던지는 ‘솜씨’보다 던지는 ‘이유’ 때문에 더 뭉클해지는. 던지는 이유를 알고 나면, 좀 더 일찍 그 절실하고 간절한 사연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 자꾸 미안해지는.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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