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미국 오하이오 주에 ‘깁슨 그리팅스(Gibson Greetings)’라는 카드 및 포장지 제조업체가 있었다. 깁슨 그리팅스 경영진은 당시 5000만 달러를 고정금리 9%대로 빌린 상태였는데, 금리인하 추세 때문에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변동금리라면 이자 부담이 확 줄어들 텐데!’

그때 접근해온 것이 ‘뱅커스 트러스트(Bankers Trust)’. 새로운 파생금융상품들을 잇따라 내놓아 혁신 붐을 일으킨 금융업체였다. 뱅커스 트러스트는 ‘금리 스와프’를 제안했다. 예컨대 깁슨 그리팅스와 반대로, 변동금리로 대출했으나 이후 금리인상을 예측하는 업체도 있지 않겠는가. 이런 업체와 ‘이자 지불 조건’을 바꾸면 된다는 것. 깁슨 그리팅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자사의 고정금리를 변동금리로 바꿨다. 이는 ‘금리인하’에 ‘베팅’한 것이었고, 90만 달러 정도의 수익을 창출했다.


“녀석들은 그게 뭔지도 모를 거야”

깁슨 그리팅스는 이후 뱅커스 트러스트가 내놓는 각종 기기묘묘한 신용파생상품 계약을 29건이나 체결한다. 그중에는 고정금리 대신 ‘시장금리의 제곱을 6으로 나눈 수치(금리가 3%인 경우, 3을 제곱한 다음 6으로 나눈 1.5%)’로 이자를 지급하는 계약도 있었다. 금리가 내리면 ‘대박’이지만, 조금만 올라도 ‘쪽박’이다. 문제는 금리가 계속 인상됐고, 깁슨 그리팅스의 손실이 기하급수로 폭증했다는 것. 그러나 파생상품 계약이 워낙 복잡하게 설계되어 깁슨 그리팅스는 엄청난 손실을 보고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몰랐다. 더욱이 금융자문사 구실을 하는 뱅커스 트러스트는 손실 규모를 실제의 절반 이하로 알려주고 ‘이 정도면 괜찮다’며 관련 파생상품을 계속 깁슨 그리팅스에 팔았다. 이 과정에서 뱅커스 트러스트의 간부들이 “깁슨 그리팅스 녀석들은 지들이 계약한 상품이 뭔지도 모를걸”이라며 킥킥 댄 것이 녹취되어 폭로되기도 했다.

 

ⓒ시사IN 조우혜

 


그러나 1993년쯤 되면 ‘무지한’ 깁슨 그리팅스 쪽도 금융 손실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인 1750만 달러까지 올라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깁슨 그리팅스는 1994년 뱅커스 트러스트를 사기 및 갈취 혐의로 고소한다. 당시 뱅커스 트러스트는 P&G 등 예닐곱 기업으로부터 비슷한 내용으로 고소된 상황이었다. 미국 금융당국은 뱅커스 트러스트에 1000만 달러 규모의 제재금을 부과했다. 이처럼 상황이 기울자 뱅커스 트러스트는 깁슨 그리팅스로부터 받아야 할 2000만 달러 중 600만 달러만 받고, P&G에도 손실액의 83%인 1억5000만 달러를 배상했다. 그러나 이 사건들로 추락한 뱅커스 트러스트의 신뢰도는 회복되지 않았다. 1998년 도이체방크로 인수되면서 이 회사는 역사에서 사라진다.

‘뱅커스 트러스트 대 깁슨 그리팅스’ 사건이 십수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한국에서 쟁점이 되고 있다. 시중은행들이 2007~2008년 수출 중소기업들에 집중적으로 판매한 환율 관련 신용파생상품 키코(Knock-In Knock-Out, 피해자 쪽박 차도 은행은 안전 기사 참조) 때문이다. 키코는 2005년 외국계 금융기관인 한국씨티은행이 제일 먼저 도입한 뒤 은행권 전체로 번졌다. 2009년 10월 송영길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키코 마진 중 외국계 은행이 챙긴 비중이 72%에 달한다. 이런 와중에 700여 중소기업이 은행과 키코 계약을 맺었다가 환율(달러화 가치) 상승으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 손실액은 3조~4조원으로 추정된다.

이 중 200여 중소기업이 손해배상 등 민사소송을 냈다. 그러나 2010년까지 마무리된 1심(지방법원)에서는 대다수 기업이 패소했다. 기업들은 은행을 사기 혐의 등으로 고소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수사를 벌이던 검찰(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은 키코 사건과 ‘뱅커스 트러스트 대 깁슨 그리팅스’ 간의 유사점을 발견해낸다. 두 사건 모두, 금융기관이 복잡한 금융상품을 고객(기업)에 팔면서 관련 정보를 은폐했다. 또한 고객 기업들은 자사가 얼마나 위험한 처지에 있는지도 몰랐다.

검찰은 2010년 말, 주미 한국 대사관을 통해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증권감독원(SEC) 등 미국 금융감독 당국에 키코 관련 사안들을 질의했다. 〈시사IN〉이 최근 입수한 문건은, 미국의 금융감독 기관들이 답변한 내용을 주한 미국 대사관이 정리해서 다시 검찰로 보낸 것이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키코 사건은 ‘뱅커스 트러스트 대 깁슨 그리팅스 사건’과 매우 유사하며, 파생상품 거래 시 우월한 정보를 지닌 계약 당사자가 상대방 당사자에게 중요한 정보를 숨기거나 잘못 제공한 것은 상대방을 기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마디로 ‘키코’는 사기 사건으로 볼 수 있다는 취지다.

그동안 키코 관련 재판에 나온 증거들을 살펴보면, 은행과 기업이 정상적인 시장거래를 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중소기업에게 은행은 진정한 의미의 ‘갑’이다. 이런 은행이 2007~ 2008년 ‘환율이 하락 추세’라며 키코를 사라고 끈덕지게 중소기업을 압박했다. 2008년 키코 공청회 당시 민주당 김동철 의원 자료에 따르면 2006년 1월부터 20개월 사이, 6개 시중은행 임원들은 중소기업 2453곳을 상대로 1만800번이나 방문해 키코 계약을 권유했다. 업체당 4.4회다. 이와 함께 엄청난 홍보비를 들여 해외연수, 골프 여행, 세미나에까지 중소기업을 끌어들였다. 


3000만원짜리 물건 6000만원에 산 셈

그러나 은행 측은 키코 때문에 기업이 큰 손실을 입을 수 있다는 정보는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다. 뱅커스 트러스트는 깁슨 그리팅스가 투자한 상품의 손실 규모를 크게 줄여서 알려줬다. 그러나 국내 은행들은 이 정도의 정보 제공도 삼갔다. 2008년 3월, 키코 계약자인 ㅅ사는 SC제일은행이 보낸 월별 보고서 중 ‘옵션 평가액’이 마이너스로 표기된 것을 보고 놀랐다. ㅅ사의 부장이 SC제일의 담당 직원에게 전화했는데, 답변은 이랬다. “알려고 하실 필요도 없어요. 막말로 얘기해서 옵션 평가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물어보실 필요도 없어요.” ㅅ사 부장이 “‘위’에서 궁금해한다”라고 했더니 “아무리 이해시키려고 말씀을 드려도 이해 못하세요”라고 했다. 말하자면 SC제일은 키코가 중소기업의 이해가 미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상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이너스 옵션 평가액’이란 것이 기업의 손실을 의미한다는 것조차 설명해주지 않았다.

 

 

 

 

 

 

ⓒ시사IN 윤무영검찰의 키코 합법성 여부 질의에 대해 미국 금융당국이 보내온 답변서.

 

 

더욱이 은행들은 키코가 ‘제로 코스트’ 상품, 즉 수수료를 낼 필요 없는 ‘환헤지’ 계약이라고 선전했다. 심지어 ‘우수 고객에 대한 특별 서비스’라고 너스레를 떠는 은행도 있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은, 은행이 키코의 복잡한 구조 속에 수수료를 숨겨 받아냈다는 것이다. 키코 계약에서, 기업은 ‘일정한 환율 범위 내에서 일정한 규모의 달러화를 일정한 가격으로’ 은행에 팔 수 있다. 즉, ‘파는 권리(풋옵션)’를 은행으로부터 산 것이다. 그 대신 중소기업들은 ‘환율이 일정한 범위 이상으로 올라가는 경우, 일정한 규모의 달러화를 일정한 가격에 매입할 수 있는 권리(콜옵션)’를 은행에 팔았다. 그러니까 기업은 풋옵션을 사고 콜옵션을 팔았으며, 은행은 풋옵션을 팔고 콜옵션을 샀다. 그리고 이런 계약의 설계자인 은행은 이 풋옵션과 콜옵션의 가격이 동일하다며 키코를 팔았다.

그러나 재판을 통해 은행 내부 자료를 보면, 풋옵션 가격보다 콜옵션 가격이 2~7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중소기업 ㅇ사와 신한은행 간 키코 거래의 경우, 기업이 산 풋옵션은 3000만원, 은행이 산 콜옵션은 6000만원으로 신한은행이 평가하고 있다. ㅇ기업 처지에서는 3000만원짜리 ‘물건’의 대가로 6000만원을 지급한 것이다. 그 차액인 3000만원이 은행의 수수료였던 셈이다. 그러나 계약서에는 풋옵션 가격은 500만원 올려 3500만원으로, 콜옵션 가격은 2500만원 내려 3500만원으로 표기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ㅇ기업에는 알리지 않았다.

 

 

 

 

 

 

 

ⓒ뉴시스2010년 10월28일 서울 씨티은행 본점에서 키코(KIKO)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외국계 은행과의 거래 중단을 촉구하는 집회를 갖고 있다.

 

 

지금까지 봤듯이, 은행이 키코에 대해 기업에 알려준 정보는 얼마 되지 않는다. 환율이 일종의 기준선인 녹인(Knock-In)을 넘어가면 엄청난 손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통보하지 않았다. 월별 손실 규모는 ‘말해줘도 모른다’고 했다. 무엇보다 옵션의 가격을 숨겼다. 이 복잡한 상품을 설계한 장본인인 은행은 키코에 대한 ‘무지’를 악용해 중소기업을 철저히 농락했다. 한국 법정은 이를 정당한 시장거래로 간주해 은행에 면죄부를 발급하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2010년 12월 주미 한국 대사관으로부터 설명을 들은 미국 상품선물위원회(CFTC)는, 은행이 옵션 가격에 대한 정보를 숨기고 고객을 잘못 인도했다는 측면에서 키코 사태가 ‘뱅커스 트러스트 대 깁슨 그리팅스’ 사건과 유사하다고 판단했다. 기업들은 키코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손해 보는 거래를 했을 뿐 아니라 이에 따른 의무 사항(은행의 콜옵션)에 대해서도 자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특히 CFTC는, 은행이 풋옵션과 콜옵션의 실제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같다’고 중소기업에 설명한 사실에 주목했다. “이는 기망적 허위 설명이 될 수 있다.” 즉, 속였다는 뜻이다.

더욱이 물물교환(풋옵션 가격=콜옵션 가격)의 경우, 누구든 자신이 받는 물건(중소기업 처지에서는 풋옵션)보다 내놓아야 하는 물건(콜옵션)이 훨씬 비싸다면 거래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은행이 풋옵션과 콜옵션의 가격 차이를 알리지 않고 수수료를 숨긴 이유는, 결국 중소기업을 키코 계약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사기적 행위가 될 가능성이 있다”라고 CFTC 간부는 말했다.


미국 선물거래위원회, “거짓된 설명은 사기”

이에 비해 한국 법원은 은행 측의 수수료 은폐에 대해 문제가 없다는 시각이다. 은행이 키코 같은 상품을 개발해 내놓은 이상 이에 투입된 비용과 일정한 이윤을 보장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 그렇다면 비록 옵션 가격을 조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비용과 이윤을 반영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는 CFTC 역시 인정한다. 다만 문제의 ‘핵심’은, 국내 은행들이 고객에게 이런 사정을 알리지 않아 중소기업들이 거래의 가장 중요한 조건(가격)을 모른 채 키코로 끌려 들어갔다는 것이다. 더욱이 CFTC는 옵션 가격에 반영된 은행의 이윤에 대해 “합리적이어야 하며, 과대해서는 안 된다. 키코 사건에서, 2배 내지 7배 이상의 가치 차이는 과다한 것이며 합리적이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주미 한국 대사관이 CFTC에 이어 2011년 1월5일 면담한 미국 증권감독원 관계자 역시 “(풋옵션과 콜옵션에서) 2배 이상의 가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을 설명하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인다”라고 말했다. “거짓된 설명과 부정직으로 인해 거래가 성사되었다면 이는 사기를 구성한다”라는 견해다. 고객 기업들이 콜옵션 가격이 풋옵션 가격보다 2배 이상 높다는 것을 알았다면 거래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 증권감독원은, 키코에 무지한 고객 기업에 대해 “은행은 공개 의무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 공개는 “정직하고 완전하며 모든 것을 다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국내 중소기업에게 키코는 ‘환헤지’ 상품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키코 유형의 거래는 고도로 노련하고 환율이 어떻게 변동할 것인지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진 고객에게는 적합할지 모르지만 노련하지 못한 고객에게는 위험한 상품이다. (우리라면) 이런 유형의 거래가 합리적인지 조사에 착수할 것이다.”


키코 사태의 주범이 금융위기라고?

검찰은 질의서를 미국에 보낼 무렵 씨티, SC제일, 외환, 신한을 포함한 시중 7개 은행을 대상으로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해놓았다. 은행들이 키코라는 상품을 어떤 의도에서 만들었는지 파악하려면 내부 서류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검찰은 상당히 적극적인 수사 의지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0년 12월 초 법원은 ‘압수수색의 소명이 부족하다’며 영장을 모두 기각해버린다. ‘수사상 필요성’만 소명하면 되는 압수수색 영장이 기각된 것은 이례적이라는 불평이 검찰에서 나왔다. 6개월쯤 뒤인 2011년 5월에는 키코 수사를 이끌며 ‘은행 기소’를 주장했던 박 아무개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가 사의를 밝혔다가 다른 부서로 전보 조처된다. 결국 그는 검찰을 떠난다. 이에 따라 검찰 상층부와 수사팀 사이에 은행 기소를 둘러싸고 갈등이 심각했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이로부터 두 달 뒤인 2011년 7월, 검찰은 키코를 판매한 11개 은행을 모두 무혐의 처분한다. “기업이 손실을 본 것은 금융위기에 따른 급격한 환율 변동 때문이지 은행 측이 상품설계를 불평등하게 했거나 설명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라는 이유에서다. 애써 입수한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와 증권감독원의 견해는 검찰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오직 나쁜 것은 천재지변과도 같은 금융위기라는 것이다.

키코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에 따르면, 현재 130개사가 고등법원에서 손해배상 항소심을 진행 중이다. 이미 항소심에서 패소한 12개사는 대법원에 상고를 제기한 상태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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