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 그림

추워지고 있다. 추워지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짜증날 일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더울 때와 추울 때가 학교에서 스트레스가 가장 심하다. 당연히 날씨는 죄가 없다. 단지 그 날씨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인내’를 강요하는 학교 분위기가 짜증날 뿐이다. 점점 여름과 겨울이 길어지고 여름의 시작과 겨울의 시작이 빨라지고 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아무리 더워도 5월엔 에어컨을 켜지 않고 아무리 추워도 12월 전에는 히터를 틀지 않으려 한다.

올해 여름에도 그랬다. 5월부터 여름의 날씨는 시작되었다. 학생들의 원성이 커지고 교사들도 더워서 수업을 진행하기 어려웠지만 전기 절약과 예산 문제로 교실 에어컨은 켜지지 않았다. 교장은 에어컨 전원 버튼을 마치 트럼프 대통령의 핵 버튼처럼 꼭 쥐고 있었다. 누구라도 전원 버튼에 가까이 가서는 안 됐다. 학교에서 전원 버튼의 권력은 핵 버튼만큼 막강하다.

교장의 권력은 여름보다 겨울에 더 강력하다. 히터 전원 권력에 다른 권력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바로 복장 규정이다. 여전히 우리 학교에는 외투 규정과 무릎담요 규정이 있다. 외투 규정은 등교 시 교복을 모두 착용한 사람만 외투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마다 선도부와 교사가 외투 안에 교복을 입었는지 검사한다. 아침마다 학생들은 현관 근처에서 빠르게 지퍼를 쓱싹 내렸다 올린다. 통행증을 검사하듯 하는 이런 행위가 얼마나 교육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 알 순 없다.

그나마 외투는 잠깐의 ‘쓱싹’만 하면 되니까 학생들도 참는다. 그런데 무릎담요는 그렇지 않다. 학생과 학교가 가장 대립각을 세우는 부분이다. 아무리 추워도 시기가 이르면 히터를 켜지 않으니 10월부터 교실은 서늘하다. 히터가 켜지지 않는 교실에서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은 머리부터 발목까지 담요를 온몸에 감는다.

어느 날 갑자기 교실 밖에서는 담요를 두르지 말라는 규정이 생겼다. 교실 밖에서 무릎담요를 하면 압수까지 하고 있다. 표면적인 이유는 위생상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추워서 감기에 걸리는 것과 무릎담요에 쌓인 먼지로 감기에 걸리는 것 중 무엇이 더 위생상 안 좋을까.

이 학교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하고 있다. 그전에는 12년 동안 학생이기도 했다. 20년 동안 학생으로, 교사로 겪어본 바로는 학교에선 추위와 더위를 학생 개인이 판단하는 게 금지돼 있다. 학생 시절, 가을에 하복을 입거나 봄에 동복을 입으면 벌을 받았다. 내가 느끼는 날씨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교장이나 교사가 느끼는 날씨를 나도 느껴야 했다.

더위·추위를 참다 보면 인내심을 키운다고?

대체 담임선생님은 왜 그랬을까? 어렸을 때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은 약간만 이해한다. 담임도 날씨를 느낄 권리가 없었을 것이다. 날씨를 온전히 느끼고 ‘춥다’ ‘덥다’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교장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날씨를 느끼고 판단하는 자유와 권력을 교장만 갖고 있는 학교의 현실은 지금도 비슷하다. 정도는 약해졌지만 여전히 교장의 권력은 굉장히 크다. 학교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교장이 제왕적 권력을 누린다는 점은 비슷하다. 그 권력을 폭력적으로 행사하느냐 아니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모든 결재 라인의 최상층에 있는 교장이 반대하면 어떤 것도 실행하기 어렵다.

예전에 나를 혼내던 교사들은 추위와 더위를 참다 보면 인내심을 키운다고 했다. 맞다. 추위와 더위처럼 인권침해에도 참는 인내를 배웠다. 성희롱을 참는 인내를 키우기도 했다. 그렇게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니라 폭력일 뿐이다. 앞으로 학교에서 학생이 배워야 할 것은 폭력에 대한 저항이지 폭력에 대한 인내는 아니어야 한다.

기자명 이윤승 (서울 이화미디어고 교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