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4차 방북 취소로 비핵화 협상이 멈춰선 가운데 워싱턴의 대북 기류가 심상치 않다. 중재역을 자임한 한국의 ‘셔틀 외교’가 또다시 바빠졌다. 그런데 미국은 비핵화 진전 없이 대북 관계 진전을 서두르는 한국에 대해 우려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월 하순 워싱턴을 방문해 대북정책 고위 관리들은 물론이고 이들이 조언을 받는 전직 관리들을 두루 만난 댄 스나이더 스탠퍼드 대학 방문학자에게 워싱턴의 기류를 자세히 들었다. 스나이더는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회의감이 미국 관리들 사이에 팽배하며, 한·미 관계는 균열까지는 아니더라도 긴장 상태가 분명히 존재한다”라고 〈시사IN〉에 밝혔다.

북·미 비핵화 협상이 삐걱대면서 9월 유엔총회를 계기로 예상되던 2차 북·미 정상회담은 물 건너갔다. 게다가 1차 북·미 정상회담 직후 미국이 최우선 목표로 정한 북한의 핵 신고서 제출도 현재로선 가늠하기 어렵다. 미국은 북한에 핵과 미사일 시설은 물론 핵무기와 핵탄두, 핵물질 보유 현황까지 망라한 ‘완전한’ 신고를 요구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단계적 핵 신고서 제출’을 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북한은 핵 신고서 제출에 앞서 미국에 실질적인 종전선언을 요구하고 있다.

ⓒAP Photo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왼쪽)의 방북 취소로 미국과 북한의 비핵화 협상이 멈추었다.

이 같은 양측의 엇갈린 기대치 때문에 6·12 북·미 정상회담 이후 가속페달을 밟을 듯하던 비핵화 협상이 사실상 올스톱 상태가 되었다.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폼페이오 장관은 4차 방북 때 북한에 정치적 상징성이 담긴 종전선언을 제공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스나이더는 “고위 관리한테 듣기로는 폼페이오 장관이 4차 방북을 계기로 북측의 종전선언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북측에게서 핵 신고서를 받는 ‘신고 대 선언(declaration for declaration)’ 카드를 내밀 생각이었다”라고 밝혔다. 종전선언 문구와 관련해 스나이더는 “미국은 한국전쟁이 종식됐다는 객관적 사실을 밝히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이런 선언이 평화조약을 대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 일종의 ‘정치적 선언’을 제공할 방침이었다”라고 덧붙였다. 미국은 종전선언이 자칫 주한 유엔사령부의 존치, 나아가 주한 미군의 주둔 여부에 영향을 줄 만한 평화조약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보고 수위를 조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화협정 혹은 평화조약의 전 단계로 실질적 의미의 항구적 종전선언을 원한 북한이 정치적 선언 정도의 종전선언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스나이더는 “일부 관리는 북한이 받아들일 것으로 봤지만, 북한이 폼페이오가 아닌 트럼프에게서 종전선언을 얻어내려 거부했으리라고 본 관리도 있었다”라고 전했다. 지난 7월6~7일 3차 방북 때 폼페이오 장관과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사이에 신경전도 있었다. 폼페이오 장관이 핵 신고서 제출을 요구하자, 김영철 부위원장은 싱가포르 공동성명을 근거로 종전선언 카드를 꺼냈다. 이 과정에서 김영철 부위원장은 폼페이오 장관에게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화해보지 그러느냐?”라며 휴대전화까지 내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제공9월5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왼쪽)이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있다.

“폼페이오 방북 취소, 미국 외교안보팀 작품”

한국에 대한 미국의 시선도 곱지만은 않다. 한국이 비핵화 문제와 관련해 한·미 공조를 깼다는 증거는 없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은 대북 특사단 파견 하루 전날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고 거듭 한·미 공조를 다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국 실무 관리들의 의구심은 가시지 않고 있다. 스나이더는 최근 〈도쿄 게이자이〉에 실린 기고문에서 대북 협상에 간여하는 현직 고위 관리의 말을 인용해 “한국과 큰 문제가 다가오고 있다. 한국이 더는 우리와 보조를 맞추며 움직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시사IN〉에도 “내가 얘기를 나눠본 관리들도 한국이 지금 어디로 가려는지 우려를 나타냈다. 특히 이들은 향후 북·미 비핵화 협상 과정이 중단되는 상황에서도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대북 접근에 나설 가능성을 대단히 우려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한·미 공조 균열 징후와 관련해 눈여겨볼 건 역시 남북 교류와 경제협력 등 지원사업이다. 판문점 선언에 따라 9월 중 개성에 열 예정인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놓고 한·미 공조와 관련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스나이더는 “내가 만나본 미국 관리들은 아무도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대신 미국이 신경 쓰는 건 오히려 대규모 경제협력 건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 8·15 경축사에서 밝힌 ‘동아시아 철도공동체’ 제안을 꼽았다. 스나이더는 “일부 관리는 ‘한국이 이런 식의 사업을 강행할 경우 유엔제재 위반으로 제재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동맹에 사용하는 어휘치곤 상당히 강한 표현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접근방식에 대해선 미국 관리들 간에도 이견이 있지만, 우려감은 널리 공유된 상태이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워싱턴의 대북 기류를 짐작하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은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을 포함한 백악관 외교안보팀의 ‘트럼프 단속’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들어 비핵화 지연에 짜증을 내고, 책임의 일부를 중국에 돌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여전히 북한의 비핵화를 낙관적으로 보며 김정은 위원장과 2차 정상회담을 바라고 있다. 하지만 백악관 외교안보팀은 2차 정상회담이 싱가포르 회담의 재판이 될 수도 있다며 비핵화 협상 속도를 늦추려는 것으로 전해진다. 스나이더는 “실무관리들은 트럼프의 대북 언행이 자신들의 대북 협상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좌절감이 크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폼페이오 장관의 4차 방북 취소 결정은 외교안보팀의 작품으로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비핵화 협상이 종전선언과 핵 신고 문제로 답보 상태에 빠지면서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더욱 회의감을 가진 게 사실이다. 비핵화 과정에 정통한 외교 전문가는 “대북정책에 직접 간여하는 행정부 관리들은 북한과 비핵화 돌파구를 여는 데 대한 어떤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라고 단언했다. 적어도 비핵화 협상의 전망과 관련해 실무 관리들의 판단은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의 우선순위는 비핵화 과정을 지속하는 데 있다고 한다. 설령 교착상태가 지속돼 구체적 결과물이 나오지 않더라도 지금처럼 외교 과정이 진행되면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고조를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시험 중단 효력도 외교 과정이 이어지는 한 계속되리라 본다. 이와 관련해 스나이더는 “전쟁 위험까지 갔던 지난해 군사적 긴장 상태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도 현재의 비핵화 외교 과정은 계속돼야 한다는 데 행정부 관리들이 공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교착상태가 지속돼 비핵화 외교 과정마저 무너질 경우 북·미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9월5일 평양을 방문한 대북 특사단의 중재 외교가 성공하면 북·미 양국 사이 타협안이 나올 수도 있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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