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의 일이다. 십대 딸을 키우는 남자 선배가 딸이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걱정된다는 얘기인 줄 알고 몇 마디 거들었는데, 이런 대답을 들었다. 자신의 딸이 소설 같은 것을 많이 읽지 않아 다행이라고. 나는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을 읽고서야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비채 펴냄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을 요약하면 이렇다. 열세 살 소녀 팡쓰치가 쉰 살의 문학 선생님 리궈화에게 5년에 걸쳐 상습적으로 성폭행당하는 이야기. 이를 눈치챈 어른도 있고 힘겨운 고백을 들은 친구도 있었으며 가해자를 도운 사람까지 있었지만, 아무도 팡쓰치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 한동안 쓰치는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낙원을 보려 했던 것 같다. 가해자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 감정을 사랑이라고 속여본 것도 같다. 그러나 ‘첫사랑’은 잔인한 폭력이고, ‘낙원’으로 위장된 세계는 지옥이었다. 결말을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쓰치는 결국 탈출 아닌 탈출을 한다.

한창 ‘먹어치우듯’ 책 속 세계에 빠져들고 탐닉하는 소녀에게 문학이란 얼마나 위험한가. 리궈화가 소녀들을 꾈 때, 그리고 그들을 버릴 때, 문학의 언어는 부서진 세계를 이어 붙이는 싸구려 접착제로 기능했다. 딸이 소설을 읽지 않기를 바란다는 선배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이 책을 작업하는 동안 편안하게 잠든 날이 없었다. 디자이너도, 외주 조판자도, 마케터도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렇게 책을 내고 나니 작가 린이한의 첫 기일이었다. 그녀에게 문학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직접 밝힌 적은 없지만, 문학을 미워하면서도 사랑했을 것이다. 우리는 문학의 아름다움을 부정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문학은 때로 강력하다. 팡쓰치의 이야기가 타이완과 중국, 홍콩에서 변화의 씨앗이 된 것처럼 말이다.

기자명 이승희 (비채 1팀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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