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한 타이완의 지식인 보양 선생은 중국 역사에서 특히 정신 상태가 황폐했던 황제가 다스린 때를 단두정치(무뇌 정치) 시대라고 불렀다. 단두정치 시대는 수도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명나라 신종, 만력제 시대가 단연 어두웠다.


16세기 중국은 대암흑기였다. 지식인이란 자들이 3년상이나 대례의(적통이 아닌 태자가 친부모를 친부모로 불러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논쟁에 목숨을 걸던 때였다. 엘리트 놀음에 이가 갈려서였을까. 어려서 황제가 된 만력제는 엄한 스승이던 재상 장거정이 죽자 정신없이 노는 데 빠져들었다. 아편을 상습적으로 피웠다. 조회에 며칠에 한 번, 몇 달에 한 번 나타나다 마치 깊은 우물에 빠진 듯 사라져버렸다. 27년 동안 네 차례, 7년에 한 번꼴로 얼굴을 보여줬다. 마약중독자 아니랄까 봐 그는 단 한 가지, 돈을 마련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광산 관리와 세금 징수를 담당한 환관인 광감과 세감의 보고에만 재상들이 민망할 정도로 재빠르게 반응했다. 관리는 손을 놓고 민란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신기하게도 돈을 긁어모으는 일 외에 만력제가 ‘팔딱 뛰는 벼룩처럼’ 예민하게 반응하는 일이 딱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조선 파병이었다. 만력제는 군량을 수송하기 위해 도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조선의 길을 닦아가면서까지 파병을 밀어붙였다. 만력제는 일본이 물러난 뒤 조선을 적신 중국 병사의 피값을 요구하지 않고 순순히 병력을 철수했다. 다시 조선의 왕으로 복귀한 선조는 복권에 당첨된 기분이 아니었을까. 변덕이 죽 끓듯 해서 재위 기간에 1000명이 넘는 궁인을 때려죽인 그가 어떻게 조선에게만 너그러웠는지 지금도 불가해한 일이다.

ⓒ한성원 그림
북한 핵에 대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대처를 보면서 일부 누리꾼이 그를 ‘트력제’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통찰력 있는 일이었다. 미국 대통령으로서 그의 외교 행보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아슬아슬하다. 상대적으로 북핵 관련 행태만 튀지 않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는 오랜 우방과 자국 내 상식 있는 이들을 모두 화나게 만들기로 작심한 듯하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과 싱가포르에서 만나기 직전인 6월9일 폐막된 캐나다 G7 회의에서 그는 “미국은 모든 국가가 돈을 훔쳐가는 저금통이었지만 이제는 끝날 것”이라고 거친 언사를 내뱉었다. ‘법에 의한 질서 있는 지배를 지지한다’는 극히 의례적인 공동성명에도 사인하기를 거부하고 떠났다. 최근의 유럽 방문은 파장이 더 컸다. 그는 독일이 가스 협상에서 러시아 손아귀에 완전히 놀아났다고 비난했다. 영국에서는 테레사 메이 총리의 손을 붙들고 “(미국과 영국은) 가장 높은 수준의 특별한 관계”라고 말하기에 앞서 그녀의 브렉시트 계획을 맹비난하는 결례를 저질렀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스코틀랜드 리조트에서 ‘유럽연합(EU)은 무역의 적’이라고 단언했다.

그런가 하면 러시아 푸틴 대통령에게는 공손하다는 표현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정상회담 3일 전 미국의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가 러시아의 군 정보요원 12명을 미국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했는데도 말이다. 그는 기자들이 러시아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공격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양쪽의 책임’이란 식으로 얼버무렸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핀란드 헬싱키에서 푸틴은 의기양양(smug)했고, 트럼프는 얼간이(mug)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이 빠르게 핵 폐기 시간표를 내놓지 않아 짜증을 낸다는 얘기도 흘러나오지만 적어도 공식적인 대응은 부드럽기만 하다. 김정은 위원장에게서 세 번째 친서를 받은 뒤 ‘당신의 멋진 편지에 감사한다. 곧 보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상냥하게 말했다. 이는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남북, 북·미 정상은 간단하게 비핵화에 합의했지만 실제 북한 무기고의 해체로 가는 길은 너무나 멀고도 험난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대통령이 흔들려서는 애당초 실무협상의 방향조차 잡기 힘들다.

싱가포르 회담이 열린 지 두 달 남짓, 지금 북한과 미국, 그리고 한국의 실무진 사이에는 어떤 논의가 벌어지고 있을까. 지금까지 7차례 북한의 핵시설을 방문한 바 있는 전 로스앨러모스 국립핵연구소장 지그프리드 헤커에 따르면, 이는 과거에 진행된 어떤 핵무기 해체 작업보다 규모가 크고 고된 일이 될 전망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2010년 북한 초청자들은 수줍음과 자부심이 뒤섞인 상태에서 놀라운 장면을 보여주었다. 영변 핵 시설은 완전 새것의 원심분리기 2000기와 우라늄 농축 기계로 가득했다. 2008년 방문했을 때는 없던 것들이므로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조립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 나라가 플루토늄 기반의 기술 외에 우라늄으로부터도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뜻했다.

북한의 핵 능력은 그 뒤로도 계속 성장했다. 핵탄두 20~60개를 갖췄으며 최근 실험은 초기 것보다 위력이 100배나 컸다. 수소폭탄 실험이었다는 얘기다. 미사일 개발도 진전이 있었다. 지난해 실험은 미국 본토까지 가 닿을 수준이었다. 영변뿐만 아니라 최근 우라늄 농축 시설로 의심받는 강송을 포함해 핵 시설은 전국 곳곳에 100군데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생물학무기나 화학무기 등 전체 대량 살상무기로까지 협상 대상을 확대한다면 지금까지 진행된 어떤 군축 작업보다 복잡하고 규모가 큰 일이 될 것이다.

북·미, 그리고 한국의 실무 단계에서는 지금 북한의 핵무기 리스트를 작성하는 문제가 논의되고 있을 공산이 크다. 2008년 미국 크리스토퍼 힐이 진행한 북·미 협상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그 단계까지는 갔다. 당시 북한은 “엄밀히 말해 우리는 귀측과 전쟁 중이다. 우리가 적국과 무기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라고 화를 냈으나 미국 측의 리스트 작성 논의를 수용했다. 이번에도 북한은 아마 종전 선언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강하게 버티겠지만, 전례에 비춰볼 때 리스트 작성까지는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

2008년에는 북한이 1986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손으로 직접 쓴 1만8000쪽 이상의 기록 사본을 제출한 뒤 문제가 더욱 꼬였다. 미국 내 강경파가 핵심 부분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믿지 못하겠다고 일제히 들고일어났기 때문이다.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강경파에 밀려 존 볼턴과 성향이 비슷한 파올라 드슈터가 검증 계획을 짜는 데 동의했다. 드슈터는 평양에 신고 목록에 올라 있지 않은 것을 포함해 장소, 시설, 지점에 대한 완전한 접근을 허용하도록 요구했다. 이는 게임의 룰을 바꾸자는 것과 마찬가지 주장이었다. 그럼에도 북한은 과거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핵 프로그램의 세부 사항을 담은 60쪽짜리 신고서를 다시 제출하는 인내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약속한 중유 공급분 전량의 인도를 미루고 납치 문제로 발목이 잡힌 일본 정부 역시 지원을 중단하면서 북한은 한계에 도달했다. 2009년 5월24일 북한은 다시 핵실험을 하고 적대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북한 리스트에 대한 미국 강경파의 공격이 없었고 한국과 일본의 경제 지원이 계속됐다면 공은 국제원자력기구(IAEA)로 넘어갔을 것이다. 북한은 IAEA의 사찰을 받아들이겠다고 합의한 상태였다. 북한은 1992년 IAEA 조사관을 받아들였다가 다음 해 축출했고 1년 뒤 다시 받아들인 전력이 있다. 만약 북·미 협상이 다시 북한이 IAEA 사찰을 수용하는 단계까지 갔다면 북한의 비핵화 의지는 좀 더 구체적으로 검증될 수 있었다.

핵확산금지조약(NPT)은 핵 보유를 인정받은 5개국(미국·러시아·영국·중국·프랑스)과 나머지 가맹국 간의 약속이다. 핵을 포기하는 대가로 IAEA의 검증을 거쳐 핵에 평화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체제이다.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핵 개발을 하고 있다는 공격을 받자 2003년 NPT를 탈퇴했다.

지난한 북핵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까

NPT와 IAEA는 여러 차례 성공적으로 작동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핵무장을 했다가 포기하고 다시 NPT 가입 자격을 회복한 유일한 나라이다. 이 나라는 6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무너진 뒤 1990년 초부터 해체를 시작해 1991년 10월에는 IAEA의 까다로운 조사단을 맞을 준비를 끝냈다. IAEA의 검증은 2년이 걸렸다. 1991년 이라크 전쟁 뒤에도 IAEA 사찰단은 몇 년간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최근 미국이 발을 빼기 전까지는 이란의 핵 사찰 작업도 순조로운 편이었다. 핵물질 생산 사이클에 대한 접근이 자유롭게 허용되었다. 이란 정부는 예고 없는 사찰 역시 수용하고 있다. 북한 핵 문제가 IAEA 사찰 단계까지 가면 한숨 돌릴 수 있을 것이다.

북한 핵 해체가 IAEA만으로는 역부족일지 모른다. 1991년 이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등 구소련 지역에서 진행된 핵격납고 해체 과정을 참고할 만하다. 당시 미국과 러시아는 수백 기의 장거리 미사일과 핵무기를 파괴했다. 우크라이나에 있던 1800개의 핵탄두를 비롯한 핵폭탄을 러시아로 실어와 해체했다. 위험물질을 철도로 운송해온 구소련 교통체계가 도움이 됐다. 이 작업은 5년 넘게 걸렸다. 북한의 핵탄두도 육로를 통해 중국이나 러시아로 싣고 가서 해체해야 할지 모른다. 지그프리드 헤커 같은 전문가들이 북핵을 완전히 폐기하는 데 10년은 걸릴 거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강경파의 흔들기를 뿌리치고 길고 지난한 북핵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까. 수백 년을 격해서 또다시 우리는 온 세상이 욕하는 나쁜 남자를 응원해야 하는 얄궂은 처지가 되고 말았다.

참고한 활자:〈북핵 롤러코스터〉(시사인북), 〈백양 중국사〉(역사의 아침), 〈이코노미스트〉, 〈워싱턴포스트〉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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